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판나코타식 사랑 고백』을 읽고
봄과 여름 사이, 식물이 가득한, 산책하듯 사랑하는.
마음에 들었던 시의 구절들을 공유합니다.
총 4부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1부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시집의 제목에서 기대하게 된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가장 잘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1. 산책하는 마음
오해를 이해하려 노력해본 적 있니 그런 적 없다면 세 시에 만나 함께 걷자 미리 생각해둔 산책길이 있어 (중략)
너의 마음 몇 가지를 알고 있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내내 나오지 않던 그늘도
스스로 문을 닫고서 열어주길 바랐던 못 미더운 마음조차도
그런데 내가 너의 마음을 알아도 되는 걸까 (중략)
무슨 말을 꺼내야
이 기분을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
네 웃음은 틀린 적이 없다고 말해볼까
네가 하려는 말을 듣기도 전에 맞다고 끄덕일까
성급하지만 다정할 수 있는 마음들에 대해
나는 매일 시를 쓰고 있다고
고백하지 않고도 건네줄 수 있는 것이 있지
함께 걷는 그 시간 동안에
* 여름의 오후. 한낮의 더위는 한숨 식었지만 여전히 약간은 덥고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부담주지 않고 조심히 무언가를 건네주고 싶은 상대와 산책하는 시간. 함께 걷는 걸음들을 꾹꾹 눌러담아 언제까지고 기억하고 싶을 순간이겠죠. 설레고 들뜨는 마음은 전혀 가볍지 않지만 눈 앞의 상대 덕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이 푸르른 청량함이 떠올라 읽는 내내 웃음지었어요. 동시에,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될 일들도 한 바퀴씩 돌아가게 되어 진땀을 뺐던 경험도 생각났고요. 오해를 이해로 만들 자신이 있으니 무조건적인 신뢰에 한 발짝 담가줬으면 좋겠는 마음을 어떻게 부담 없이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떨림이 여기까지 전해지네요. 어떤 말보다도 역시 겹겹이 쌓이는 시간이 마음을 증명해 줄까요?
2. 내일은 유원지에 가자 물푸레나무가 희망적인
감정에게 산책이라는 단어를 붙여주자
그건 느리고 아름다운 사색일 테니까
우리는 산책을 하자
이제부터 감정을 나누자는 말이 될 거야 (중략)
내일은 유원지에 가자
어두운 혼잣말은 멈추고 대화하자 (중략)
어디까지가 우리의 끝인지 알 수 없게
영원과 영원을 걷자
*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더라도 함께 걷는다면 같은 온기를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방 안에서 혼자 되뇌는 말들보다는 무한히 펼쳐진 길 위에서 속삭이는 말들이 더 따뜻할 거예요.
3. 내가 슬퍼할까 당신이 먼저 말해주는 것들
(중략)
당신은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길게 미소 짓거나
먼저 말하지 않아도 읽어주어서
나는 가끔
손아귀에 꽉 쥐어 숨겨둔 운명론을
무심코 흘려보내곤 하지
책은 두껍고 창문은 투명하여
서로의 어깨에 어지럽고 무거운 머리를 기댄다
아 어쩌나 속마음에서 멈추지 않는
생의 불확실함과 두려움 .. 그러나,
이대로 한 세기가 지나도 좋을 만큼
깨뜨릴 수 없는 단호한 믿음의 형태
연인이라는 온기와 예언들
* 개인적으로는 말하지 않으면 어찌 알아? 쪽에 가깝지만, 오래 지켜봐 온 사람이 내 괄호 안의 문장을 알아주는 것만큼 위안이 되는 건 없죠. 어딘가 나와 꼭 맞는 사람이 있겠다 싶은 막연한 희망보다는 내 눈 앞에 단호하게 자리 잡은 이 사람이 주는 안정감. 그만큼 세상을 버텨나가게 할 힘이 어디 있을까요?
4. 얕은 물
(중략)
이웃집 아저씨가 L의 팔목을 잡았다
- 햇빛에 웅덩이가 마르기 시작하지? 관두는 게 좋을 거야
물장구를 치던 L이 말했다
- 지구에서 단 한 번 밀어준다는 파도를 기다리고 있어요
방해하지 마세요
* 그래 우리는 모두 우주의 기운이 도와주는 존재라는 걸 잊지 말자. 나를 밀어주는 파도의 근원지가 우주이든, 지구이든, 내 곁의 사람들이든, 나 자신이든. 근거 없는 믿음이 지속되면 결국 근거를 만들어주더라고요. 물론 건강한 믿음이라는 전제하에!
5. 장서점검
당신이 알려준 노래를
반복 재생하머 걷는다
날아오를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먼지라는 건 누구에게나
쌓이는 영혼의 각질일지도 모른다 (중략)
자신의 불확실한 손바닥을
정독할 줄 아는 사람은
모서리에서 모서리까지,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까지
매달려 있어야 한다
주어진 악다구니를
길게 볼 줄 알아야 한다
꺼내지지 않는다고 그렇게 긴 울음을
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 도서관에 대해 공부했다면 익숙할 제목 장서점검!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는 일을 도서관 구석구석 책을 살피는 장서점검에 비유한 게 신박했어요. 인생은 짧아 하루하루를 빼곡히 살아내야 한다지만, 신념은 긴 편이 낫습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나와 주변을 굳건히 믿으며 다가올 월요일도 담대히 맞이해 봅시다!
‘복숭아 판나코타식 사랑 고백’ 이라는 시집은 2022년 시필사 모임을 할 때 알게되었어요. 모임원이 한 명씩 돌아가며 시를 소개할 때 나의 취향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이 책은 제목도 귀엽고 시도 사랑스럽길래 언젠가 한 번은 꼭 완독해야지! 싶었는데 그게 오늘이 되었네요. 완연한 봄인 지금, 사랑시 읽기 딱 좋지 않나요? 그 때는 위의 2번째 시 ㅡ 내일은 유원지에 가자 물푸레나무가 희망적인 ㅡ 를 필사했는데, 오늘은 1번째 시 ㅡ 산책하는 마음 ㅡ 을 필사했어요. 두 시 모두 감정 교류를 산책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네요. 날도 좋은데 사랑하는 사람과 마구 걸어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