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채우다, 첫번째 날

2025년 5월 15일

by 여록

어제 새벽에 브런치 작가승인 메일을 받았다. 세번째 도전 후에 얻은 결과였다. 두번째 탈락을 했을 때는 야속해서 브런치로는 손가락도 안움직이겠다 다짐을 했었는데 네이버 블로그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진솔한 글을 쓰고 싶은 욕구' 때문에 다시 브런치의 문을 두드릴 수 밖에 없었다.

매일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지 작가 승인이 안 나면 어떠랴는 심정으로 그동안 서랍에 비공개 글을 수 십편 써왔다. 수 십편의 글을 쓰다보니 주제가 여러 개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가 미승인 상태에서도 브런치의 매거진을 활용할 수 있다면 작가승인을 신청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 대부분의 솔직한 심정은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고 비판도 해주면 좋겠다'가 아닐까.

그래서인지 나 또한 비공개 글과 공개 글을 쓸 때의 온도차가 있다. 비공개글은 내용도 맥락없이 널뛰기를 하고 맞춤법은 오류투성이이고 문장을 가다듬지도 않고 짧게 쓰려고만 한다. 2000글자 이상의 글을 쓰려면 2시간 정도가 필요하고 글을 쓰고 나면 진이 쭉 빠지기 때문에 공개도 안되는 글에 뭐하러 힘을 쏟나 싶은 불손한 마음이 든다.

이제 브런치의 작가로 승인이 났으니 하루의 일기도 제법 정성을 들여야 한다. 정성을 쏟아 일기를 쓰다보면 나의 하루가 더 소중해지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시작한다.


2025년 5월 15일 목요일

밤새 비가 내렸나보다.

비의 영향 때문인지 언덕같은 뒷산에서 새소리가 다른 날보다 적게 들린다.

반려견 꾸러기가 숲을 걷자고 한다.

물이라면 질색을 하는 녀석이기에 다시 비가 내리기 전에 배변을 하도록 산책을 서둘러야 한다.

녀석은 내 심정을 재기라고 한듯이 금방 오줌과 똥을 싼다.


원래도 동네에서 동떨어진 산 아래 조용한 집터인데

5월 중순의 초록을 반쯤 가리고 있는 아침 비안개 때문에 산세의 풍광이 더 고즈넉해졌다.

언니가 차려주는 아침상.

어제 먹다가 남은 피자 두 조각과 커피, 그리고 샐러드와 코코아카라멜이다.

다른 날은 테라스에서 경치를 보며 브런치를 즐겼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밖이 서늘하다.

거실에서 오로지 먹는 일에 충실하기로 했다.


언니는 이틀 뒤에 방문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집청소를 하느라 분주하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고 화장실 청소부터 하겠다고 사라졌다.


아침잠이 많은 우리 자매에게 오전 시간은 언제나 빠듯하다.

11시에 직장동료와 멤버들을 만나기로 했기에 부지런히 씻고 집을 나섰다.

나가는 길에 고추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엄마에게 아침인사를 했다.

엄마는 밭고랑 저 멀리서 "밥은 먹고 나가냐?"라고 묻는다.

언제나 같은 질문이다.

부모님에게 자식들의 식사 여부는 왜 그렇게도 중요한 것일까.


약속한 이들을 예정보다 1시간 가량 늦게 도착했다.

여러 국적의 멤버들이 섞여 있기에 시간개념이 서로 달라 약속시간을 딱 맞추기가 쉽지 않다.

점심으로 해물칼국수를 먹었다.


편법을 자주 사용하는 동료와의 자리는 언제나 불편하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또 머리를 굴린다.

온갖 인심을 다 쓰는 척하면서 자신은 먼저 갈테니 마무리는 나에게 하라는 격이다.

실소를 금치 못하겠지만 "그래,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우리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겠어?"라며 그냥 사람 좋은 척 속아준다.


