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 킴 Apr 20. 2021

삼 월의 가을, 나는 여전히 봄을 탄다

계절성 우울증에 대한 고찰






까칠한 나와 명랑한 나



나는 두 개의 다른 몸과 마음, 즉 두 개의 다른 인격을 지녔다. 1년을 거의 정확히 6개월 단위로 나누어 ‘유쾌 상쾌 발랄 명랑한 조증의 나’와 ‘음울 침울 까칠 성마른 울증의 나’로 나누어 산다. 




큰 아들 시현이가 내 상반된 모습을 그린 그림.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우울증은 내게 극단적인 두 가지 성격을 주었다. 우울할 때의 나와 아닐 때의 나. 이번 글에서는 우울하지 않은, 명랑할 때의 내 상태를 '조증'에 비유하려 한다.  



매년 3월말에서 4월 초가 되면 나의 몸과 마음의 에너지장은 드라마틱하게 변한다. 잠이 많아지고 몸은 무기력하게 늘어진다. 4~5시간만 자도 끄떡없던 몸은 9시간 10시간을 자도 개운치 않고 무겁다. 소화력도 급속도로 떨어진다. 먹는 음식과 상관없이 먹기만 하면 체하고 명치가 꽉 막힌 느낌에 늘 소화제를 달고 사는 시기이기도 하다. 머릿속은 늘 안개가 낀 듯 흐릿하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일이 매우 어려워지고, 여기 저기 마무리되지 않은 일들이 쌓여만 간다. 



가까운 곳에서 이런 나를 지켜본 친구는 한국의 봄마다 돌아오는 이 우울증의 시기를 역설적이게도 '겨울잠'이라고 표현한다. 



이 시기 나는 까칠해지고 화를 잘 낸다. 외부 자극에 매우 취약해져 스트레스를 만땅으로 받는다. 성격 장애를 의심할 정도로 작은 일에도 불뚝 불뚝 스팀을 올린다. 불안, 초조, 우울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단어들이다. 계절은 봄인데, 심하게 가을을 타며 외로움과 고독속으로 들어간다. 눈물은 왜 그렇게 많은지 물을 잔뜩 먹은 스펀지를 비틀어 짜는 것 마냥, 온 몸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언젠가 한번은 ‘나를 이 따위 몸으로 밖에 낳지 못했냐’고 엄마 가슴에 대못 박는 원망을 쏟아냈을 만큼, 사는 것 자체가 천형처럼 느껴지고 태어난 것을 저주하는 시기다.  



반면, 한국 날씨를 기준으로 콧구멍을 시원하게 하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에너지 충만한 다른 내가 부활한다. 활력과 기운이 넘치고 두뇌 회전도 잘 된다. 잠은 짧고 깊게 잔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웬만한 일처리를 다 한다. 인생에서 이루지 못할 일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하고 싶은 일들이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저런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 시기이다. 입을 크게 벌리고 깔깔깔 웃어제끼는 내가 출현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전염성 강한 웃음에 매료된다. 밥은 얼마나 맛있고 복스럽게 먹는지, 밥을 다 먹고 숟가락을 놓은 사람조차 다시 숟가락을 들게 만든다. 인생은 살아 볼 만하다는 생각으로 충만해진다.  






3월마다 꽃피는 우울증



한국에 있을 때 '우울한 나’는 3월, 꽃피는 봄과 함께 시작됐다. 춘곤증으로 대변되는 봄의 나른함과 발 맞추어 내 몸이 무기력해지기 시작하니, 나는 괜히 봄 탓을 많이 했다. 봄을 타나보다 한 것이다. 무기력해지다 못해 따가운 여름 볕에 형체를 잃고 녹아 내리는 아스팔트처럼 몸이 축축 늘어지는 여름이 오면, 그건 분명 인정 없이 후덥지근한 여름 탓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번에는 여름을 타나보다 하며, 체력의 문제라고 진단하고 한의원으로 달려 가서 보약을 달이고, 몸에 좋다는 건강 식품을 찾아 나섰다.  



