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오웰의『동물농장』에서 등장하는 음악, '영국의 짐승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는 동물들이 부르는 <영국의 짐승들>이라는 노래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동물들 사이 일종의 '혁명가'라고도 볼 수 있는 <영국의 짐승들>은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 등장하는데, 책을 읽으며 해당 노래가 상황마다 행하고 있는 역할에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흥미로웠고, 책 속에서 해당 노래가 행하는 역할을 통해 음악이 가진 수행성과 정치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노래의 역할을 탐구해 보고 싶어졌다.
해당 노래가 이야기 속에서 가지는 역할은 총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첫 번째는 동물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자 동물들 사이에 유대감과 소속감 등이 형성되는 계기, 그리고 단순한 집단 정체성의 형성을 넘어 그들의 의지를 표명하는 역할이다. 동물들은 인간에게서 벗어나 그들만의 세상을 이루자고 뜻을 모은다. 이 장면에서는 ‘메이저’라는 돼지가 반란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며, 동물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영국의 짐승들>을 부르기 시작하는데, 메이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물들도 곧이어 메이저의 노래를 따라 함께 부르기 시작한다. 이때 이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는 동물들이 ‘혁명’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진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며, 특히 이렇게 같은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집단 구성원 사이의 결속력과 친밀감을 형성하고, 한 집단의 정체성과 지향 목표를 보여주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임을 위한 행진곡>에 나타나는 노래의 수행성을 다룬 글을 살펴보면, 인간은 같은 노래를 함께 부름으로써 문화적인 친밀성을 무의식 중에 느끼게 되며,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노래한다는 것은 공동체를 결속하는 내면적인 계기를 뜻하고, 사상과 신념을 같이하는 이들이 함께 노래하는 행위가 가지는 소리의 수행성은 단순히 집단 정체성의 형성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짐승들> 노래가 행하는 두 번째 역할은 이전보다 강력해진 동물들의 결속력과 농장을 탈환한 그들의 힘, 승리를 보여주고 구성원들 사이에 이러한 감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마침내 바라던 대로 농장을 탈환함으로써 인간에게서 벗어나 그들만의 세상을 갖게 된 동물들은 다 함께 <영국의 짐승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곱 번 연창 한다. 이때 앞서 메이저의 선창 이후 다른 동물들이 곡조를 따라 불렀던 것과는 달리 모두가 한 목소리로 같은 곡조를 부르는, ‘제창’을 하는데 이처럼 제창의 형태를 취할 시 더욱 커지는 음악의 의미와 역할을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 문제와 연관 지어 살펴볼 수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싸고 제창과 합창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었는데, 제창과 합창 문제의 핵심은 부르는 이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행위’ 그 자체에 있다. 노래를 부르는 행위에는 직접 신체를 거쳐 소리를 내는 물질적이고 실천적인 과정이 전제됨으로써 악보에 단순히 박제된 음악과는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청각적인 원리로써 그 어떤 것보다 감정적인 연대를 구축하는 데 효과적이며, 이러한 제창의 효과가 해당 장면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농장 내부 동물들 사이에서만 불리던 노래는 추후 동물들의 농장탈환 소식과 함께 온 지역에 퍼지기도 한다. 해당 노래가 알려지고 불리기 시작하며 일부 지역에서는 반란의 기운이 감돌기도 하고, 인간들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하는데, 여기서 <영국의 짐승들>은 시민들 사이 반란의 기운을 도모할 만큼의 정치적 성향과 힘을 가진 노래이자 동물 혁명의 상징 혹은 반란의 상징으로서 나타난다. 앞서 예시로 들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 또한 이를 함께 부르는 것은 희생자의 명예를 지키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80년대 말 민주화를 요구하던 각종 시위와 집회의 현장에서 애창하며 한때 저항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많은 동물들이 부르던 <영국의 짐승들>은 외양간 전투 이후 권력자 ‘스퀼러’에 의해 제한된다. 