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편이 되려는 마음
지난 10월 10일,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선정 소식을 들으며 나는 환호했다.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거나 성차별, 인종차별 이슈 등 노벨상에 대한 비판도 많았지만 그런 것쯤 다 무시할 정도로 마냥 기뻤다. 기쁘다 못해 눈물이 솟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인데 한강의 수상은 내게 전혀 다른 감정으로 다가왔다. 왜 그렇게 내 일처럼 기분이 좋았을까? 무엇이 다른가?
그로부터 한 달여 뒤, 동료 음악가인 트리키네코(Trickyneko)가 EP [Sound of Mind]를 발매했다. 타이틀곡 ‘너에게’의 영문 제목이 EP 제목과 같았다. 트리키네코의 의뢰로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게 되면서 나는 이 곡을 참 많이도 들었다. 음악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겠지만 나는 나대로 음악을 들을수록 연상되는 아름답고 강한 이미지들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하얗게 내뱉은 숨과 지새운 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탔다
밀려든 마음에 아팠다고
길을 따라 다른 시간 속에 너에게
아무도 모르고 있었었지
그때의 너의 마음에 불어닥친 게 무엇인지
너의 그 시간을 알지 못했어
그때의 네게 손을 내밀어 늦지 않게 떠나자
(Just wanna be loved)
불안정한 사운드와 숨결 같은 목소리에 이어 묵직한 첼로와 피아노로 곡이 시작된다. 이어지는 보컬이 뱉어내는 ‘지새운 밤’, ‘하얗게 질린 얼굴’, ‘애탔다’라는 가사 안에서 나는 영화 <가스등>[1]에 등장했던 히스테릭한 여성의 모습을 떠올린다. 동시에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없었던 여자아이와 꽃을 손에 쥔 채 강물 위에 떠 있는 오필리아(Ophelia)를 생각한다. 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드럼과 퍼커션, 흔적을 남기는 걸음처럼 이어지는 첼로와 흐느끼듯 등장하는 허밍은 고통과 외로움, 오해와 바람을 연결한다.
히스테리(Hysteria)의 어원은 자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히스테라(Hystera)’에서 유래된 단어이고 ‘이동하는 자궁(wandering womb)’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이동하는 자궁은 아이를 생산하고 싶은 짐승 같은 생명체이며 욕구불만으로 인해 몸속을 떠돌아다니는 기관이고 육욕적 마녀임을 증명하는 히스테리의 원인이었다. 수천 년 동안 여성의 몸은 남성 지식인들에 의해 열등하고 비정상적이라고 각인되었다. 자궁과 히스테리에 대한 기록과 논의 역시 의사, 성직자, 과학자 등의 남성들에 의해서만 진행되었다. [2] 너무 오래 전의 과학이나 의학을 무작정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얼토당토않은 근거로 수많은 여성들이 비인간적인 폭력의 시대를 살아왔다는 것은 누구도 반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권력관계 아래에서 여성이 말을 한다는 것, 특히 글을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여성은 남성 중심적으로 쌓아 올려진 역사와 문화 속에서 아주 천천히,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왔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등을 집필한 브론테 자매(The Brontë Sisters), <미들 마치>의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처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차별 없이 작품으로만 인정받기 위해 남성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한 사람도 있고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넘어, 여성 작가들이 창작을 위해 필요한 경제적 독립과 심리적 자유를 상징하는 <자기만의 방>을 쓰고 주창했던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도 있다.
