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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 Aug 28. 2024

[전하고 싶은 음악⑩] 도마, 여유와 설빈, 호와호

도마 “이유도 없이 나는 섬으로 가네”

여유와 설빈 “밤하늘의 별들처럼”

호와호 “슬픈 라”


2016년 6월, 연두색 이파리들이 진한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시기였다. 호와호 정규 1집 [Unknown Origin]을 발매하고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에 홍대 인근 ‘카페 언플러그드’에서 공연을 했다. ‘도마’, ‘호와호’, ‘여유’의 무대가 이어졌던 공연의 제목은 ‘삶의 여백’이었다. 이전부터 음악과 공연으로 인연이 이어졌던 도마, ‘설빈’과 함께 조화로운 공연을 선보인 여유. 나는 그날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게, 맑고 깊은 속내를 꺼내 놓는 두 팀의 음악에 무척 감동했다. 그리고 이 귀한 음악가들과의 인연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랐다. 이듬해 봄, 각자의 공연 날짜는 달랐지만 ‘새포크’공연 포스터에 다 같이 이름이 적혀 있어서 내심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2017년 6월, ‘여유와 설빈’이라는 이름으로 정규 1집 [모든, 어울린 삶에 대하여]를 발표한 이들은 서울을 떠나 제주로 이주했다. 앨범 안에는 ‘당신’ 혹은 ‘우리’와 ‘함께’ 살고자 하는 다정한 다짐과 의지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어떤 사정으로 그리 결정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멀리서 소식을 들은 나는 제주라는 섬이 어쩐지 둘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응원의 마음을 보냈다. ‘거누’라는 기타리스트와 듀오로 팀을 이룬 ‘도마’ 역시 같은 해에 정규 1집 [이유도 없이 나는 섬으로 가네]를 발매했다. 윤슬처럼 자연스럽고 단출하게 반짝거리는 소리가 넘실거렸고 그 안에 만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들을 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앨범을 듣는 내내, 그의 환하게 부서지는 웃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나와 파트너는 정들었던 홍대 인근을 떠나 불광천이 흐르는 서대문구의 어느 지역으로 이사했다. 삶터가 바뀌면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생긴다. 이동 경로와 탈 것의 종류, 그에 따라 다르게 배분되는 시간, 간혹 먹게 되는 외식 메뉴, 마주치는 사람들의 연령대나 옷차림, 노을이 지는 방향, 걸으면서 맡게 되는 냄새 등 그야말로 터의 변화와 함께 삶도 변한다. 어색하던 적응기를 지나면서 우리는 새 동네에 천천히 적응했고 새로운 삶을 살아냈다. 그 사이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 안에 들어찬 이야기도 조금씩 달라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더 집에 머무는 시간을 사랑하게 되었고 친구들과 작고 소소하게 모여 쑥스러운 듯 꿈과 낭만, 진지한 고민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꾸미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대화를 하다 보면 그 끄트머리쯤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의 바람, 원망, 질문과 답을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안아줄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고 그 힘은 다시 자라나 타자를 향한 문을 열게 된다. 우리들은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해 간다.


밤하늘의 별들처럼 밝지 않아도

바람 부는 날의 촛불처럼 난 살아있네

이젠 바다로 가는 강물처럼 맑지 않아도

흔들리는 날의 눈물처럼 삶은 흐르네

노래하고 춤을 추고 그림 그리고

시를 쓰고 다시 노래하는 꿈을 꾸었네

그게 꿈이 아닌 현실으로 남진 않았어

누굴 원망하고 비난해도 소용이 없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오직 나만 아는 그 불빛이 나를 비추네

그래 나는 너무 어린 날 돌보지 않았어

더는 불가능한 길을 따라 달리고 있네

자유로운 영혼들은 길을 잃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말을 잃었네

아직도 꺼지지 않는 불꽃을 피우려나

저기 먼 하늘 바다 땅이 나를 부르네 – 여유와 설빈 ‘밤하늘의 별들처럼’


https://youtu.be/JUY9b8H1obQ?si=bZ3ydEnjNxQoWt4J

△ 여유와 설빈(Yeoyu and Seolbin) - 밤하늘의 별들처럼(Like the Stars in the Night Sky)


2021년 3월, 너무 갑작스럽게 도마가 세상을 떠났다. 스물여덟 살의 그는 한창 2집을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다. 활짝 웃으며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우리 동네 술집 ‘싸롱 어제’, 그리고 노래하는 도마를 처음 만났던 ‘살롱 바다비’1)가 생각났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검푸른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지금까지도 그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렇게 그는 사라졌다. 어디로 가버렸다. 


https://youtu.be/su0Xby1L20c?si=GdpI9oySai6NbWak

△ 도마(DOMA) - 이유도 없이 나는 섬으로 가네(Drifting To An Island For Reason I Don’t Know)


