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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공비행 Oct 11. 2023

갖춰놓고 시작한다는 것.

여름의 끝에서 가을의 시작으로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겁을 먹고, 쫄고, 조금씩 시간을 흐름에 태우는 것. 감히 무엇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이. 그래서 무엇을 갖출 건데?라고 물으면 답을 쉽게 내지 못하는.


어차피 안될 놈이라는 것이나 나는 뭔가를 해내지 못할 것이란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 저조한 태도에서 파생된, 바닥의 감정과 의지는 아니었다. 단지 무의식이 과신을 안일함으로 덮었고, 자유를 구속으로 뒤집었을 뿐이었다.



미친 발걸음을 걸어 나가겠다는 다짐 위에서, 큰 애정을 지니고 있진 않으나 두 번째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이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긍정의 의미에서 광적인 발전과 성장.

무언가를 이루어나가는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철저하게 자기 객관화와 대척점에 서 있었다.


부정의 의미에서 '광'. 행동보다 말이 앞섰다. 아니, 애초에 행동이 부재하였으니, 앞서고 자시고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될 놈이라는 생각 하나만 가진 채,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완전한 동의는 못할지라도, 겁을 먹었다거나 쫄았다는 생각 혹은 무의미한 시간을 흘러 보낸다는 현재에 대한 인식은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머물러 있었다는 생각에 두려움과 불안함, 슬픔이 나를 잠식하더라도, 고개를 뒤로 돌아보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주었던, 기나긴 '미친 발걸음'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말. 그런 비슷한 말을 23년의 초에 남겼다. 진심을 욱여넣어 썼고, 다수에게 공개하였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꼈지만, 현재도 그러한가?라는 자문에는 긍정의 답을 남기지 못할 것 같다. 대과거와 달리, 최근의 몇 개월은 정말 머물러 있었음이니.




누군가는 계속 걸었고, 누군가는 달렸으며, 또 누군가는 하늘을 날았다.



그것은 내 눈에 확실히 담겼다. 너무나 큰 슬픔이 찾아왔다. 전혀 광적이지 않았다는 사실. 한때는 누구보다 광적이었으나, 이제는 그 누구보다 정적이기에.


흐르지 않으면 고이고, 고이면 결국 썩는다. 썩고 싶은가? 하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지 않은가. 그 당연한 것을 못하였기에, 어느 순간부터 멈춰버렸기에, 오랜 시간 방전되고 방치되었던 전원 버튼을 다시 누를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전자 제품들이 다 그러하듯, 오래 사용하지 않거나 전원을 켜지 않으면 결국 성능은 떨어지고, 다시 작동되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단순한 생각에서, '아깝다' 그리고 '쓰고 싶다'라는 느낌을 떠올리고 스스로에게 적용하였다. 날 쓰고 싶다는 말, 즉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또 발전하여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거나 향유하는 것.


이제 달라질 테다. 바뀔 것이다. 대단한 일을 만들어낼 것이다.

와 같은 큰 포부와 결심을 지니지는 않았다. 마음속에 품은, 상당히 짧은 인생의 반이나 날 지탱해 준 가치는 그대로였으나, 현재의 심신이 그 길을 걸어갈 능력 측면에서 아쉬움이 있음을 명확히 인지하였기에,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 보기로 하였다.


간접이 아닌 직접 경험. 부딪혀보아야 한다는 점.

그렇게 해봐야 계속하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결국 이뤄낼 수 있다는 단순한 포인트.


좁아진 시선과 마인드를 탈피하기 위한 매우 작은 행위. 없어진 것인지 혹은 잃어버린 것인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으며 걸어 나가는 것.


이것은 지난여름의 어느 새벽, 연희동 골목에서 책장을 찾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벽에 노트북을 폈다.



나의 현재 상황과 일상을 분석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행위를 기준으로 하여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었다. '나'를 나누었다.


1. 현재 하고 있는 일

2. 하고 있지는 않으나, 해야 하는 일

3. 하고 싶은 일


각 카테고리의 행위들에 다시 가치를 매겼다. 그 모든 것들을, 순위에 따라 나열하였다.


