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에 빠진 동화 0323
당근 밭에서!
당근밭을 지키는 허수아비<허수>는 알고 있었다.
당근을 훔쳐먹기 위해 밭에 들어온 동물을 모두 알고 있었다.
영수네 당근밭에 심은 당근은 날마다 한 바구니씩 누군가 훔쳐갔다.
"허수야!
넌 알고 있지?"
아침 일찍 당근밭에 나온 영수 할아버지가 허수에게 물었다.
당근을 심고 거름을 준 할아버지는 날마다 당근이 없어지는 걸 보고 허수에게 물었다.
하지만 허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근을 훔쳐먹은 동물들이 밤에 또 나타나 자신을 괴롭힐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허수야!
고양이 <샘>이야?
아니면
염소 <코딱지>야?
아니지!
토끼 <콩콩>이구나?
그것도 아니면
노루 <냉냉>이지."
하고 할아버지가 물었다.
"말해 봐!
내가 널 혼내려고 묻는 게 아니야."
할아버지는 허수를 달랬다.
하지만 허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숲에서 내려온 녀석들이야?"
하고 다시 물었다.
"네!"
하고 허수는 하마터면 대답할 뻔했다.
"보아하니!
숲에서 내려온 녀석들이군."
할아버지는 허수가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 짐작했다.
"이 녀석들을!
그냥 혼내줘야겠다.
멧돼지들이지?
아니면
사슴이야?
노루나 산토끼는 이렇게 많이 훔쳐가지 않아."
할아버지가 또 허수에게 물었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다 알고 있는 듯했다.
당근밭에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허수에게 말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그 녀석들도 먹고살기 위해서 왔겠지.
허수야!
어디 다친 데는 없지?"
하고 할아버지는 당근 훔쳐간 범인 잡는 걸 포기하고 허수 걱정을 했다.
"네!
다친 데 없어요."
허수가 긴 침묵을 깨고 대답했다.
"알았다!"
하고 대답한 할아버지는
당근을 가득 뽑아 지게에 짊어지고 시장에 갔다.
할아버지는
한두 시간 후에 빈 지게를 짊어지고 올 것이다.
영수네 당근은
장터에서 제일 잘 팔리는 당근이었다.
숲 속!
당근을 훔쳐다 먹은 멧돼지 가족은 뒹굴며 신나게 놀았다.
"허수가 말하지 않았겠지!"
숲 속에서 뒹굴던 멧돼지 한 마리가 대장 멧돼지에게 물었다.
"아마도!
말했으면 벌써 할아버지가 숲으로 우릴 쫓아왔을 거야."
대장 멧돼지는 할아버지 성격을 안다.
끝까지 쫓아가서 잡고 마는 성격이란 걸 잘 안다.
하지만
총을 들고 나타나지 않은 걸 보아 허수가 말하지 않는 것으로 믿었다.
"대장!
오늘 밤에도 당근 훔쳐 먹으러 가야지."
"당근이지!
그 맛있는 당근을 다 팔기 전에 빨리 가서 훔쳐먹어야지.
아마!
오늘 밤에는 산토끼랑 노루도 당근 훔쳐먹으러 올 거야."
대장 멧돼지는 다른 동물들이 당근 훔쳐먹는 걸 싫어했다.
"대장!
오늘 밤에 산토끼랑 노루도 잡아먹을까?"
젊은 멧돼지 한 마리가 물었다.
"아니!
숲 속에 존재하는 질서와 법을 지키야지."
대장 멧돼지는 다른 동물을 잡아먹지 않았다.
대장다웠다.
하지만
젊은 멧돼지들은 배가 고프면 대장 몰래 산토끼도 잡아먹고 새끼노루도 잡아먹었다.
"대장!
당근을 모두 뽑아 숲 속에 숨겨놓고 먹으면 어떨까?'
나이 많은 멧돼지가 매일 밤마다 당근밭에 가는 게 싫었다.
"그것도 안 돼!
당근밭에 당근이 하나도 없으면 할아버지가 총 들고 숲으로 올 거야.
