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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킴 Apr 30. 2021

사이좋게(?) 이혼하는 법

한국과 뉴질랜드의 이혼





뉴질랜드의 이혼 풍경


얼마 전, 가깝게 지내는 뉴질랜드 현지인 아저씨의 손자 생일이었다. 아이의 생일파티에는 아이의 부모님들과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두 참석했다. 특이한 점은 나와 가까운 현지인 아저씨를 비롯, 아이의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이미 이혼을 한 상태였다는 것이고, 이들이 각자 새로운 파트너와 함께 참석을 했다는 것이었다. 아이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모두 현재 만나는 남자친구와 함께 참석했고, 아이 친아빠와 친엄마 또한 각자 새로운 파트너와 함께였으며, 심지어 아이의 전 새아빠(?)의 새 파트너의 친자녀까지도 참석했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복잡한 관계의 가족들이 모두 모인 풍경에 '너무 경계선이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한국의 문화에서 자라 온 나의 생각일 뿐. 사실 뉴질랜드에서 이런 모습은 매우 보기 흔한 모습이다.  


함께하는 삶이 만족스럽지 못해 헤어졌을텐데, 파티에서 만나 서로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는 것이 껄끄럽지 않을까? 각자 행복을 찾아 깔끔하게 떠났으니 상처가 적은 편인가? 혹은 이혼을 하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일이 크게 문제시 되거나 죄악시 되지 않는 뉴질랜드의 문화 때문일까? 


여러 의문을 가지고 바라본 이들의 삶의 한 모습. 어찌됐건 생일파티 주인공인 아이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혼이야 이미 벌어진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삶의 중요한 순간들에 '가족들이 모두 함께한다는 것'이 큰 의미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아이들이 매우 어렸을 때 이혼을 했다. 


이후로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면서 양육과 관련하여 전남편과 연락을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전남편과 통화하는 나를 본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우리가 재결합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종종 했는데, 그 이유는 나의 전남편을 향한 너무(?) 친절한 태도 때문이었다. 


내 이혼 과정을 전부 지켜본 사람들로서 그들은 우리가 당연히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전쟁을 방불케 했던 이혼 과정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전남편을 대하는 나의 일상적인 태도를 재결합의 의도로 오해한 것이었다. 전혀 재결합의 의도가 없다는 나의 대답에 그들은 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의 속내를 궁금해했다. 





이혼 소송의 쓴 맛을 보다


사실 여느 이혼과 마찬가지로 내 이혼도 상당히 지저분하고 고통스럽게 끝이 났다. 협의 이혼의 절차로 시작되었던 전남편과 나의 이혼은 재산 분할 및 양육권 지정이 얽힌 소송까지 가고 말았다. 


이혼 소송 과정은 그야말로 씁쓸함의 결정체였다. 소송이 걸렸으니 나는 변호사를 선임했다. 변호사는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혼 결정에 이르기까지 경위, 즉 일종의 ‘사건 일지’를 작성하도록 했다. 밤을 새워 가며 기억을 더듬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소송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나는 상대방이 유책 당사자임을 입증해야 했다. 전 남편의 잘못들을 낱낱이 파헤쳐야 했던 것이다. 그 과정은 마치 깊게 베인 상처를 한 번 더 찢어 발기는 것 같았다. 


그의 책임을 입증하기 위해 내가 그려낸 전 남편은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매우 나쁜 인간이었다. 마찬가지로 전 남편도 자신의 책임을 덜어내기 위해 나를 비난했다. 


첫 재판 당시, 판사와 다른 많은 이혼 소송 중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재판정에서 전 남편이 그려낸 나의 모습은 인간적인 예의라고는 없는, 돈 밖에 모르는 매우 상스럽고 몰상식한 여자였다. 처음 보는 판사가 상대방 측의 주장을 줄줄 읊은 후에 사실 확인을 위해 내게 질문을 하던 모습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둘러싸여진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우리의 개인사는 심하게 왜곡되고 부풀려 진 채로 속절없이 까발려졌다. 첫 공판의 충격으로 인해 나는 끝까지 재판으로 가고자 하는 전의를 모두 상실했고, 곧 조정 심판 권고를 받아들였다. 


결국 내가 양육권과 친권을 모두 가져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재판상 이혼의 과정을 지나면서 나는 이 이혼 절차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헷갈렸다. 


재판으로 이혼을 한 많은 사람들이 전 배우자가 그렇게 질 나쁜 인간인지 몰랐다고 말한다. 모두들 재판 과정에서 더 많이 상처받고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이혼을 겪은 사람들이 특별히 나쁜 인간들이어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그렇게 ‘천하에 나쁜 인간’들로 만들어 갈 수밖에 없는 이 제도에 의문을 가진다. 당사자들의 법적 권리 보호라는 명목 아래, 두 사람을 영원히 화해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가기 때문에.