피아노와 기타를 더 능숙하게 연주하는 것과 축구 리그를 우승하는 일들과 같은 취미들을 포함하여, 외국어 공부나 전공으로서의 철학도 있었다. 그중에서 여러 카테고리에 중복되는 일들이 있었고, 개인적 관심까지 반영을 하니, 1번부터 3번까지 모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 있었다. 스포츠 산업과 관련된 일들도 있었지만, 매거진이 특히 그랬다.


그렇게, 가치 순위가 매겨졌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무엇이 중요한지 느꼈다. 그 무엇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 어떤 점들이 필요할지 고민을 하니, 더욱 그 일을 내가 왜 하는지, 어떻게 해 왔고 어떻게 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중요해졌다. 그렇게 WHY의 굴레를 씌웠다.


이미 시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나 고정된 포맷, 그리고 새롭게 시도해 볼 법한 포인트들이 눈에 보였다.


우선은 이미 시행해 오던, 그런 역사가 있는 프로젝트들에 먼저 시선을 보냈다. 단체를 지탱하고, 긴 시간 지속되어 왔으며, 결과물들을 계속 냈던 프로젝트들. 그것들에 건방질 수도 있지만, '대체 그걸 왜 하는가?'라는 질문을 날카롭게 던져보았다. 구체적이고 탄탄한 답변을 스스로도 많이 도출해 냈지만, 그 이전에 집단이자 주체에 대한 정의가 우선이었다. 행위의 주체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하고 있는 일을 아무리 떠들고 그 일이 어떤 의미나 가치를 지녔는지 알려봤자, 위의 요소가 불분명하다면 전체적인 집단과 그 개인 하나하나의 가치가 퇴색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주체를 Z로 상정하고 출발하였다. 여러 철학 수업들에서 배운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매우 파편적으로나마 반영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시작하였다.


What is Z = Z는 무엇인가?라는 첫 질문에서, Z는 ~한 무엇이다.라는 답을 내었다.


왜 ~한가? / 왜 '무엇'인가? 를 물었고, 다음으로는 왜 'Z'인가?를 물었다.

뒤의 질문의 경우, 이름으로서의 의미와 존재로서의 의미를 모두 담았다. 그렇게 확립의 과정을 보냈다.


다음으로,


Z는 무엇을 하고, 또 해 왔으며, 왜 그 무엇을 하는가? 를 물었다.


이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 무엇을 함으로써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고, 그 결과는 어디에 기여해 낼 수 있으며, 왜 기여를 하는지, 또 Z가 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어떤 것들인지에 대한 정리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기여를 통해서 맞은 편의 이들뿐만 아니라, Z 자체와 Z에 포함된 이들 모두가 얻을 수 있는 것들 또한 눈에 보였다. 평소에 습관적으로 생각을 하였거나, 의식을 한 채 Z에 합류하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긴 체화의 시간 속에서 자리 잡힌 생각들이 그나마 뒷받침해 주었던 것 같다.


글, 사진, 그림과 웹진, 인스타그램 등을 중심으로 Z가 주는 것, 줄 수 있는 것들이 위의 대상(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어떤 구조를 지니는지 또한 바라보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Z에 속한 사람들이 얻는 것과 참여하는 이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개인으로서의 나 또한 무엇을 얻고, 또 얻고자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어려우면서도 쉬운 고민.


Z에 왜 합류했고, 왜 그렇게 열정을 가진 채 에디터로서의 일들을 진행해 왔으며, 왜 지금 Z 자체를 앞장서서 이끌고자 하는지에 대한 고민들.


나라는 개인과 Z에 대한 고민 이후에는, 앞서 이미 해오던 일들에 대한 생각을 다시 반복하였다. 제일 베이스에 놓여 있는 Z에서 출발해, 가장 크면서도 가장 작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나'를 놓은 채 생각의 꼬리를 계속 이어 나가니, 퍼즐처럼 조금씩 구조가 맞춰지기 시작하였다.


하나의 생각 구조가 만들어졌다. 나만의 생각 구조. 앞으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대입해 볼 수 있는 구조. 물론 그 완성도나 범용성, 디테일은 계속해서 고민하고 보완해 나가야 되겠지만. 극한의 즉흥과 무의식으로 일을 벌이고 진행해 오거나 열정에만 몸을 실었던 과거와 다르게 조금은 사소한 부분을 바꿨다는 느낌을 얻었다.



고민의 시간들이 끝나니,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다.