그러면!
누군가 죽어."
대장 멧돼지 말이 맞았다.
할아버지는 총 들고 숲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작년에 고구마밭에서 고구마가 모두 없어진 날이었다.
조금씩 없어지는 건 용서했지만
한꺼번에 다 뽑아가거나 훔쳐가는 건 용서하지 않았다.
"대장!
오늘은 일찍 가서 많이 먹고 오자."
하고 새끼 멧돼지가 말했다.
"알았어!
해가 저 산을 넘어가면 모두 출발할 테니 가서 잠이나 실컷 자."
대장 멧돼지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숲 속의 대장은 멧돼지!
호랑이가 없는 숲 속의 대장은 멧돼지!"
무서운 상대가 없는 새끼 멧돼지들이 노래 불렀다.
"저것들이!
숲 속의 대장이라니.
소나무 가지에서 숲을 살피던 독수리 한 마리가 새끼 멧돼지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히히히!
대장 멧돼지가 잠이 들면 너희들 중에 한 마리는 내 먹이가 될 거야."
조용히 지켜보던 독수리는 새끼 멧돼지들이 노는 걸 지켜봤다.
"숲 속의 대장은 멧돼지!
호랑이가 없는 숲 속의 대장은 멧돼지!
우리들의 세상!
멧돼지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왔다."
새끼 멧돼지들은 더 크게 노래 불렀다.
"히히히!
대장이 코를 고는 군."
독수리는 날개에 힘을 주고 긴 발톱을 꺼냈다.
소나무 가지를 박차고 새끼 멧돼지들이 노는 곳을 향해 날았다.
'까악'
하고 소리친 독수리가 다리를 길게 뻗었다.
'꿀꿀! 꿀꿀!'
순식간에 새끼 멧돼지 한 마리를 낚아챈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날았다.
"안 돼!"
엄마 멧돼지가 소리치며 달려갔지만 소용없었다.
"대장!
독수리가 새끼를 잡아갔어."
엄마 멧돼지가 대장 멧돼지를 깨웠다.
"뭐라고!
새끼를 잡아갔다고."
눈을 비비며 일어난 대장 멧돼지가 물었다.
"저기!
저기 날아가는 독수리가 새끼 멧돼지를 낚아채 갔어요."
하고 엄마 멧돼지가 말하자
"이 녀석을!
잡기만 하면 내가 한 입에 삼켜버릴 거야."
대장 멧돼지가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날아가는 독수리를 보고 달렸지만 따라갈 수 없었다.
독수리는 숲 정상을 향해 날았다.
'꿀꿀! 꿀꿀!'
새끼 멧돼지가 발버둥 쳤지만 날카로운 발톱이 목을 조였다.
목에서 피가 흘렀다.
'꿀 굴! 꿀 꾸울! 꿀꿀!'
대장 멧돼지가 소리치며 달렸다.
숲에서 평화롭게 놀던 동물들이 모두 숨었다.
돌이 이리저리 뒹굴고 어린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쓰러졌다.
하지만
새끼 멧돼지를 구할 수 없었다.
숲 속에서 먹이사슬은 항상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일어나!"
대장 멧돼지가 새끼를 잃은 엄마 멧돼지를 일으켜 세웠다.
당근밭에 갈 시간이었다.
엄마 멧돼지는 먹고 싶은 게 없었다.
올빼미에게 새끼 한 마리를 잃은 슬픔이 가득했다.
"모두 출발!"
대장 멧돼지가 당근밭을 향해 앞장섰다.
엄마 멧돼지도 한 참 망설이더니 제일 뒤에서 멧돼지 무리를 따랐다.
"대장!
오늘은 배불리 먹어도 될까?"
하고 젊은 멧돼지가 물었다.
"맘대로 해!
아침까지 여기서 먹고 놀 테니까."
대장 멧돼지는 새끼 잃은 슬픔을 당근밭에서 풀 생각이었다.
"허수!
잘 있었지."
대장 멧돼지가 허수를 보고 물었다.
