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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eessay Jan 29. 2024

출퇴근 왕복 다섯 시간에 당첨되다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사랑에 빠져버렸다. 범죄도시 2에서 배우 손석구를 처음 알아버린 거다. 그는 여태껏 내가 봐 온 밤톨머리 인간 중 최고의 미남이었다. 얼마 후엔 그가 출연했다는 ‘나의 해방일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드라마엔 흥미가 없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편이니, 그건 사랑에 빠졌을 때나 가능한 결심이었다.

 

드라마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몇 가지 감상은 남았다. 난 아무리 우주 최고 밤톨머리 미남이라도 알콜 중독자를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 일상에 지친 김지원 씨의 모습이 나랑 꼭 닮았다는 것(+이목구비는 한 치도 닮지 못했다는 점에서 오는 서글픔). 마지막으로, 경기도민의 서울 출퇴근이란 보통 일이 아닌가 보다- 하는 깨달음이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경기도에 살며 서울로 출퇴근을 했다. 처음엔 그저 공간적 배경이 경기도와 서울이겠거니 했으나 ‘서울은 노른자, 경기도는 흰자’, ‘서울 출퇴근에 내 청춘을 바친다’는 한 맺힌 대사들이 장면 곳곳에 박혀 있는 걸 보니 모르긴 몰라도 그 여정은 여간 지긋지긋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들은 귀가를 핑계로 회식 참여를 거절했고 술자리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으며, 막차가 끊긴 후면 가족과 만나 함께 택시를 타며 교통비를 아꼈다. 서울에 사는 나는 소주에 절여져 합정과 을지로 한복판을 기어 다니다가도 심야버스를 타고 씩씩하게 귀가할 수 있었으니 굳이 생각해 본 적 없는 생활이었다. 신논현역의 구불구불한 광역버스 대기줄을 보아도 ‘헤엑, 다들 너무 힘들겠다’ 정도의 공허한 말이나 내뱉을 뿐, 그 모든 건 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나도 ‘나의 해방일지’ 속 인물들의 삶을 살게 됐다. 경기도로 이사를 가게 된 거다. 출퇴근이 문제였다. 길 찾기 어플에 출발지와 도착지를 입력했더니 내가 타야 할 지하철과 버스가 알록달록한 색깔로 안내됐다. 너무 알록달록해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중간중간 걷는 시간도 친절히 소개됐다. 난 하루 종일 알차게 생활해도 만보기로부터 '당근 하나만큼 불태웠어요! (848걸음)' 따위의 안내나 받는 인간이었다. 활동량의 관점에서 보자면 보통의 인간보단 8년 묵은 집고양이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제 환승만 해도 인간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아찔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난 이미 그 정도의 수고쯤은 각오한 상태였다.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딱 그 정도의 수고만 각오했었다. 막상 어플이 시키는 대로 출퇴근 길을 다녀 본 나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 휴일에 몇 번 연습을 해보았는데 편도로 최소 시간에서 최대 시간이 소요된 거다. 소요 시간은 매번 들쭉날쭉했다. 환승 시 대기 시간과 교통 체증의 정도, 내가 잡아 타는 버스의 경로에 따라 오차 범위가 한 시간에 이르렀다. 도대체 언제 출발해야 하는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 메스꺼운 연습 과정을 거치며, 나는 초보운전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이고서라도 운전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침 내겐 '띠용이'라고 이름 붙인 가상의 자차도 있었다. 띠용이는 면허를 따기도 전부터 지어놓은 내 첫 자차의 이름이었다. '가상의 자차'라는 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대중교통의 천국인 서울에선 운전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 내겐 차를 살 핑계가 없었고, 그러니 이름만 지어놓은 채 애틋하게 띠용이를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아, 드디어 (어쩔 수 없이) 띠용이를 맞이할 시간인가. 묘하게 두근거렸다. 길찾기 어플에서 자동차 모양을 꾹 눌렀다. 출퇴근 시간엔 직접 운전을 해도 두 시간이 소요된다는 결과를 마주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과 별 다를 게 없었다. 운전의 꿈이 꼬깃꼬깃 접히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제때 차선을 옮기지 못해 길을 돌아가기라도 한다면, 2교시가 시작되고 나서야 출근을 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선생님의 지각이라니. 학생들은 그 시간 동안 넘치도록 행복하겠지만 지각에 면역이 없는 나는 그만큼의 지옥을 맛볼 게 틀림없었다. 그런 휘달리는 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직접 운전대를 잡는다는 건 어떤 긍정회로에서도 불가능했다.


그러니 난 결국 꼼짝없이 버스와 지하철에서 하루 다섯 시간을 보내게 됐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법’을 모르니, 미터당 생각 두 주먹 씩을 성실하게 떨어뜨리며 하루 다섯 시간을 길 위의 그레텔로 살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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