하고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에 모두 포함될 뿐만 아니라 지위에서 나오는 책임감과 개인적 관심까지 모두 반영한 채 우선순위를 지니는 일.


그 거대하다면 거대한 일을 글을 통하여 WHY의 구조 아래 녹여냈고, 그 일 내에서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것으로서의, 지금까지 시행해 왔던 프로젝트들에 대한 정리와 구조화를 어느 정도 끝냈고, 그 안에서 나의 역할과 이점, 참여의 이유 그리고 스스로의 감정을 포함한 몸과 마음의 상태 모두에 대한 인식을 조금이나마 해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보였다.


글, 사진, 영상, 그림 그 어떤 매체가 되었든 간에, 우리(이제부터 나와 Z의 모든 이들은 '우리'다.)가 왜 Z이고, 왜 그 일들을 해나가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등이 모두 정리가 되었고, 그 기본적인 정리를 바탕으로 하여 기존에 해오던 위 매체를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들을 어떻게 이어나갈지도 조금씩 보였다.


그렇게 구글 공유 드라이브 내에 독스 파일을 생성하였다. 생각의 흐름을 모두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사례까지 뒷받침을 하니, 단순한 매뉴얼 내지는 이해를 돕기 위한 글을 목적으로 하였음에도 12페이지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요약을 많이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 이후에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프로젝트 기획, 주변 사람들에게 자체적인 프레젠테이션 하기, 모두가 공감을 한 후에 스타트를 끊고 참여를 유도하는 일들 (제대로 해본 적 없지만 일단 머리 들이밀기)을 하고 있다. 매거진 관련 입점 제안 및 파티, 전시 관련 협업 요청도 있었고 매우 작지만 다양한 찬스들이 눈에 보인다. 손에 잡힐 것 같기도 하다. 하나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보였다고 하지 않았나. Z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해내고, 이미 만들어낸 생각 구조에 대입함으로써 방향의 올바름을 검증하는 시간을 반복하다 보니, 해도 되는 것과 할 필요 없는 일이 보였고 다음을 기약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렇게 기준이 생겼다.


* 글만 보았을 때에는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일종의 기록이자 정리를 가볍게 해보고 싶었다. 생각의 구조를 러프하게나마 만들어냈고, 그걸 내 현재와 일상에 반영하여 우선순위를 정리하였으며, 앞으로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일들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에 대한 판단이 섰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자기기만의 탈피라는 동아줄을 잡았다. 갖춰놓고 시작한다는 말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 리프레시된 마음가짐으로 미약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발걸음을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감사하다. 참으로 기쁘다. 물론 시작을 해냈다는 사실에 잠겨 과몰입하거나 무의식적인 안주를 반복할 생각은 없다. 더욱 착실하게 분석하고, 돌아보고, 생각 구조 내에서의 순환을 통해 반성하며 정리된 요소들을 조금씩 이어나가고자 한다. 디테일은 계속 덧붙여질 것이고, 구조의 사이드 부분들은 변화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를 시작으로, 여러 카테고리와 일들을 돌아보았으며, 우선순위와 가치에 대한 고민도 하였다. 최상단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을 대상에 대해 WHY의 굴레와 반복을 통하여 분석 및 고민을 진행하였고, 동시에 나만의 생각 스트럭쳐가 생겼다. 그 구조에 다시 대입함으로써, 어떤 일을 어떻게 해나 갈지에 대한 길을 찾았다. 아직 안개가 가득한 듯한 인상을 주는 부분들도 있지만, 눈으로 보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만큼은 작은 의의를 두며.


물론 앞으로 시간이 흐를 때마다 그 구조의 디테일에 계속 시멘트를 덧칠해야 하며, 혹시나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의 힘에 무게를 과하게 싣다 보니, 그 방향의 상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 마디로 현 상황을 남에게 표현하자면 "우당탕탕 한 보 전진"이라 할 수 있겠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전자보다는 후자에 초점을 맞추고 싶기에, 두 걸음 세 걸음 전진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우당탕탕을 석공처럼 다듬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이 글을 가볍게 쓰고 또 정리하는 과정에서 Z에 대한 생각은 매일 정리되곤 하였지만, '나'라는 복잡 미묘한 시스템을 간파하는 일은 어렵고도 힘든 일임을 안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니까. 하지만 또 사람이니, 방법을 찾고 또 새로운 우당탕탕을 트라이해 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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