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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킴 May 12. 2021

뉴질랜드에서 베이비시터가 되다


주방 보조에서 베이비시터까지


지난주를 끝으로 약 열 달 정도 해오던 베이비 시팅이 끝이 났다. 작년에 일을 시작할 때 6개월이던 아이가 이제 16개월이 되어 데이 케어 센터에 종일 다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로 이주할 당시 나는 적게 벌고 적게 쓰며, 시간적으로는 더 여유 있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직장에 취직을 하거나 고용인이 되어 정해진 시간을 일하고, 또한 가능하면 육체 노동으로 돈을 벌고자 했다. 한국에서 학원을 운영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와는 완전히 다른 일들을 해보고 싶었다. 단순하게 살고자 하는 열망이 매우 컸다. 


그런 열망으로 얻게 된 나의 뉴질랜드에서 첫 직업은 스시 레스토랑의 키친 핸드, 즉 주방 보조였다. 일주일에 사흘, 하루 대 여섯 시간 동안 주방에서 음식을 포장하거나 주방장들을 옆에서 보조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치 않고 건강함과 성실함만 있으면 되는 일이라서 딱 내가 찾던 직업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일을 하다보니 오른쪽 손목이 붓고 아프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손목이 아파 한 달 정도 꼼짝 못했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지레 겁을 먹었다.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보조 일은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그와 함께 나의 육체 노동에 대한 꿈도 사라졌다. 지병을 앓아 온 나의 몸은 간단한 육체 노동도 쉽게 허락하질 않았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일자리를 찾던 중, 이번에는 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ESOL 보조 교사를 구하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바로 지원을 했다. 1차 서류를 통과하고 어린 아이들 네 다섯 명과의 모의 수업, 그리고 면접도 무사 통과했다. 학교 수업 시간에 영어에 어려움을 겪는 국제 학생들을 돕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뉴질랜드에 온 지 일 년만에 내 적성에 딱 맞는 일자리를 구하는데 성공했다는 기쁨과 흥분도 잠시, 나는 현지인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영어에 매일 현기증이 났다. 아침 출근길이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한국말로 시원시원하게 강의를 했던 나는 내 어중간한 영어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영 성에 차지 않았다. 나는 ESOL 보조교사 일을 일 년 만에 그만두고, 내 부족한 영어도 늘리고 구직과 영주권 신청에 더 유리한 자격도 갖추고자 석사 공부를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한 웅큼씩 빠질 정도로 힘들게 공부했던 석사 과정을 마치고 나는 드디어 작은 현지 회사의 사무직을 얻었다. 하지만 첫 출근 후 3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의 여파로 직장을 잃게 되었고, 거기에다 해외에 있던 뉴질랜드인들이 귀국하면서 영주권도 없는 외국인 신분으로서의 구직은 더욱 어려워졌다.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라도 하며 더 나은 구직 자리를 기다리려던 차에, 이 베이비시터 구인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내 아이들 육아는 베이비시터의 손길을 빌려놓고, 이제는 내가 베이비시터가 되어 다른 아기를 돌본다고 하니 뭔가 어색했지만 그래도 지원을 했다. 하는 일에 비해 보수도 후했기 때문이다. 면접을 보고 며칠 후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나는 생전 처음 해 보는 일에 은근히 설레면서 시작일을 기다렸다. 때 맞추어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유나 이유식을 먹이고 아기랑 놀아주는 것이 나의 할 일이었다. 기저귀 갈기나 이유식 먹이는 일이 가장 쉬웠고, 아기랑 놀아주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내가 어렸을 때 불렀던 노래나, 아이들을 키우며 불러 주었던 노래들을 기억 속에서 소환해내어 아이에게 불러주었고,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하늘, 구름, 나무, 새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나는 어땠지?


네 개의 직업을 거치는 동안, 나는 한국에서 내 위치와는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졌다. 고용주에서 고용인으로의 사회적 신분의 변화는 참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게 했다. 무슨 일이든 할 것이며 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기롭게 장담하긴 했지만 실제로 살아보니 고용인으로서의 삶이 쉽지가 않았다. 이론과 실제의 현격한 차이를 실감했다고 해야 하나. 