뉴질랜드로 오면서 나는 이제 여름마다 찾아오는 그 죽음 같은 몸의 침잠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일단 뉴질랜드의 여름은 한국만큼 덥지 않고, 계절 또한 반대로 돈다. 그러니 양상이 달라지건, 정도가 덜해지건 내 계절성 우울증에 어떤 변화가 있으리란 기대를 했다. 



웬걸? 7월은 여기에서 한 겨울이니 쌩쌩 날아다녀야 하는 시기인데도, 참 불가사의하게 나의 몸과 마음은 계절이 어떻든 상관없이 정확히 3, 4월에 가라앉고 10, 11월을 기점으로 기운을 냈다. 



이건 계절성 우울증이 아니라 시기적 우울증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여기서도 똑같은 일을 겪으면서 이것은 계절보다는 다른 것과 연관이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이것도 그동안의 나의 몸과 마음의 관찰을 토대로 한 추측일 뿐, 명확한 이유는 모른다. 






내가 나를 나무랄 때



한 인격의 지속성의 부재는 나 자신과의 관계를 불안정하고 건강하지 못하게 한 매우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나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시기(10월~3월)의 경험은 울증의 나를 향해 자비 없는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 



비판은 가혹하고 신랄했다. ‘기운 넘치는 나’가 새해 세워 놓은 계획들을 지속하지 못하는 울증의 나를 의지가 약하다고 비판했다. 



모든 것에 의욕을 잃고 시름 시름한 나의 마음을 (우울증 때문인 것을 알면서도)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판단했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독이기 보다는 보약을 들이 부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고 인정머리 없이 채근해 댔다. 나는 울증의 나를 온전한 하나의 인격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감수성이 예민해진 울증의 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돌봄을 필요로 했으나, '조증(비유하자면)'의 나는 부단한 채찍질로 고통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자기 학대였다. 



평생의 절반을 불화하는 두 인격 사이에서 흔들려 왔다. 어느 것이 나인가? 서로 보듬어 안지 못하고 끊임없이 대립하는 두 인격 사이에서 나는 그 누구도 아니었다. 나는 내 안에서 나를 잃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게으르지 않다. 다른 사람들만큼 부지런하다. 학창 시절에는 모범생이었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나 자신을 소진해 가며 오히려 너무 열심히 일했다. 의지력도 약하다고 볼 수 없다. 일상 생활을 하며 30일 금식도 해낼 수 있을 만큼의 의지력을 누가 약하다고 하겠는가? 



내가 연초에 세운 계획들을 지속하지 못했던 이유는 게을러서도 아니고 의지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다. 그랬기에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거나 또 둘을 부드럽게 연결하는 접점을 찾아야 된다는 인식이 없었을 뿐이다.






4월이 돌아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내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일상을 그려가고 있는 중이다. 먼저는 나 자신을 깎아 내리고 나무라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것은 무의식적 습관 같은 거라서 언제든지 올라온다. 



아침에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꾸물거리며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모습, 응당 참석해야 할 미팅을 취소하고 집에 콕 박혀 있고 싶은 욕구, 텔레비전 앞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라면을 먹으라고 말하는 나의 모습, 내 관심과 애정을 바라는 아이들에게 피곤하고 차가운 말을 던지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는 나의 모습, 알뜰 살뜰 살펴온 건강 지침을 한 순간에 내던지는 나의 모습 등등에 자동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미운 마음을 일으키는 나를 발견한다. 



바로 머리를 흔들며 그 비판적 생각 속에서 재빨리 빠져나온다. ‘괜찮아, 이래도 괜찮아’를 열 번쯤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나면 비판의 가시들이 사그라든다. 몇 개월전에 시작한 명상 덕분에 나의 무의식적인 부정적인 반응들을 그나마 분별하는 힘이 생겼다. 숙제는 여기에서 부드럽게 탈출하는 것이다.  