동료는 불쾌한 사람이었지만,

그를 보내고 난 후 남은 멤버들과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두 달 동안 일주일에 겨우 두 시간씩을 만나면서 표면적으로만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그들과 가까이에서 말을 해보니 아주 훌륭한 친구들이었다.

장래를 위해서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는 친구,

자신의 역할에 책임을 다하며 보람을 느끼고 싶어하는 친구,

감성이 풍부하여 잔잔한 바다와 물안개 속에서 두 팔을 벌리고 눈을 감은 채 마음으로 시를 읊는 친구,

그리고 서툰 언어에도 우리나라 사람 뺨치게 농담을 잘 하는 친구들과의 3시간은 소중했다.

그대들을 더 많이 이해하도록 노력할게요.

그들과 헤어져 매일 오다시피하는 시장길을 걸었다.

매일 차를 타고 이동할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봄의 색채가 그득한 개울의 풍경을 보고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매일 보는 길이 오늘따라 아주 다르게 보였다.

책을 읽기 위해 스타벅스로 갔다.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한 랑시에르의 책과 대화를 나누며 여러 번 각성을 한다.

글을 쓰겠다고?

너는 어떤 글을 쓸 건데?

책을 읽는 2시간이 나의 하루 중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책을 읽기만 하고 글을 쓰지 않는다면 고통은 없을 텐데..

책을 읽으며 브런치스토리에 후기를 남긴다. 후기를 쥐어 짜내는 건 고통스럽지만 또 나름의 쾌감이 있다. 글은 첫줄을 쓸 때와는 다르게 저절로 써지는 부분도 있었다.


언니는 무려 8시간 동안 청소를 했다고 한다.

특히 꾸러기의 털이 집안에 많이 빠져 있어서 일일이 털을 제거하느라 녹초가 되었다며 족발을 먹고 싶다고 한다.

집에 들러 언니와 꾸러기를 싣고 족발집으로 갔다. 족발집은 배달주문이 밀려 있었다. 점심도 굶어서 기운이 없다는 언니가 늦어지는 음식에 짜증을 내려고 할 즈음 족발이 나왔다. 다른 날보다 더 맛있는 미쓰족발이었다. 내 기준, 우리 동네에서는 미쓰족발이 가장 맛있다.

둘이 먹었는데도 반쯤 먹고나자 배가 부르다. 집에서 홀로 저녁을 드셨을 엄마를 위해 포장을 해가기로 했다. 엄마는 남동생과 고구마를 심고 있었는데 남동생과 저녁을 먹었을 지도 모른다. 야식으로 드시면 되겠지..


손님맞이 청소한 집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과 내일은 언니와 함께 엄마 집에서 머문다.

2년 전까지 혼자 살 때는 집에서의 시간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는데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시간의 주도권이 없다는 점이다.

후배와 함께 작성하는 연구계획서를 다듬는 와중에도 언니는 TV를 보자며 계속 불러댄다. 내가 뭔가에 몰입해 있을 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언니는 나를 몇 차례나 불렀나 보다. 왜 대답을 안하냐며 짜증을 낸다. "나 지금 연구계획서 작성 중이잖아! 안 들려!!!"

후배와 카톡과 전화통화를 하며 계획서를 대충 정리했다. 1시간 30분 정도 보낸 것 같다.


그 와중에도 스승의 날이라고 전화를 준 아주 오래된 제자와는 조심스럽게 통화했다. 20년 가까이 참으로 소중한 인연이다. 회사에서 또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것 같다. 그의 성실하고 진실한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남은 시간은 언니와 트롯 방송을 보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방송이 끝나자 너무너무 졸려서 세수조차 할 힘이 없었다.

양치만 하고 자도 얼굴이 썩지는 않겠지, 뭐.


5월 16일에 매거진에 올린다.

5월 16일에 채운 하루는 내일 5월 17일과 묶어서 올려야겠다.

오늘은 브런치스토리의 메뉴들을 익히느라 시간을 많이 보냈기 때문에 그만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