고용주의 입장에 있어 봤기 때문에 나는 내가 고용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에 맞추어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고용주들을 만족시키는 일은 꽤 어려웠다. 어쩌면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거 내 회사의 직원들과 내 아이들을 돌봐 주시던 아주머니의 입장을 나는 얼마나 헤아렸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영어 학원에 종종 뉴질랜드 출신 선생님들을 원어민 선생님으로 고용했던 내 옛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멀리 타국에서 지내는 그들의 삶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었는지 회상해 보기도 했다. 이 곳에서 고용인으로서 조금이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면 나는 과연 이전에 내 직원들을 충분히 정당하게 대우했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 업무 지시와 평가를 받는 입장이 된 경험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더 어리고 젊었을 때 경험해 보았어야 했다. 어쩌겠는가? 내 인생에는 그것이 반대의 순서로 펼쳐졌으니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 


그래도 한가지 다행인 것은 내 에고(Ego) 혹은 자존심이 전보다 꽤 작아져서 크게 상처받거나 마음 다치지 않고 그 일들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순간 순간 뾰족한 마음이 올라온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마음을 오래 두지 않고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잘 다스렸다. 인생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져서인지, ‘이 나이에 이런 일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왔는가?’하는 한탄이나 투정까지는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삶의 반대쪽도 경험함으로써 다양한 사람 사는 모습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가는 것이 감사했다. 





겨울 나무의 지혜


주방 보조, ESOL 보조 교사, 아이 돌보미, 영주권 없는 이민자, 소수 인종, 무주택자, 무직자, 가난한 싱글맘. 


이곳에서 나의 삶은 직업, 재산, 사회적 신분, 영어 수준 등 여러 기준에서 밀려도 한참 밀리는 삶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겉으로는 많은 것을 가졌던 이전의 삶보다 지금의 삶에서 더 풍요를 느낀다. 


객관적으로 불리한 환경에 놓여 있다 보니 나의 생각은 자연스레 ‘어떻게 하면 삶의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옮겨 왔다. 내가 이전에 ‘사회적 표준’이라고 믿었던 신념들과 관습들을 다시 고민하고 그것들 중 이제는 버려야 할 것들,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들을 가려낸다.


비로소 나는 모든 화려한 잎사귀를 벗어버린 겨울 나무의 지혜를 배운다. 겨울 나무는 밖으로 자라지 않고 안으로 자란다. 푸르른 잎사귀를 떨구고 뿌리를 깊게 내려 물줄기를 찾는데 여념이 없다. 맨 몸으로 우뚝 서서 힘을 응축한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그 응축된 힘은 푸르고 아름다운 잎사귀와 열매가 된다. 때를 아는 겨울 나무의 그 굳건한 생명력에 삶의 이치가 있다.





마음을 다림질 해주는 뉴질랜드의 햇빛


주변인로서의 현재의 삶은 이전에 정상을 향해 달리며 놓쳤던 소중한 것들을 보게 한다. 주변에 눈길과 애정을 주니 그곳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정상만 보이던 내 눈에 낮은 지대에 살고 있는 다양한 관목과 풀들이 보이고 그 사이 사이를 걷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보이며, 그리고 그 안의 풍경을 이루고 있는 나 자신도 보인다. 시야가 넓어졌고, 너그러워졌다.


마음을 다림질해주는 것 같은 뉴질랜드의 햇빛 속에서 저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행복을 느끼며, 여러가지 야채와 각종 향신료로 음식을 짓는 향이 집안을 가득 채울 때 나의 마음도 더불어 넉넉히 채워진다. 아이들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아이들이 자주 듣는 음악 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 때 세상 근심은 사라진다.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친구들과 피우는 이야기꽃이 내 마음을 환히 밝힐 때, 산책하다 마주치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눈인사와 미소가 정겨울 때, 나는 그저 행복하기만 하다. 


위대한 예술가에게 위대한 풍경은 필요치 않다고 한다. 진정으로 위대한 예술가는 소박한 풍경에서도 위대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 정작 내 삶의 주인공은 되지 못하던 역설적인 내 과거의 풍경들. 그것들이 저 아늑한 곳으로 밀려 나고 난 지금, 나는 여전히 미래를 꿈꾸며 나아간다. 하지만 현재의 시간은 미래에 갇혀 있지 않다. 주변부에 있는 나의 현재를 받아들이고 소박한 일상을 즐기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이제서야 비로소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우위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내 삶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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