"네!"
허수가 부들부들 몸을 떨며 대답했다.
"우리가 온 걸 알리면 알지!"
"네!"
허수는 몇 번이나 멧돼지 무리들에게 밭에서 뽑혀 버려졌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아침에 와서
또 그 자리에 깊이 다리를 꽂아주어 지금까지 당근밭을 지킬 수 있었다.
"오늘은 밤새 여기서 놀 거야!"
대장 멧돼지가 허수에게 말한 뒤 당근을 뽑아 먹기 시작했다.
새끼 멧돼지들은 당근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당근을 파헤쳤다.
"안 돼!
뽑아먹기만 해.
당근을 다 파헤치면 할아버지가 화낼 거야."
허수가 새끼 멧돼지들에게 말했다.
"뭐라고!
이게 우리들에게 명령을 해."
새끼 멧돼지들이 허수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허수를 이리저리 밀쳤다.
허수는 힘없이 넘어졌다.
새끼 멧돼지들은 허수가 입은 옷을 물고 이리저리 당겼다.
"그만해!"
엄마 멧돼지가 외쳤다.
하지만 새끼 멧돼지들은 멈추지 않고 허수를 짓밟고 물어뜯었다.
"그만!
그만하라니까."
엄마 멧돼지가 더 크게 외쳤다.
하지만
흥분한 새끼 멧돼지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만!"
대장 멧돼지가 크게 외쳤다.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숲 속에서 잠자던 새들이 멀리 날아갔다.
'꿀꿀! 꿀꿀!'
새끼 멧돼지들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새끼 한 마리가 허수 모자를 짓밟고 또 한 마리는 옷을 물고 당근밭을 달렸다.
"그만!"
대장 멧돼지가 더 크게 외치자 새끼 멧돼지들이 눈치를 봤다.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잠이 오지 않던 할아버지는 창문을 열었다.
"저것들이 또 왔군!"
밤나무골 당근밭을 쳐다보던 할아버지는
새까만 그림자가 당근밭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할아버지는 당근을 걱정하다 잠이 들었다.
아침 일찍
할아버지는 일어나 밤나무골 당근밭을 쳐다봤다.
"허수!
허수가 보이지 않잖아."
할아버지는 당근보다 허수가 다치는 게 걱정되었다.
방에 들어가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아버지!
덫을 몇 개 놓을까요?"
아들이 마당을 쓸다 물었다.
"아니야!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덫을 놔서 저것들을 죽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할아버지는 덫을 놓겠다는 아들을 말렸다.
"할아버지!
어디 가요?"
영수가 방에서 나오며 할아버지를 봤다.
"당근밭에 갈 거야!"
"저도 따라가도 되죠?"
손자가 묻자
"아니!
넌 따라오면 안 돼."
하고 할아버지가 말렸다.
멧돼지가 손주에게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알았다.
"나도 따라갈게요!"
손자가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잖아!"
아빠는 아들을 말렸다.
영수는 영문도 모르고 입이 삐죽 나왔다.
"미안하다!"
엄마 멧돼지는 당근 밭고랑에 넘어진 허수를 일으켜 세웠다.
찢어진 옷을 주섬주섬 입혀주며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새끼를 잃은 엄마 멧돼지는 가슴으로 전해지는 아픔을 참을 수 없었다.
"허수야!
정말 미안해."
눈물 흘리며 엄마 멧돼지는 또 말했다.
"괜찮아요!"
허수는 눈물 흘리는 엄마 멧돼지를 보고 말했다.
"앞으로 오지 않을 게!"
엄마 멧돼지는 다시는 당근밭에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농부들이 힘들게 일궈놓은 농사를 망치는 게 싫었다.
새끼 멧돼지들이 파헤친 어린 당근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일어나 봐!"
엄마 멧돼지가 허수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멀리서
대장 멧돼지와 새끼 멧돼지가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
빨리 와."
새끼 멧돼지 한 마리가 엄마를 불렀다.