울프는 책 속에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에게 그보다 재능이 뛰어난 누이나 여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한다. 그리고 ‘16세기에 태어난 위대한 재능을 가진 여성은 틀림없이 미치거나 총으로 자살하거나 또는 마을 변두리의 외딴 오두막에서 절반은 마녀, 절반은 요술쟁이로 공포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 일생을 끝마쳤을 것’이라고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에서 오필리아는 아버지, 오빠, 연인에 의해 총체적인 여성혐오의 대상이 되고 이내 실성하게 되며 실수로 물에 빠졌지만 결국 ‘아름다운’ 드레스가 무거워지면서 가라앉아 죽게 된다. [3]
아무도 모르고 있었었지
그때의 너를 부르고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어린 너의 그 시간을 알지 못했어
그때의 누구도 모를 곳으로 함께 떠나자
언제나 올 수 있는 문을 열어둘게
서로의 편이 돼
어느 여름, 온 가족이 함께 서울에 위치한 야외수영장으로 피서를 갔다. 한낮의 해를 머금은 뜨거운 바닥을 맨발로 밟으며 빨강 파랑 파라솔을 지나 무지개처럼 반짝이는 커다란 미끄럼틀을 발견했을 때 나의 심장은 더없이 빠르게 콩닥거렸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나이였다. 부모님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기로 약속하고 물 반, 사람 반이었던 유수풀에 튜브를 타고 들어갔다. 가만히 떠 있으면 맑고 뜨거운 공기와 시원한 물이 몸을 감쌌고 나는 살랑살랑 떠 있는 나뭇잎처럼 부드럽게 흘러갔다.
그러다 문득 튜브 아래 내 몸 뒤쪽에 뭔가 뜨듯한 것이 밀착되는 것을 느꼈다. 발이 잘 닿지 않아 방향을 빨리 틀 수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결국 발견한 건 처음 보는 아저씨의 얼굴이었다. 자기 몸을 내게 들이대며 찰싹 붙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고 아저씨는 사람들 속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나는 정신없이 팔로 물을 저어 밖으로 나갔다. 울며불며 한달음에 엄마에게 달려가 이상한 아저씨의 불쾌한 행동에 대해 두서없이 얘기했다. 그런데 엄마는 다 듣기도 전에 나를 나무랐다. “그러게, 혼자 가서 놀지 말라고 했잖아. 그만 울고 조용히 해.”
대학교 생활을 시작했던 봄이었다. 갑작스럽게 휴강이 공지된 수업이 있었고 나는 친구들과 비어 있는 강의실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었다. 맥락 없이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가다 한 친구가 요즘 꽃이 만개해서 너무 예쁘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 하나가 “나는 봄에 피는 꽃이 너무 싫어.”라고 하며 어린 시절 겪었던 끔찍한 성폭력에 대해 힘겹게 털어놓았다. 그때 그 아이 눈에 들어온 게 들판 가득 피어있던 봄꽃이었고 이후로 해마다 어김없이 피는 봄꽃에 아이는 혼자 괴로워했다.
몇몇은 훌쩍였고 몇몇은 주먹을 꼭 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한 명씩 자기 얘기를 시작했다. 그날 모여 있던 우리는 무려 열다섯 명이었고 한 명도 빠짐없이 비슷하고 다른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그 사실에 모두 매우 놀랐다. 우리는 그날 적어도 열다섯 명의 가해자를 알게 된 셈이다.