정권의 교체 이후 분명 세상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나 꿈꾸었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 사회에 회의를 느낀 클로버는 홀로 언덕 위에 올라가 과거 자신들이 이뤄냈던 성취와 더 나은 세상을 열망했던 마음을 회상하며 <영국의 짐승들>을 부르는데, 이를 목격한 스퀼러는 “그것은 반란 때의 노래지만 반란은 이제 완수되었고, 우리는 그 노래에서 미래의 좋은 사회에 대한 동경을 표현했으나 그 사회는 이미 성취되었다. 따라서 그 노래는 이제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하며 해당 노래를 통제한다. 한때 저항의 상징이 되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정부로부터 불온한 음악으로 취급되어 금서목록에 올랐던 것처럼 말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80년대, 그리고 동물농장 속 외양간 전투 이후 권력자들은 왜 그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를 제한하였을까? 추측건대, 그들은 아마 노래, 음악이 자기 혹은 집단 표현의 도구로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으며, 그것이 가진 정치성에 대해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홀로 부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앞선 상황들처럼 다수가 함께 부르게 된다면 ‘유니즈넌스’ 소리가 지니는 특징으로 함께 노래를 부르는 이들 사이에 하나의 이념공동체를 조직하고 그 공동체가 지향하는 이념을 실천하도록 하는 원동력을 제공함으로써 그 효과가 더욱 막강해져 권력층을 위협하기에도 충분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국의 짐승들>이 행하고 있는 세 번째 역할은 자기 혹은 집단 표현의 도구로서, 특히 특정 정치성을 상징하고 이러한 성향을 표명하는 것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영국의 짐승들>은 책 속에서 다양한 장면에 각기 다른 역할로 사용되었지만, 그 세 가지 역할의 공통점은 <영국의 짐승들>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외면적인 행위가 행위자(동물들)의 내면적 변화를 이끌어내거나 표출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음악의 ‘수행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지금까지 나의 경험에서는 이에 대한 예시로 공식적인 교내 행사 때 빠지지 않았던 교가 제창의 경험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기억은 고등학생 때의 기억이다. 첫 고등학교 입학 당시, 나를 포함한 신입생들은 모두 입학식 때 교가를 제창할 수 있도록 미리 교가를 암기해 준비했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교내 음악수업시간 중 진행되는 첫 시험은 교가에 맞춰 안무를 구성하고 조원들과 함께 교가와 안무를 선보이는 것으로, 당시 나와 친구들은 '도대체 교가에 왜 이렇게 집착할까?'라며 의문을 가졌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노래의 역할을 탐구하며 회상해 보니 당시 교가는 각기 다른 중학교에서 모인 신입생들에게 이제는 같은 학교 학생이 되었다는 소속감을 주고, 어색한 학생들 사이에 친밀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학교의 특성을 담은 가사와 반복적이고 쉬운 선율은 무의식 중에 흥얼거리며 쉽게 학교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데 분명한 역할을 해주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음악 시험 시, 노래를 부르는 신체적 행위와 더불어 안무의 창작과 실현이라는 신체적 행위까지 한 단계 더해짐으로써 그 효과가 더욱 분명히 나타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실제 나도, 당시 교가 시험 이후 학교에 대해 가졌던 낯섦과 어색함의 감정이 많이 감소하고, 해당 집단의 구성원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 나는 음악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사회를 반영하는 역할을 해줄 수 있긴 하지만, 그것은 그저 악보에 그려진 음악으로서, 과거에 머물러있는 음악으로서, 창작자의 생애를 반영하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해당 음악을 감상하거나 연주할 땐 과거 창작자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하려고만 노력했었다. 그러나 1년간 음악학을 접함으로써, 그리고 조지오웰의『동물농장』에서 음악의 행위적 사례를 발견하는 경험을 함해봄으로써 음악이 박제되어 있다고 여기고 그것이 가진 고유의 가치를 최대한 보존하고 재현하려고 했던 나 역시 사실은 음악으로서 정체성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경험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그동안 창작자의 당대 의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의 생애와 관점을 이해하고 그것에 동화되고자 했지만, 이제는 창작자뿐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성향과 배경도 깊이 이해하고 고민하며 타자와 더불어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 높이고, 더 넓고 다양한 수용의 관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