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고 싶은 음악] 나의 언덕 - 해파

계획되지 않은 불안을 살아가기 위하여

by 이호

낯선 빗소리가 들린다. 플라스틱 어닝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일종의 타악기 같기도 하고 누군가 키질을 하며 곡식을 달래는 소리 같기도 하다. 어둑해진 골목엔 인적이 드물다. 밤이 기울면, 마실을 나온 듯, 밥때를 맞춘 듯, 주변을 서성이는 고양이가 나타난다. 여기는 내 생에 두 번째 작업실이다. 2013년 겨울에 얻었던 첫 번째 작업실은 반년이 채 안 되어 접게 됐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가 컸고 그 이후로는 다시 공간을 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과연 이곳은 어떻게 유지되고 나와 어떤 인연을 맺게 될까.

작업실을 구했다고 하는 내게 누군가 그랬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서 좋겠어요. 부럽습니다.” 처음 노래를 만들고 공연을 시작했을 때도 들었던 말이다. 그와 동시에 종종 듣게 되는 질문도 있다. “그걸로 먹고살 수 있어?”


글쎄, 그때나 지금이나 먹고살기는 힘들다.

아니, 사실 전혀 그걸로 먹고살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내 형편에, 작업실이라니?


저 산 고개 넘어가면
흐르는 물 따라가면
아무도 없는 저곳엔
있을까


https://youtu.be/GJ7YRB53LG8?si=XJij7DprxpUMWrrw

△ ‘나의 언덕(My Hill)’ 듣기


음악이 시작되고 첫 소절이 흘러나오자 나는 바로 어린 시절을 소환하게 된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좋아했지만 온전히 혼자 노는 순간을 무척 즐거워했던 아이.


한때 우리는 모두 ‘놀며 공부하는 아이’였다.

어릴 적엔 흙을 만지고, 날아가는 잠자리를 따라 뛰고, 나무 그림자를 쫓고, 빗물 웅덩이에서 철벅거리고, 별자리를 외우면서 우리는 배웠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공부’는 점수를 맞추는 일이 되었고, 점수는 특정 학교에 가기 위한 것이 되었고, 그 학교는 좋은 직장을 위한 입구가 되었다. 그때부터 배움은 ‘정답을 맞히는 일’이 되었고, 정답은 대부분 돈이 되는가, 안 되는가였다. 결국 학교는 평등을 가르치지만, 학생은 불평등 속에서 자라고 교육은 계층을 ‘넘나들게’ 하기보다 기존 사회계급을 재생산한다. 2025년 현재, 대한민국의 초·중등교육의 형식적 무상교육은 대부분 달성되었지만, 실질적 평등은 더 멀어졌다.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본다. 돈이 되지 않더라도 계속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왜 그런 마음을 갖게 될까? 이런 질문은 삶 전체를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상은 내게 답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니라, 가시밭길에 들어서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일이라고. 너 자신을 시장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만 그 감정과 열망은 현실로 승인받는다고.


어쩌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말로는 ‘꿈을 꾸라’지만, 실제로는 ‘불안하지 않을 선택을 하라’는 말이다. 그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말만 남는다면, 삶은 계산만 남고, 낯선 출렁임을 만날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https://youtu.be/5IrjmzMfr3k?si=iSfMuBnTMzJxlzag

△ 네이버 [온스테이지 2.0] 해파 ‘I’m Finally a Ghost’
무엇이 행복인지 알려주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도망치듯 떠나왔지만
방향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정처 없이 흔들리다
결국 제자리로 왔구나
내가 있을 곳 나의 언덕
내가 숨을 곳 나의 그늘
내가 버틸 곳 나의 언덕을 찾아


불확실한 경로, 예측할 수 없는 수입, 단절된 경력, 애매한 명함.

하고 싶은 일을 좇는다는 건, 그 일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오지 않을 거라는 걸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내 안의 어떤 결과 리듬을 따라 살아간다. 이 리듬은 효율적이지 않고, 시장의 가치로 환산되지 않지만 살아 있다는 감각만큼은 언제나 선명하다.


“현실을 봐야지.”


가끔 내가 뱉기도 하는 그 말은 사람을 움츠리게 만드는 주문처럼 들린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현실’ 속에는 돈이 되기 쉽지 않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물론 나는 내가 걷는 길이 ‘더’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길은 더 낫지도, 더 멋있지도 않다. 단지, 이런 길을 살아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외롭지 않도록, 이 길을 밝히고 싶을 뿐이다.