멀리멀리 가던 날

데려온 노래는 들리지도 않고

날아오를 듯이 가볍다가

고갤 떨구면 가장 낮은 곳으로


이유도 없이 나는 곧장 섬으로 가네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섬으로 가네


조심하며 걸어도 발소리는

아무도 없이

개만 운다 – 도마 ‘이유도 없이 나는 섬으로 가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누군가와 순서대로 공연했던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사건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간혹 그가 누구였는지, 그곳이 어디였는지에 따라 굉장한 일이 될 수도 있다. 나와 모호가 처음 만나게 된 것도 어느 공연장이었고 그 인연이 시발점이 되어 호와호라는 팀을 시작했으며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친구, 가족이 되었다. 물론 꼭 무엇이 되거나 어떤 일을 벌이지 않아도 그저 서로의 존재를 바라보며 힘을 얻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음악가들은 공연장이나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만나게 되기도 하고 스스로 판을 벌이면서 만나기도 한다. 진심이 담긴 음악을 듣고 그 속을 흐르는 힘과 발산되는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기쁜 몸과 마음으로 그것을 즐기는 순간이 오면 알게 된다. 굳이 손을 잡거나 어깨를 걸거나 발을 맞추지 않아도 우리는 그렇게 알게 된다. 


‘아, 당신은 그렇구나. 나는 그랬구나. 우리가 달라서, 같지 않아서 참 좋다.’


△ 위 : 도마 - 거누(좌), 도마(우) / 가운데 : 여유와 설빈 - 여유(좌), 설빈(우) / 아래 : 호와호 - 모호(좌), 이호(우)


지난 11월 1일에는 여유와 설빈의 정규 3집 ‘희극(Comedy)’이, 그리고 11월 20일에는 호와호의 EP ‘파고(Wave Crest)’가 발매되었다. 두 앨범을 순서대로 듣고 나서 문득 ‘희극’의 수록곡 ‘밤하늘의 별들처럼’과 ‘파고’의 수록곡 ‘슬픈 라’를 연이어 들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했지만 어딘가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치열하게 삶을 살던 어린 나를 만났다. 그때의 나는 옳다고 생각한 기준을 절대 바꿀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계속 화가 났고, 열심히 싸웠다. 갖은 노력을 해도, 심지어 사람이 죽어도 바뀌지 않는 거대한 벽 앞에서 주먹을 꼭 쥐고 참 많이 울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뚜벅뚜벅 걸어오며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안에는 기쁨이나 만족도 있고 후회와 슬픔도 있다. 그러나 나는 설령 그때가 맞고 지금이 틀리더라도 오늘의 내가 좋다. 분명 나 혼자 걸어온 길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왔기 때문에 이렇게 확고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 손가락 사이 시린 바람이 지나간다

머무르지 못하는 내 마음 따라 지나간다

그대 손가락 사이 시린 바람이

머무르지 못하는 내 마음따라 지나지나


차갑기만 한 바람은 날 울리지도 못하고

미지근한 마음따라    

식어간다 


라 라라랄라 라 라라랄라 라 라라랄라라

라 라라랄라 라 라라라

무겁기만 한 바람은 날 멈추지도 못하고

어두워지는 빛을 따라


라 라라랄라 라 라라랄라 라 라라랄라라

라 라라랄라 라 라라라 – 호와호 ‘슬픈 라’



https://youtu.be/8FO5nhqaoAs?si=i34NPaCFN2iAdnMp

△ 호와호(howaho) - 슬픈 라(Funeral)


앨범 작업을 하다 보면 몇 개의 계절을 훌쩍 건너뛰게 된다. 하루 24시간 중 언제는 일하고 언제는 쉬어야지 같은 계획은 전혀 지켜질 수 없는 날들이다. 특히 소속 회사 없이 스스로 모든 과정을 소화해 내는 독립음악가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 모든 것들과 섞여 살아가며 고유의 시선으로 만들어 낸 작업이 각기 다른 빛깔의 그릇에 담겨 우리에게 온다. 이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천천히 음미하고 오래오래 곱씹어주길 바라본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들이 이곳에 없을 때도 삶의 여백 속을 떠날 줄 모르는 노래가 되어 기억보다 길게 들려지길 바라본다. 



1) 홍대앞 음악가들의 요람이자 ‘인디 인큐베이터’ 역할을 도맡아 온 공간 ‘살롱 바다비’는 공연, 전시, 연극이나 물체극(일상적인 재료와 물체를 이용한 새로운 양식의 극), 시낭송, 마술 등 모든 예술적 행위를 환영하며 어떤 형식이나 장르의 구분 없이 다채로운 놀이를 구현할 수 있는 ‘열린 놀이 공간’이자 ‘공동 작업실’이었다. 2004년 문을 열었던 ‘살롱 바다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는 임대료 상승을 감당하지 못하고 2015년 10월에 문을 닫았다. 



*도마 | Instagram @domaccoli

기타리스트 거누와 보컬리스트 김도마가 함께 하는 2인조 얼터너티브 포크 밴드. 

*여유와 설빈 | Instagram @yeoyu_seolbin

여유와 설빈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포크 듀오로 두 사람이 주고받는 화음과 부드러운 선율, 시적인 가사가 특기인 팀이다.

*호와호 | Instagram @howaho_official

모호(기타, 보컬)와 이호(인스트루먼트, 보컬)로 이루어진 일렉트로닉, 얼터너티브 팝 밴드. 음악 창작과 사운드 연구를 기반으로 다양한 방식의 예술 작업을 탐구한다.


*<이유도 없이 나는 섬으로 가네>, <밤하늘의 별들처럼>, <슬픈 라>는 각종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창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 소통> 70호(2023년 겨울호)에 전게(前揭)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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