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고 싶은 음악] 레인보우99

「저기를 넘어가면 바다가 나올 것 같아」- 레인보우99

by 이호

첫 바다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것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첫 바다이기 때문에 첫 바다가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첫 바다는 한 여름, 부산의 어느 해수욕장이었다. 몇 살인지 정확하지 않다. 유독 물을 무서워하던 나는 저기 멀리, 세상의 끝까지 가득 들어찬 물을 보고 잔뜩 겁에 질려 있었고, 아빠는 그런 나를 안아 들고 한발 한발 모래사장을 지나 바다를 향해 걸었다. 꾹꾹 눌러 담은 두려움은, 발가락 끝에 닿은 차가운 바닷물을 만나며 와르르 무너져 눈물로 터졌다. 아빠는 크게 웃으며 나를 꼭 안고 내 몸이 반쯤 물속에 잠기도록 더 바다 쪽으로 걸었고, 얼마간 소리 지르며 발버둥을 쳤던가, 우리는 다시 엄마와 언니가 있는 뭍으로 향했다. 그 장면은 마치 낡은 캠코더로 찍은 빛바랜 필름 같기도 하고, 오래된 앨범 안에서 발견한, 더 오래된 사진 같기도 하다.


그날의 바다는 내게 너무 넓었을 것이다. 간간이 경험했던 계곡과는 전혀 달라서, 풍경이라기보다 벽에 가까웠고, 파도가 되어 뭍을 향해 들이치는 바다는 경계가 없는 장소였으며, 그로 인해 나는 도무지 안심할 수 없었다. 어쩌면 새로운 일을 맞닥뜨릴 때마다 느끼게 되는 두려움과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들어가 보지 않은 일, 어디까지가 안전한지 가늠되지 않는 관계, 한 발을 더 내디디면 몸이 잠길 것 같은 순간들. 그럴 때마다 나는 여전히 발끝부터 먼저 확인한다. 동시에, 경계를 넘어 물에 들어가야만 알게 되고 느껴지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 「저기를 넘어가면 바다가 나올 것 같아」가 수록된 정규 18집 〈Autumn 1〉 커버


https://youtu.be/tyJazIXhOJA?si=7I35ETBGjIo8XIO5

[Official Audio] RAINBOW99 - 저기를 넘어가면 바다가 나올 것 같아 (I think we'll reach the sea if we go over there)


나는 학교를 떠나고도 수년간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했다. 카페 서빙부터 시작해 출판사 교정 업무, 신문사나 방송국 웹페이지 관리, 공공기관 사무보조, 학습지 교사를 거쳐 대기업 노동조합 사무국에서 일할 때였다. 친구들과 우연히 찾아 들어간 홍대 앞 작은 클럽에서 주말만 일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고,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덜컥 지원했다. 사장님과 몇 마디 주고받고 나서 바로 다음 날부터 일을 하게 됐다.


클럽은 생각보다 어두웠고, 생각보다 좁았다. 낮에는 문을 닫아둔 채 밤을 기다리는 장소라서, 초저녁 무렵의 공기는 어정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운터 뒤에 서자마자 사장님은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도 하지 않은 채 그 말을 몸으로 외우려고 했다. 무엇을 어디에 두는지, 어느 시간대에 어떤 손님이 오는지, 언제 음악의 볼륨이 올라가는지 같은 것들.


처음 며칠은 내가 이 공간에 들어와도 되는 사람인지 확신이 없었다. 컵을 닦고, 술병을 치우고, 계산하면서도 자꾸 주변을 살폈다. 혹시 내가 너무 굼뜬 건 아닌지, 여기의 리듬을 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음악은 쉬지 않고 흘러나왔고, 나는 그 안에서 박자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파도가 일정하지 않은 바다처럼, 이곳의 리듬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발끝만 적시던 시간이 끝났다. 손님들의 얼굴을 익히고, 단골의 주문을 기억하고, DJ가 다음 곡을 준비하는 틈을 알아차리게 되면서 나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 음악이 커질수록 생각은 줄어들었고,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돌아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경계를 넘는다는 건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어느 순간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을 돕는 매개는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나 보다.