맥심 커피가 당기는 이유



이맘 때쯤이면 노란 일회용 맥심커피가 당기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맥심 커피 뿐만 아니라, 라면, 매콤하고 얼큰한 탕 종류, 초콜릿, 땅콩 버터, 치즈 케잌 등 내가 평소 먹지 않는 기름지고 달콤하며 자극적인 음식들이 엄청, 정말 엄청 당긴다.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데, 이맘때면 텔레비전 앞에서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내며 뭔가 흥미로운 것을 계속 찾는다. 나의 무기력해지고 감각에 둔해진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라는 생각이 든다. 뭔가 세고 강렬한 자극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나는 내 자신을 비판하는 것을 멈추고, 그런 소소한 몸과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욕구를 채워주고 있다. 맥심 커피를 한 잔, 때론 두 잔을 마신다. 초콜릿도 먹어준다. 



먹고 마시되, 죄책감과 결부시키지 않고 행복하게 마신다. 텔레비전도 본다. 그러면서 내 몸을 기분 좋게 달래 준다. 지금의 상태는 에너지 넘치는 내가 아님을 받아들이고 있다. 울증인 내가 자기 속도로 일상을 꾸려 갈수 있도록 기다려 준다.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덜해져서 인가? 마음에 여유가 좀 생긴다.  



그 남는 에너지 덕분에 그동안 해오던 108배와 냉수 샤워를 꾸준히 한다. 



모든 것을 포기했던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 좋다. 108배를 하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한 배, 두 배…. 횟수를 거듭할 때 마다 나는 조급함을 내려 놓고, 또 울증의 나에게 힘을 실어 준다. 무릎을 구부리고 펴면서, 내 안의 두개의 다른 충동이 상충이 아니라 상생이 되도록 하는 길을 탐색한다. 



108배 이후 바로 이어지는 냉수 샤워는 무감하고 안개로 가득 찬 듯한 정신에 특효약이다. 점점 추워지고 있는 이 곳의 이른 아침 냉수는 ‘흐억’ 소리가 날 정도로 차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물줄기는 내 몸 세포 하나 하나를 깨운다. 살아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다. 울증의 나와 마냥 들뜬 조증 같은 내가 합일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얼마 전부터는 머리가 흐릿 해지는 오후에 냉수 샤워를 한차례 더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저녁 7시면 방전되던 정신과 몸이 요즘은 9시까지는 견딘다. 한결 낫다.  





우울의 감수성으로 글을 쓴다



이 두 인격을 화해 시키는 가장 큰 도구는 ‘글쓰기’이다. 얼마 전부터 브런치에 글을 올린다. 구독자가 조금씩 늘어가니 일종의 의무감이 생겼다. 이 의무감이 일주일에 적어도 한 편을 쓰고자 했던 내 원래 계획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내 안에 고여 있던 이야기를 꺼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조금씩 답을 해 가고 있다고 느낀다. 일 년을 쓰고 나면, 내 글에서도 두 인격이 보일까 하는 엉뚱한 물음도 가져 본다.  



여튼 나는 글을 쓰며 글 속에서 두 인격을 아우르려고 한다. 늘 냉대와 구박을 벗어나지 못했던 울증인 나의 예민한 감성이 두각을 드러내며 이 글쓰기를 이끌어 간다. 울증의 감수성이 처음으로 고맙다. 나의 울증도 그 안에 강력한 힘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 


이 글쓰기를 통해 울증의 깊은 내면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내공을 쌓아 가기를 바란다. 


나의 울증이 ‘강.강.강’으로만 치닫는 명랑하기만 한 나의 조절 없는 뻗침을 감싸안고 부드럽게 내려앉는 그림을 그려본다. 음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태극의 문양처럼.  



작가의 이전글 그러나 사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