이해합니다,라는 말의 무게
Chapter 1. 고개를 끄덕이는 법
도심의 아침.
지하철, 버스, 횡단보도.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지훈은 이어폰을 낀 채 서 있었다. 전화 통화 중이었다.
점주 A (전화)
“어제 말씀드린 그 아이디어요, 생각해보셨죠?”
지훈은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지훈
“네. 어제 끝나고 계속 생각해봤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다만, 어떻게 거절할지를 생각했다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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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카페 매장.
점주 A는 의욕이 넘쳐 보였다.
점주 A
“이 메뉴 조합, 진짜 될 것 같지 않아요? 요즘 손님들 이런 거 좋아하잖아요.”
지훈은 노트를 펼친 채 메모하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
“말씀 주신 포인트는 충분히 공감됩니다. 흐름도 맞고요.”
점주의 얼굴이 밝아졌다.
점주 A
“역시 담당자님은 달라요. 얘기가 통해요.”
지훈은 웃었다.
익숙한 말이었다.
지훈은 사람의 말을 끊지 않는 것으로 평가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질문하지 않았고,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언제부터 몸에 밴 습관인지 그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어릴 적, 아버지가 화를 내는 날이면 어머니가 먼저 고개를 끄덕이던 장면은 선명했다.
그 고개 하나로 저녁은 조용해졌고, 식탁은 무사했다.
지훈은 그걸 ‘현명함’이라고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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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안에서 점주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아이디어, 시장 흐름, 경쟁 브랜드 이야기까지.
지훈은 노트를 펼쳤지만 글자는 거의 적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향, 요즘 트렌드랑 잘 맞습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제안이 본사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사실을 지금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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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사무실.
지훈의 책상 위 모니터에는 메일 작성 화면이 떠 있었다.
제목: [제안] 메뉴 구성 변경 건
지훈은 키보드 위에 손을 얹은 채 멈췄다.
이건 기준상 안 된다.
비용도, 물류도, 선례도 없다.
그는 메일을 지웠다.
휴지통까지 비웠다.
지금 말해봤자, 서로만 피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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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설명해야 하는 사람
서연은 말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었다.
대신 한 번 말을 꺼내면 끝까지 설명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했다.
“안 되는 건 이유가 있는 거다.
근데 그 이유를 말 안 하면, 네가 잘못한 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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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주는 불만이 쌓인 얼굴이었다.
점주
“다른 데는 다 하는데 왜 우리만 안 됩니까?”
서연은 잠시 숨을 골랐다.
서연
“안 되는 이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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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과 서연이 처음 같은 팀이 되었을 때,
둘은 비슷해 보였다.
같은 해 입사했고, 같은 교육을 받았고, 같은 매뉴얼을 외웠다.
첫 현장도 같았다. 작은 매장이었고, 첫 클레임은 생각보다 컸다.
점주는 화가 나 있었다.
점주
“이게 말이 됩니까? 설명 들을 때랑 다르잖아요.”
지훈은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서연이 입을 열기 전, 그 짧은 침묵까지.
지훈
“말씀 주신 내용,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주의 얼굴이 아주 조금 풀리는 걸 그는 놓치지 않았다.
서연은 그 장면을 보며 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이 방향으로 가면, 오늘 안에 이 건은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서연
“다만 계약서 기준으로 보면, 그 부분은 제공 범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점주
“그러니까 안 해주겠다는 거죠?”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에 계약서를 펼쳤다.
서연
“안 해드리는 게 아니라, 지금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대안을 같이 찾아볼 수는 있습니다.”
지훈은 그때 처음으로 서연을 보며 생각했다.
왜 굳이 저렇게까지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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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길어졌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
매장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지훈이 말했다.
지훈
“조금만 부드럽게 말했으면 오늘 끝났을 수도 있잖아.”
서연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서연
“오늘 끝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음 달에 다시 안 오게 만드는 게 중요하지 않아?”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웃으면 대화는 끝났고, 관계는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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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둘은 같은 보고서를 다른 방식으로 썼다.
지훈의 보고서는 늘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시작했고,
서연의 보고서는 항상 제약 조건으로 시작했다.
몇 달 뒤, 팀장은 지훈에게 말했다.
“현장 반응이 좋아. 사람들이 너 편해해.”
그리고 같은 날, 서연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너 말은 맞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둘 다 옳았다.
다만 회사는,
그중 하나만 오래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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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조용해지는 법
지훈의 어머니는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해에 돌아가셨다.
집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아버지는 말수가 더 줄었다.
지훈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집이라는 공간은, 소리의 총합이라는 걸.
재혼은 빠르지 않았다.
충분히 시간이 흘렀고, 충분히 어른다운 선택처럼 보였다.
새엄마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웃을 때 눈이 먼저 접혔고,
집에 들어올 때마다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
지훈의 학교 일정은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
그 말은 늘 같은 톤이었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어른의 목소리였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것은 있었다.
식탁의 자리, 냄비의 위치, 냉장고 문을 여는 순서 같은 것들.
사소해서 말로 만들기엔 과한 것들.
말로 만드는 순간, 관계가 생길 것 같았다.
관계가 생기면 책임도 따라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식탁에서 먼저 수저를 들었고,
먼저 물을 따랐다.
방으로 들어갈 때는 문을 조용히 닫았고,
텔레비전 소리가 커지면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그날 밤, 아버지가 말했다.
“너 참 어른스럽다.”
지훈은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다만 집이 평온해졌다는 사실은 알았다.
말하지 않으면 표정이 덜 바뀌었다.
고개를 끄덕이면 저녁은 길어지지 않았다.
새엄마는 지훈을 칭찬했다.
숙제를 스스로 하는 아이, 말썽을 부리지 않는 아이.
지훈은 알고 있었다.
그 칭찬이 자신에게 오는 이유를.
그는 잘해서가 아니라,
드러내지 않아서 사랑받고 있었다.
어느 날, 새엄마가 물었다.
“이건 네가 먹고 싶은 거야,
아니면 내가 해줘서 먹는 거야?”
지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괜찮아요.”
그 대답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관계에 대한 답이었다.
그날 이후로 ‘괜찮다’는 말은 지훈의 언어가 되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툼이 생기면 그는 중간에 서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말했다.
“분위기를 잘 아는 아이야.”
그 말은 집에서 들었던 말과 비슷했다.
지훈은 알았다.
자신이 인정받는 이유는 옳아서가 아니라, 조용해서라는 걸.
회사에서 처음 “이해합니다”라는 말을 했을 때,
그는 집의 식탁을 떠올렸다.
말하지 않아도 끝났던 저녁들.
질문을 삼키면 모두가 편해졌던 밤들.
지훈은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고, 판단하고 있었다.
다만 그 판단을 지금 말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배웠다.
조용해지면,
관계는 유지된다는 걸.
“그날 밤, 지훈은 아무 메일도 쓰지 않았다.
서연은 장문의 메일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