뉴질랜드에서 가족이란


반면 이곳 뉴질랜드의 이혼 제도는 아주 다른 모습이다. 크게 이혼의 사유가 없어도 '한쪽 당사자'가 원하고 '2년 이상의 기간을 별거'했으면 당사자들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이혼은 바로 성립된다. 이혼하면 재산은 대개 법적으로 5:5로 나뉘게 되니, 웬만하면 법정 다툼도 하지 않는다.


법정 다툼으로 더 큰 상처를 주고받는 대신에, 뉴질랜드에서 이혼하는 부부들은 이혼 이후에도 자녀들을 중심으로 이어질 그들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둘 사이에 아이들이 있는 경우 어떤 식으로든 만남이 지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묶여 있기 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뉴질랜드의 이 제도도 나름대로 문제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혼과 헤어짐의 과정에서 받는 마음의 상처가 훨씬 덜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혼 후에도 부모가 아이들을 매개로 자주 얼굴을 보고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또 이해 못 할 일도 아닌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혼한 부부가 꽤 돈독한 사이가 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아이들 양육에 참여한 사람들로서 갖게 되는 동지애(?)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처음에 나는 이곳 사람들의 자주 바뀌는 파트너 관계 등을 보면서 가족에 대해 너무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가 의문을 가졌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가족은 여전히 삶의 중심에 있는 소중한 가치이다. 


다만, 가족의 테두리가 결혼이라는 제도 보다는 ‘핏줄’을 중심으로 지켜진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서로 만족스럽지 못한 커플이 ‘결혼 중심의 가족’을 지키고자 무조건 희생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녀 양육이라는 공동의 책임을 수행하며 아이들과의 관계는 계속 지속 발전시켜 갈 수 있다. 





헤어졌어도 아이의 부모이기에


결혼이 깨지면 많은 관계가 더불어 깨져버리는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외도를 하고, 협의 이혼의 약속을 깨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혼 후 받을 재산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소송까지 나를 몰고 간 전 남편을 용서하는 것은 내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를 향한 배신감과 끓어오르는 분노가 나를 집어 삼킬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의지적으로’ 용서하기로 결심한 것은 아이들과 나의 이후의 삶을 이혼이라는 쓰라린 사건 안에 가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혼 후 얼마 안 된 어느 날, 나는 일을 마치고 잠든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 앞에서 꽁꽁 숨겨 두었던 내 내면의 감정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진득한 슬픔과 삶에 대한 회한 같은 것들이었다. 천진하게 잠든 아이들 얼굴을 보는 중, 갑작스레 생각이 ‘나’의 삶에서 ‘그들의’ 삶으로 옮겨 갔다. 내가 나의 감정과 삶에, 그것도 이미 지나가 버려서 돌이킬 수도 없는 과거의 사건에 사로 잡혀 있어서 아이들이 받을 상처와 영향에 대해서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혼을 내 관점이 아니라 아이들 관점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보게 된 날이었다. 아이들에게 아빠와 물리적으로 항상 함께 할 수 없게 만든 것도 미안한 일인데, 감정적인 면까지 멀어지게 하는 것은 엄마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로 느껴졌다. 


비록 우리는 이혼을 통해 ‘남’이 되었을지라도, 아이들에게 그는 영원히 아빠일 것이라는 그 분명한 사실이 나를 정신 나게 했던 것이다. 


아빠에 대한 아이들의 감정을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를 느꼈다. 아이들 앞에서 전남편의 흠을 잡지 않는 것으로 내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었다. 내가 마음으로 계속 그를 미워하면 부지불식간에 그 감정들이 나올 것이고 앞으로의 삶에 걸림돌이 될 것이었다. 아빠를 향한 아이들의 순수한 동경을 지켜주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의지적인 용서를 했다. 결과적으로 보건대 그것은 매우 잘 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아이들 입을 통해 듣는 그들의 아빠에 대한 추억과 이야기는 늘 즐겁고 재미지다. 


이혼을 둘러싼 한국과 뉴질랜드의 문화와 배경이 다른데 그 제도를 수평 비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국의 이혼 제도에서도 관계를 계속 이어갈 자녀들의 삶의 다양한 측면을 조금 더 배려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이들의 양육비 지원에 대한 해결만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재판 과정에서 재산 분할과 양육권 지정을 둘러싸고 서로 비난하고 헐뜯어야만 하는 제도, 그리하여 미운 정도 고운 정도 모두 떨어지게 하는 제도의 무신경함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한다. 이혼했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혼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또 다른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으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부모가 원수가 되기보다는 아이들의 부모로서 끝까지 그들의 삶에 함께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보다 친절한 한국 이혼 제도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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