몇 달 뒤, 나는 신대방동에서 친구와 살던 집도 정리하고 홍대 앞 아주 작은 원룸으로 이사를 했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고, 클럽 아르바이트와 노점을 병행하는 삶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엔 클럽 사장님이 협찬해 준 기타 하드 케이스 가득, 남대문·동대문 시장을 돌아다니며 취향껏 골라 온 장신구를 늘어놓고 팔았다. 그러다가 점점 원석과 은, 비즈와 면사를 사다가 내 마음대로 디자인해 만들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작은 매대는 수공예 액세서리 가게가 되어 단골손님도 생기게 되었다.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사계절을 네 바퀴 더 도는 시간 동안 그곳에서 노점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며, 학자금을 다 갚게 될 것이고, 그 시절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며 음악가로 살아가는 내게 큰 위안과 힘이 되고 있으며, 어쩌면 지금의 나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말이다.


https://youtu.be/HupSY0r5VaI?si=cMlps7_friWxn1R2

△ [MV] RAINBOW99 - 시작도 끝도 존재하지 않는다 (CYCLE) / Official Music Video

음악을 들을 때, 나는 그 음악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보다 어디에 나를 세워두는지를 더 오래 생각한다. 레인보우99의 「저기를 넘어가면 바다가 나올 것 같아」를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다. 이 음악은 우리를 바다에 도착하게 해주지 않는다. 대신 ‘저기’라는 말이 가진 거리, 넘어가면 있을 것 같지만 끝내 확인되지 않는 장소의 감각을 반복해서 남긴다. 그 머뭇거림이 이 음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느꼈다.


음악을 들으며 걷다 보면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진다. 다만 ‘저기’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발을 옮길 수 있다. 바다가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 넘어가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 기대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음악이 나를 데려가는 곳은 도착지가 아니라, 도착하기 직전의 상태다.


호와호의 첫 번째 앨범을 만들면서 레인보우99를 만났다. 그는 우리 곡에 꼭 맞는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고, 특유의 감성으로 아련하고 그리운 정서를 데려왔다.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하며 워낙 많은 뮤지션들과의 작업을 이어오던 사람이라서 들어볼 수 있는 음악이 많았지만, 나는 아직 듣지 못했던 그의 솔로 음악이 궁금해졌다.


△ RAINBOW99 (출처: 아티스트 웹사이트 https://www.rainbow99.net/ )


레인보우99는 이미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한 음악가였고, 그 당시엔 1월부터 12월까지 매달 1일 여행을 떠나 곡을 만들고 다듬어, 그달이 끝나기 전에 작업물을 공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1월 〈담양, 눈보라〉, 2월 〈동해, 파도〉, 아버지의 색소폰 연주가 함께 한 3월의 〈제주, 70〉에 당도했고, 이후 사계절 열두 달을 온전히 지나며 12월의 〈전주, 변했지만 괜찮아〉로 마무리됐다. 전자음악을 바탕으로 기타뿐만 아니라 드럼,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깊게 탐구하며 각각의 장소와 울림을 담아냈고 이듬해, 이 싱글들을 집대성해 인상 깊은 정규 앨범 〈Calendar〉를 발표한다. 기억과 기록이 장소성에 한데 녹아들어, 또 다른 기억으로 출력되는 것 같았고, 어디론가 향하여 걸을 때 들으면 그 너머로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뒤에도 전자 음악가로, 사운드 디자이너로, 프로듀서로, 그리고 기타리스트로 다양한 음악적 실험과 전 방위적 활동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https://www.rainbow99.net/2016-calendar

△ 정규 4집 〈Calendar〉 커버

https://youtu.be/c-wnjltzlmM?si=BpefHflKnt_5yb50

△ 레인보우99 (RAINBOW99) - 청평/호명터널 [MV]

https://youtu.be/tZ0KonKRK6A?si=y8-xWYZytn6gSbHv

△ 레인보우99 (RAINBOW99) - 밤의대전/밤안개 [MV]


아마도 나는 여전히 바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일 것이다. 물을 사랑하게 되었고, 수영도 할 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어떤 장면에서는 여전히 망설인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넘지 않아도 남는 것들이 있고, 끝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불러오는 장소도 있다는 것을. 또한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속에 들어간 상태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감각이 있다는 것도 안다. 「저기를 넘어가면 바다가 나올 것 같아」는 그 사실을 조용히 인정해 준다. 저기를 가리키면서도, 지금 이 자리에 머물러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방식으로.




*레인보우99(Rainbow99) | Instagram @rainbow99gaze

-

레인보우99는 한국 일렉트로닉 씬에서 분명히 ‘독보적인’ 존재이다. 뛰어난 기타리스트이자 사운드 디자이너인 그의 음악은 일렉트로니카, 슈게이징, 드림팝, 트립합의 경계를 넘나들며 꿈 속을 유영하는 듯한 특유의 공간감이 가득한 미지의 세계를 창조해내고 있다. - poclanos


*「저기를 넘어가면 바다가 나올 것 같아」가 수록된 레인보우99의 정규 앨범 <Autumn 1>은 각종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창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 소통> 74호(2025년 겨울호)에 전게(前揭)된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전하고 싶은 음악] 나의 언덕 - 해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