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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12. 2023

마음의 얼룩을 빼내는 시간이 짧기를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고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1. 잘 살겠습니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중략)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p28)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예지의 밝음은 상처나 우울을 알지만 그럼에도 밝고자하는 의지라서 귀하다고. 낙관을 의지로 실천하는 사람이 멋진 어른인거야." 그 날 친구의 말이 없었다면 이 소설을 읽고 크게 우울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 속 빛나 언니는 해맑음,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오는 무례가 어떤 것인지 온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화자는 그러한 배려없음을 현대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낱낱히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집을 읽으며 작가의 사고방식이 나와 다름에 흥미로웠는데, 그 부분을 가장 여실히 읽어낼 수 있었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서로 잘 살아냈으면 좋겠다는 연대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2. 일의 기쁨과 슬픔


 사고구조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나 행동에 의문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야 돼요.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이상해져요." (p.50.)


  아, 나는 삶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사고구조를 이해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며 살아왔던가. 그리고 그 때마다 머리가 이상해졌다. 누가 내 약점 콕 찝어서 이야기해준 기분.



  굴욕감에 침잠된 채로 밤을 지새웠고, 이미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그런데도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여전히 자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p.51.)


  제 아무리 자아가 무너진다고 해도, 세상은 굴러간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먹었던 밥을 게워내도 내가 모조리 지워져버린 것 같을 때에도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출근을 해야했다.



  대체 그렇게 똘똘하다는 케빈이 왜 이 회사에 왔는지 궁금한 적이 있다. (중략) 의외로 대표가 케빈에게 내민 카드는 '개발적으로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주겠다'였다고. 겨우 그런 말로 설득을 한 것도 신기했지만, 고작 그런 말로 설득이 된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래서 케빈은 지금 '개발적으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있나 모르겠다. 매일 나오는 버그 잡기 바쁜 것 같은데. (p.54)


  누군가에게는 '겨우'나 '고작'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가치에 전방위적 노력을 쏟는 사람들이 꽤 많다. 오래오래 낭만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맞지 않는 걸 알면서도 제도권 안으로 꾸역꾸역 기어들어온 이유이기도 하고. 그래서 난, 이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낭만적으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있나? 매일 나오는 분실도서 찾기 바쁜 것 같은데.



  완벽하게 잘생겼다. 사람이 어쩜 이렇게 우아하게 생겼을까. (p.62)


  역시 덕질이 최고다. 사람이든 책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한 놈만 걸려봐라 이거야. 지독하게 사랑해줄게. 되도록이면 .. 사람은 .. 피하고 싶지만. 가변체는 무서워요. 이제 그만.




3.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지훈씨 오랜만. 그 평범한 한 문장에 '너무하네' 같은 건 바로 잊을 수 있었다. (p.67)


  읽을 당시의 내 심리와 닮아있어서 밑줄을 그었나보다. 뭐 그때만 그랬겠나 .. 화 빨리 풀기 대회 나가면 순위권 안에 들 자신이 있다. 그닥 장점이라고는 생각 안 한다. 사람 꼴 우스워지기 십상이므로.



  사실 지유씨와 특별한 관계였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 사이에 특별한 기운이 흘렀던 것만은 확실했다. (중략) 연애의 가능성이란, 얼굴을 마주하고 한두마디만 나누어보면 금방 도드라져서 감지하기 쉬운 종류의 것이었다. 다만 나는 이십대가 아닌 삼십대였으므로,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줄 알았다. (p.70)


  본격 연애고자가 연애고수인 척 하기. 인정하기 싫지만 나의 찌질한 조각과 맞닿아있는 부분. ㅡ 한숨 ㅡ 사람을 읽어낼 때 자만하지 말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는 당사자도 모를걸?