Time goes faster and harder in my mind
너무 늦지 않도록 너에게
Time goes faster and harder in my mind
너무 늦지 않게 이곳을 떠나자
https://youtu.be/KvrbXBY_6ig?si=WXsh6M1iXlvBiFrQ
‘Sound of Mind’는 왜 ‘너에게’가 되었을까? 화자는 “어린 너의 그 시간을 알지 못했어”라고 말하며 억압받거나 상처받은 자아, 혹은 자신이 도울 수 없었던 누군가를 언급하며 잃어버린 과거와 조우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서로의 편이 돼”라는 구절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치유를 도모하는 과정과 연결된다. 이는 지지와 연대의 중요성을 뜻하기도 한다. “언제나 올 수 있는 문을 열어둘게”에서 나는 여성들의 주체적인 선택의 가능성과 안전한 공간을 상상한다. “그때의 누구도 모를 곳으로 함께 떠나자”는 도망이 아닌, 여성의 언어로 자신만의 서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사회적 질서를 모색하는 힘이 될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활발히 활동한 프랑스의 작가, 철학자,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엘렌 식수(Hélène Cixous)는 1975년에 발표한 에세이 <메두사의 웃음>(Le Rire de la Méduse)을 발표했다. 이 에세이는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의 선언문으로 여겨진다. 여성의 신체적 경험(예: 출산, 생리 등)과 언어적 창조성을 연결 지어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연관된 경험을 글로 표현할 때 억압적인 문법과 논리를 넘어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것, 감정이나 상상력, 그리고 다성성(polyphony)을 중요하게 여기며, 남성적 글쓰기의 권위적이고 이분법적인 논리와 대조를 이루는 것, 여성 억압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기존의 가부장적 언어체계와 문화적 규범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직관, 감각, 상상력을 강조하며, 언어를 통해 정형화된 남성적 합리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 등이 여성적 글쓰기에 해당한다. 이는 단순히 여성 작가들만의 글쓰기 방식이 아니라, 언어와 표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접근 방식이며 사회적 권력 구조를 언어적으로도 해체하려는 시도로, 다양한 문화와 예술, 철학적 담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강의 작품 <채식주의자>는 여성적 글쓰기의 현대적 예로 꼽힌다.
한강의 작품들은 이미 빛나고 있었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좀 더 단단한 입지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기쁘다. 더 많은 소녀들이, 더 다양한 국가의 여성들이 더 자유롭게 글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오랜 역사와 함께 굳어져 온 서구 중심적인 이성과 논리 중심의 언어 체계를 넘어 여성적 글쓰기를 통해 누구에게나 적용될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반영하는 것, 그로부터 다양한 정체성과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 그리하여 인간 개개인의 경험을 존중하고, 모든 목소리가 반영되는 포용적 세계를 향한 초석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길 바란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 주었고, 연결되어 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한강의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 ‘빛과 실’ 중
[각주]
[1] 《가스등》(영어: Gaslight)은 1944년 개봉된 미국의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이다. 조지 큐커가 감독을 맡았으며, 패트릭 해밀턴의 동명 희곡이 영화의 원작이다. 피해자가 점차 자신이 제정신인지 의심하도록 조작하는 심리적 학대의 형태를 묘사하는 심리학 용어 가스라이팅은 연극과 이를 각색한 두 편의 영화에서 유래하였다. - 출처: 위키백과, “가스등(1944년 영화)”
[2] 참고. [네이버캐스트] 히스테리의 역사 1 – 히스테리, 자궁이 돌아다니는 병(뜻밖의 세계사, 김지혜)
[3]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아> - 남성 화가의 관점(남성적 시선, male gaze)에서 여성의 고통을 그린 전형적인 사례로 꼽힘. 그림 속 오필리아는 죽음의 순간조차 수동적으로 묘사되며, 그녀의 고통은 서사적 맥락에서 분리된 채 하나의 시각적 "대상"으로 표현됨. (그림 출처 : 위키백과, ‘오필리아(그림)’)
클레어 맥카시 감독의 영화 <오필리아> -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여성 중심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작품.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아’와 유사한 장면을 연출하지만 원작과 달리 여성의 목소리를 회복하고, 가부장적 구조에 도전하는 메시지를 전달함.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트리키네코(Trickyneko) | Instagram @trickyne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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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키네코는 영어 ‘tricky’와 일본어로 고양이란 뜻인 ‘네코’를 조합한 단어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까칠한 고양이 정도겠지만 복잡 미묘하고 설명하기 힘든 존재인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 지은 이름이다. 2011년 1월 EP [꿈의 통로]를 시작으로 2024년 EP [Sound of Mind]까지 정규앨범 2장, EP 2장, 7개의 싱글을 발매했다.
*<너에게>는 각종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창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 소통> 72호(2024년 겨울호)에 전게(前揭)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