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과 거리두기, 영화와의 관계를 고민하다
두 아이를 중심으로 해바라기를 향해 걸어오는 네 사람의 앞모습으로 시작해 두 남녀를 중심으로 어디론가 걸어가는 네 사람의 뒷모습으로 끝을 맺는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은 ‘문’이라는 요소를 통해 인물들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때로는 영화의 경계를 드러내거나 허물며 관객과 영화의 상호 작용의 기회를 제공한다.
‘문’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면은 프랑수아가 차에서 내려 목공소로 들어가려고 하는 장면이다. 차를 멈춰 세운 프랑수아의 모습 다음으로 곧바로 세로로 긴 직사각형 모양이 스크린에 등장하는데 이는 갑자기 스크린의 비율이 바뀐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며 관람자에게 갑작스러운 사각형의 변화와 그 사이로 등장할 대상에 대해 호기심을 유발하고, ‘문 안’ 목공소 내부에서 ‘문밖’ 프랑수아를 바라보는 듯한 밝은 사각형은 관객에게 일시적으로 영화에 몰입해 자신이 ‘영화관’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문 안에 위치해 인물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해당 장면은 영화와 관객 사이 ‘투사’의 효과가 잘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때 관객은 일시적으로 자신의 신체적 경계를 잊어버리고 영화 속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 하게 되는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에드가 모랭의 말을 빌리면, 목공소 내부에서 프랑수아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 즉 스크린 속 가상의 인물은 관객의 도플갱어, 또는 동일자로 기능하며 관객에게 투사 공간의 지위를 부여한다. 어둠 속에 오로지 밝은 사각형만이 남겨진 그때, 우리는 스크린의 경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스크린 속 인물의 관점에 동일화되어 스크린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밝은 사각형을 어디론가 이어지는 통로이자, 누군가 드나드는 출입문으로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행복>에서 ‘문’은 이처럼 영화와 관객의 경계를 허무는 역할 외에 인물과 인물 사이의 경계와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표현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프랑수아는 선반을 이유로 이사를 한 에밀의 집에 방문한다. 이때, 프랑수아와 에밀은 열린 문을 사이에 둔 채 시선을 교류하며,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번갈아 보여주는데 문턱을 넘을 듯 말 듯 마주하고 있는 인물의 모습은 두 사람이 선을 넘을 듯 말 듯 한 관계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다는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며, 프랑수아가 에밀의 집의 문턱을 넘어 그녀의 집 내부로 들어서게 되며 두 사람의 교제가 영화 속에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은 항상 한 공간을 떠나서 다른 공간으로 진입한다는 함의를 갖는데, 해당 장면에서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단순한 공간 이동의 차원을 넘어, 마음의 벽을 넘어서는 것, 인물 간의 벽을 허무는 것을 표현한다고도 할 수 있으며. 이는 프랑수아가 테레즈가 아닌 에밀과의 관계를 맺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영화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장면이 있는가 하면, 스크린과 영화의 경계를 인식하게 되고 영화의 인공적이며 구성적인 특징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 있는데, 영화의 후반부, 등장인물의 단체 사진이 일시적으로 정지되어 등장하는 장면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스크린이라는 사각형 속 사진이라는 또 하나의 사각형이 등장하는데, 이는 영화가 진행되어 오는 동안 몰입하고, 동일시 해왔던 인물들로부터 일시적으로 거리를 두게 만들며 가까이 해왔던 상황으로부터 동떨어져 인물의 관계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사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행복>은 행복을 얻게 된 에밀과 프랑수아, 그리고 두 사람의 행복으로 인해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잃게 된 테레즈를 통해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며 ‘문’의 여러 가지 사용과 암전 효과, 사진 등의 여러 기법을 통해 관객이 영화의 경계를 넘나들고, 영화에 대하여 동일화된 입장과 객관적인 관찰자로서의 입장을 모두 경험할 수 있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