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기록을 남기겠다 선포했지만,
매일 글을 쓴다는 건 역시나 공염불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책상에 각을 잡고 앉아 잠시 마음을 추스리는 예비시간이 필요하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 속으로 몰입해야 하는데 주말이란 끊임없이 나의 시간을 침범해오는 상황과 사람들이 있다.
기차 안에서 쓸 수도 있었겠지만 노트북에 익숙해진 자판이라 휴대폰으로 긴 글을 쓰기란 고되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전 날의 일기는 스킵하고 기차안에서 짬짬이 메모해 놓았던 토요일 일기를 남긴다.
2025년 5월 17일 토요일
일기예보를 보고 맑을 줄 알았는데 밤에는 비까지 내리드라.
반려견 꾸리가 떨어져 잤다고 시무룩하다.
6시에 깼지만 이불속에서 8시까지 더 뒤척인다.
아침녘에 잠깐 꾼 꿈에서는 벌어진 벽의 틈으로 물이 들어와 침대까지 물이 차서 처리하느라 애를 먹었다. 꿈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전에 반지하 방에서 자취생활을 할 때 겪었던 물난리가 기억났다. 10년 넘게 잊고 있었는데...
늦잠을 자고 싶어 꾸리의 산책은 엄마에게 시켜달라고 했다. 할머니와 이웃마을까지 산책을 다녀온 꾸리는 신남과 발랄함을 온몸에 장착하고 왔다. 나는 꾸리를 쓰다듬으며 토요일이라 최대한 이불 속에서 밍기적거린다.
언니가 냉장고를 털어 창의적인 샐러드를 만들었다. 엄마재배표 채소와 딸기로 만든 샐러드라서 신선함이 더 뛰어나다. 언니는 어제 저녁으로 방문했던 브런치카페에서 먹은 유럽입맛 샐러드가 마음에 들었던 지 비슷하게 흉내를 내려고 했다. 맛이 제법 좋았다.
결혼식에 가기 위한 기차는 11시 10분 발이다. 천천히 아침을 먹고 마늘밭에 약을 치러 온 동생과 농담도 실실 나눈 후 씻고 나왔다. 차타기를 좋아하는 꾸리는 왜 자기를 안 데려 가냐며 원망스런 눈으로 배웅을 한다. "꾸리야, 오늘은 기차를 타야 해서 너를 못 데려 가. 이모랑 재미있게 놀고 있어. 저녁에 보자!"
언니에게 꾸리의 물과 간식을 잘 챙겨주고 햇볕에 따가우니 수시로 꾸리를 그늘로 옮겨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기차역에 도착하니 무려 12분이나 연착이 된다는 메시지가 뜬다. 그래서 역 주변의 녹색을 감상하며 브런치스토리에 일기를 쓰고 있다.
어제는 종일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25도를 웃도는 햇볕 가득한 날이다. 종종 어제의 먹구름이 남아 있기도 하다.
쨍한 햇살은 곧 한여름이 도착할 것이라는 걸 알려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에서 꽃잎들을 날려 보낸다.
진정한 초록색이 꽃처럼 예쁘다.
2시간 동안 책을 읽고 챗GPT와 연구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기차 이동을 했다. AI와 공부한다는 책을 읽으면서 궁금증이 생겨 챗GPT를 열고 연구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너무 재미있는 게 아닌가. 혼자서 구상했던 것들보다 더 참신하고 깊이 있는 연구주제들을 여럿 얻어낼 수 있었다. 덕분에 연구가 재미있어 진다면 직장에 대한 무료함이 줄어들지 않을까.
기차가 연착되어 결혼식 시간에 겨우 맞출 줄 알았는데 도착 기차역에서 목적지로 가는 전철이 막 출발해버린 상태였다. 15분 이상을 하릴없이 기다려야했다. 점심시간을 한참 지나 있어서 배도 고프다. 축의금을 식장에서 직접 내려면 늦을 지도 몰라 은행으로 송금을 했다. 오랜 친구이자 고마운 친구의 결혼식에 화환을 보내려다가 차라리 축의금을 더 하기로 했다.
결혼식에 15분 가량 늦었다. 진행이 빨랐는지 식은 벌써 끝나가고 있었다. 행진하는 신랑에게 눈을 맞춰 인사하고 식당으로 갔다. 혼자먹는 뷔페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내 지인들은 신랑의 친구들이어서 사진을 찍은 후 식당으로 왔다.
결혼식장에 가면 몇 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 다른 생활을 하면서 벌어진 몇 년의 공백은 그저 잘 지냈느냐는,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는, 결혼은 했냐는 형식적인 안부를 나누고 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어색해진다. 그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각자 할 일을 하도록 빨리 인사시간을 정리하는 게 센스있는 방식이다.
친구들과 지역축제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백종원이 수많은 전국의 축제장을 헤집어 놓았기 때문에 올해부터 해당 축제들은 고군분투하며 백종원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 지역의 특색이나 다양성을 갖추지 못하고 그저 인기에 편승해 쉽게 방문객 수만 늘리려고만 했던 지자체들에게는 호된 교훈이 될 듯 하다. 결혼식장에서 2시간 여를 보내고 귀가를 한다.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커피를 마셨다. 마호가니커피라는 카페의 커피값에 기절할 지경이다. 커피잔의 크기 기준도 스몰과 기본이 다른 카페들과 달라서 기본을 시켜놓고 양이 많아서 당황스러웠다.
서울을 방문하는 일이 나이를 먹을수록 힘들어진다. 딱 기차를 타고 결혼식 하나를 다녀올 뿐인데, 내 결혼식도 아니었는데 몸이 천근만근이다. 시골생활의 한적함이 벌써 그리워졌다. 귀향하기를 얼마나 잘했나. 지금까지도 서울살이를 하고 있다면 중병을 앓고 있을 게 분명하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읽던 책을 마저 읽으려고 했는데 기운이 없어 휴대폰으로 게임을 한 시간 정도 했다. 게임을 하며 놀다보니 정신이 돌아왔다. 남은 시간은 책을 읽으며 보냈다.
집에 돌아와 드라마 <귀궁>을 보고 더이상 버틸 힘이 없어 잠자리에 들었다. 토요일에 한 일은 별로 없는데 시간은 무진장 길게 느껴진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