아주 가끔 테레민1)을 연주한다. 손을 뻗고, 허공을 더듬는다. 형체도, 촉감도 없는 진동. 그 불안한 떨림에서 나는 즐거움을 느낀다. ‘정답’이나 ‘성과’ 같은 단어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내 손끝을 지나간다.

세상은 빠른 길을 선호하지만 나의 길은 오래 돌아간다. 돌아간다는 건 가끔 멈춰 선다는 뜻이고, 멈춰 선다는 건 질문이 생긴다는 뜻이다. 나는 내 삶에 질문이 생기는 방식을, 쉽사리 포기하고 싶지 않다. 질문을 품고 사는 일은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이야말로 나에게는 배움이다.


1) 악기의 한 종류. 1920년에 레온 테레민(Leon Theremin, 1896~1993)이 만들어낸 인류 최초의 전자악기로 악기의 양쪽에 위치하는 두 개의 안테나에서 발생되는 전자기장을 손으로 간섭시켜 소리를 낸다.


나는 출렁이는 삶을 지지하고 싶다.

가끔은 실패하고, 방향을 바꾸고, 멈춰 서는 길. 그 안에서도 여전히 배움을 실천하는 순간들, 그리고 그 선택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꾼다.


Theramin.jpg △ 1930년, NBC 라디오에서 테레민을 연주하는 알렉산드라 스테파노프 (사진 : 위키백과)


교육은 그 꿈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지만 강력한 장소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처음 울려 퍼지고, 누군가의 침묵이 처음 존중받는 곳. 우리가 그 장소를 다시 바꾼다면, 언젠가 돈이 되지 않는 것도 선택할 수 있는 사회, 그 선택이 불안을 데려오지 않는 사회, 사람의 마음을 중심에 놓는 사회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핀란드의 교육 이야기를 들었다. 급식, 교과서, 방과 후 활동까지 모두 무상이라 사교육이 필요 없단다. 자율성 높고 사회적 존중이 큰 교사 중심의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어떤 학생도 뒤처지지 않도록, 모두가 천천히, 같이 배운다고 했다. 누가 빠르다고 칭찬받지도 않고, 느리다고 낙오자가 되지도 않는다. ‘시험’이 아니라 ‘삶’을 중심에 두는 교육. 나는 그런 배움이 가능한 사회에 대해 상상해 본다.


네덜란드의 경우는 ‘보편성은 획일화가 아니라 다양한 교육권 보장의 기반’이라는 교육 철학에 기반하여 각자의 철학과 방식으로 배울 수 있는 권리를 제도화했다. 종교가 있는 학교, 예술로 배우는 학교, 농사로 배우는 학교, 서로 다르지만 모두 공공의 지원을 받는다고 했다. 그 다양성이 곧 보편성이라는 사실이 나를 울컥하게 한다. 다르다고 해서 불리하지 않고, 같지 않다고 억압받지 않는 세계. 언젠가 대한민국에도 이런 교육 철학이 밑바탕이 되는 날이 올까?


무엇이 행복인지 알려주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도망치듯 떠나왔지만
어디론가 나란히 날아가는
새들만 멍하니 보다가
결국 제자리로 왔구나

내가 있을 곳
나의 언덕 저 산 고개 넘어가면
내가 숨을 곳
나의 그늘 흐르는 물 따라가면
내가 버틸 곳
나의 언덕을 찾아 아무도 없는 저곳엔


https://street-h.com/magazine/108570/

https://youtu.be/hQ9sqeVxsKs?si=UUrBsjF_B1t_wF57

△ [온스테이지 2.0] 해파_모르겠어요

여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건, 계획되지 않는 불안을 살아내는 일이다. 그 불안을 견디는 데에는 지지가 필요하고, 시간과 여백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 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면, 비로소 사람들은 ‘성공’이 아니라 ‘존재’를 선택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돈이 되지 않아도, 설명이 없어도, 살아지는 삶이 존재할 수 있는 구조. 그 구조가 없더라도,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버틸 수 있는 거리감. 우리가 서로를, 삶의 설명서 없이도 존중할 수 있는 감각.


그 감각만은 아직 남겨두고 싶다.


*해파(Haepa) | Instagram @steadyha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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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싱어송라이터. 부유하듯 울려 퍼지는 인상을 주는 음악을 쓰고 부른다.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통해 데뷔 후 저자극 포크 듀오 시옷과 바람의 멤버로 활동 중이며, 2022년 솔로 정규앨범 《죽은 척하기》를 발매하였다.






*‘나의 언덕’이 수록된 해파의 정규 1집 <죽은 척하기>는 각종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들으실 수 있으며 피지컬 앨범(CD) 역시 각종 음반 판매 사이트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창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 소통> 73호(2025년 여름호)에 전게(前揭)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