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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솔 Sep 30. 2022

하면 괴롭고 안 하면 더 괴로운 것




 어제는 하루 종일 공란이 가득한 사업계획서가 띄워진 한글파일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장시간 모니터를 응시해봐야 남는 것은 따갑고 건조한 각막밖에 없음에도, 한 문장이라도 더 건져올리고 싶어 나는 마우스의 스크롤 휠을 올렸다가 내렸길 반복했다. 써야하는 글이 그렇게 길고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음에도 머릿속에서 흩어다니는 단어들은 저들끼리 붙을 줄을 몰랐다. 결국 나는 그날 눈이 건조하고 손목이 아픈 사람이 되어 퇴근길에 올랐다.


 한 달 전엔 내가 사는 구 의회에서 개최한 캐치프레이즈 공모전에 캐치프레이즈를 하나 제출했다. 공고문의 조회수를 보아하니 경쟁률도 그리 높지 않을 것 같고, 창의적인 카피를 쓰는 것은 어릴 때부터 내가 자신있어 하던 일이었으니 솔직히 장려상 정도는 탈 줄 알았다. 그렇지만 결과는 낙선. 수상자들의 작품을 보니 내가 심사자의 수요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해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이렇게 글을 못쓸까, 글을 쓰는   길이 아닌가 보다, 따위의 자괴감을 불러오는 '노력과 재능의 ' 빠져들었다. 다만 과거에 빠졌던 늪과 다른 점이 있다면  깊이가 현저히 얕아졌다는 것이다.




 안다. 세상엔 ''자가 붙은 조직에 속하면서도 부업으로 글을 써서 자랑하고 다닐 만한 성취를 이룬 분들이 많다는 것을. 그러나 공무원이었을 때의 나는 스스로가 '글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는 직장' 제발로 들어왔음을 직감하며 스스로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게  느낌을 받았다. 나는  쓰는  좋아하는  말고는 너무나 별거 없는 사람이니, 이제는 좋아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재미없어진 시간이었다.  1 동안 '쓰고 싶어서  ' 모조리 긁어놓아도 5만자가    것이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직후에도 글과는 가까워지지 못했다. 다시 글과 가까워진 계기를 꼽으라면 최승필 작가의 <공부머리 독서법>이라는  덕분일 것이다. 강렬한 제목에 이끌려 집어든  책은 344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내내 독서가 인간의 뇌를 어떻게 발달시키는지를 독서교육 전문가인 저자의 경험과 각종 실험 결과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재능을 핑계로 자주 활용하는 겁쟁이였다. 좋아하는 일을 생각할 땐 더더욱 그랬다.  사람은 머리가 좋아서 글을  쓰는 거야.  사람은 부모부터 지식인이니 보고 배운  많아서 글을  쓰는 거야.  사람은,  사람은...


 그러다가 문득 '이렇게 살면 뭐가 남지?'하는 생각이  것이다. '<공부머리 독서법>이 품고있는 그 확신에 이끌린 덕분에. 스스로의 가능성을 계발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과 천재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중에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지? 무엇보다 나는 정말 글을 쓰지 않아도   있는 건가?


 거의 1 6개월 만에 다시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그땐 정말, 노트북 키보드가 나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주어와 목적어와 서술어를 어떤 순서로 배치해야하는지 까먹은 사람이   같았다. 그래도 눈을 딱 감고 썼다. 내가 좋아하는 웹툰을 주제로.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글을 썼다.




 나는 이제 내가 쓴 글이 미더워보일 때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없나봐'라는 생각을 하염없이 반복하며 글을 쓰면 죽는 병에 걸린 비운의 환자 마냥 행동하지 않는다. 대신 뻔뻔하게, 내가 재능 없는 데에 누구 보태준 사람 없지 않냐는 듯 꿋꿋하게 다음에 쓸 글을 생각한다. 글을 쓰느라 얻는 괴로움보다 글을 쓰지 않아서 얻는 괴로움이 훨씬 큰 걸 알아서다. 여기엔 '셀프 꼰대짓'도 추가된다. 내가 글을 안 쓸 때는 말이야, 이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어~


 내가 계속 글을 써서 미래에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솔직히 계획도 세워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쓴다. 글을 쓰지 않는 삶이 나에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아니까. 누가 나에게 재능이 없다고 일침을 날린대도 쓸 거다. 글이 쓰기 싫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저 한 자씩, 한 자씩, 쓰다보면 '쓰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라는 낙관과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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