하지만
엄마 멧돼지는 허수를 일으켜 세우고 한 참 지켜봤다.
앞으로 보지 못할 허수아비란 걸 알았다.
엄마 멧돼지는 다시는 당근밭을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밤나무골을 향해
할아버지가 걸어오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자."
대장 멧돼지는 할아버지를 보고 재촉했다.
당근밭에서 뛰어놀던 새끼 멧돼지들이 모두 대장 멧돼지가 부르자 달려갔다.
당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멧돼지들은 모두 숲으로 돌아갔다.
햇살이 밤나무골 당근밭을 채색하고 있었다.
찢어진 허수 옷자락이 바람이 날려 멀리 날아갔다.
"허수야!
괜찮아?"
할아버지가 당근밭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네!
할아버지 괜찮아요."
허수는 엄마 멧돼지가 일으켜 세워준 뒤 마음이 편해졌다.
"이런! 이런!
옷이 다 찢어졌구나."
"괜찮아요.
시원하고 더 좋아요."
허수는 찢어진 옷이 맘에 들었다.
"어디 보자!
찢어진 옷도 멋지구나."
할아버지는 허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밤이 되자
할아버지는 창문을 열었다.
밤나무 골 당근밭 허수가 눈에 보였다.
"허수야!
잘 자고 내일 보자."
"네!
할아버지."
허수가 힘차게 대답하는 것 같았다.
"달이 떴다.
와!
수많은 별이 다 보인다."
허수는 오랜만에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그동안 당근밭을 지키기만 했던 허수는 밤하늘 볼 시간도 없었다.
"너무 멋져!
당근밭이 언덕 위에 있어서 너무 좋아."
허수는 밤하늘에서 별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허수야!
미안하다."
가끔 엄마 멧돼지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 뒤로
당근밭에는 멧돼지들이 오지 않았다.
"웬일이지!"
할아버지는 당근밭에서 당근을 뽑으며 요즘 오지 않는 멧돼지들이 궁금했다.
"허수야!
내일 보자."
지게에 당근을 가득 짊어지고 할아버지는 장터를 향했다.
"할아버지!
조심히 다녀오세요."
허수는 시원한 바람을 맞이했다.
어린 당근들이 기지개를 켜는 걸 봤다.
"빨리 자라면 좋겠다!"
허수는 할아버지를 위해 당근이 빨리 자랐으면 했다.
영수네 당근밭에는 오늘도 허수가 잘 지키고 있었다.
가끔
산토끼가 오고 노루가 왔다 갔다.
하지만
멧돼지처럼 당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거나 허수를 괴롭히지 않았다.
"허수야!
당근 하나만 뽑아먹을 게?"
산토끼가 허수에게 물었다.
"응!
저기 끝에 가면 다 자란 당근이 있으니까 뽑아먹어.
이쪽은 어린 당근이니까 안 돼!"
허수 말을 들은 산토끼는 당근밭 끝자락을 향해 뛰었다.
"당근이 무럭무럭 자라는 군!"
당근밭에 평화가 찾아오자 당근들은 기지개를 켜며 쑥쑥 자랐다.
당근이 자랄수록 할아버지도 바빴다.
가끔
영수도 당근밭에 와서 도와주었다.
"할아버지!
여기 당근도 뽑아요?"
하고 말한 영수가 당근밭 모퉁이에 몇 개 남은 당근을 뽑으려 했다.
"거긴!
그냥 둬."
할아버지가 말렸다.
"왜요?"
영수가 묻자
"그건!
동물들을 위해 남겨둬야지."
"네!"
영수는 할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허수야!
고생 많았다."
할아버지는 마지막 당근을 뽑은 뒤 허수를 지게에 짊어지고 집으로 갔다.
허수에게 새로운 옷도 입혀주고 부러진 다리도 고쳐줄 생각이었다.
허수는
다음에 밭에 어떤 씨앗을 심을지 궁금했다.
당분간
허수도 편하게 쉴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창고에서 감자를 자르고 있었다.
당근밭에 심을 감자 씨앗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