  나는 그냥 내 상황만 생각하기로 했다. 원래 사람은 다 이기적이니까. 나에게 다시 주어진 기회라고만 여겼다. (p.72)


  올해 가장 가깝게 지내온 사람이 자주 했던 말. 우리는 한 계절이 가는 동안 서로의 세계를 엿보았다. 여느 인간관계처럼 우리 역시 닮아있기도 다르기도 했는데, 닮은 건 반가웠고 다른 건 배울 점이 되었다. 배운 부분들 중에 하나. "사람이 모두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면 세상을 이해하기가 좀 쉬워지더라." 그러니까 나도 이제 우리보다는 나에게 조금 더 집중하는 사람이 되어도될까? 마음의 얼룩을 빼내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그 얼룩이 훈장이든, 흉터든 이제는 애틋해진 사람이 남기고 간 거라면 옅게 지워내는 편이 안전할텐데. 모르는 건 모르는 채로 남겨두며 더욱 이기적으로 굴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준대. 사람들은 마치 본인이 항상 옳은 양 남을 까내리지만, 그 안에서 예지도 항상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자. 해결되는 그 시간이 매우 짧기를 바랄게."




4. 다소 낮음


  아버지는 장우를 통해서 당신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정의한 행복의 방식과 장우의 방식이 달랐다. 그게 갈등의 시작이었다. (p.104)


  모자(母子)분리에 실패했을 때 생기는 문제의 핵심. 가까운 사람일수록 건강한 거리를 갖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쉽지 않겠지.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니까.



  "전 막 열심히 하기도 싫고, 막 성공하고 싶지도 않은데요."

  돈사장이 장우로부터 시선을 거두면서 크게 웃었다.

  "성격이 더러워서 음악은 잘 만들겠네. 아까워 죽겠어." (p.114)


  근성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건 국룰 아닌가?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 뚝심있고 주관있게 살자. 아, 그렇다고해도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답도 없으니 외부 세계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유미가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수없이 바랐는데. 막상 시간이 흐르고 나니 유미에 대한 감정이 예전 같지 않았다.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있었지만. 다시 이 집에서 유미가 잠을 자고 밥을 먹는 모습이, 그 자연스럽던 일상이, 이상하게도 이제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털 뭉치가 집 안 곳곳 굴러다니고, 던진 공을 몇번이고 다시 물고 오는 보리가 있는 이 풍경이 더는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 컸다. 장우가 한마디만 하면 유미는 금방 자세를 낮추고 돌아올 기세였지만 끝내 돌아오라는 말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p.120)


  모든 건 타이밍이다. 많은 일이 운에 좌우되는 건 불변의 법칙이니, 그 타이밍이 올 때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이 되면 그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뿐이다. 지나간 타이밍에는 아쉬워하지 않고 공유한 시간이 있음에, 그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흘려보내기.




5. 도움의 손길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중략)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중략)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p.142)

  윤기 없이 푸석한 피부,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카락, 무언가 다 소진해버린 것만 같은 표정. (p. 143)


  아이를 낳게 된다면 최선의 성실함으로 임하겠지. 임신, 출산, 육아 그 모든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게 너무 두렵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얼마나 지워질지. 지워진 자리를 채워넣기 위해 아이에게 얼마나 헌신하고 의미를 찾을지. 비혼과 결혼의 기로에서도 딱히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출산은 글쎄. 휴, 새로운 사람을 삶에 들인다면 또 얼마나 많은 나의 선택지들이 바뀌게 되는걸까.

 


  분명히 아주머니를 그만두게하려고 했었는데, 내 입에서는 왜인지 "저희 집도 매주 오셔도 돼요. 다음 주부터 매주 오세요" 하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p.155)


  심드렁하게 생각했던 일조차 먼저 거절당하면 알 수 없는 승부근성이 피어오르곤 한다. 하물며 평소에 자주 만나서 매일을 신경쓰고 있던 사람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려고 하면 어떻겠어. 이별 앞에 선 내 감정이 미련인지 승부욕인지 모호해지면 이미 망가진 관계인데. 나는 왜, 매번, 늘, 어찌나 이기고 싶고 버려지고 싶지 않은지. 이유를 알고있어도 치유되지 않을 상처일테니 그런 밤에는 내 안의 어린아이를 붙잡고 한 없이 달래줘야한다. 다 괜찮아질거라고.




6.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


  오늘은 좀 망했지만, 내일부터는 오늘 몫까지 정말 아끼고 또 아껴서 십만원짜리 적금을 하나 더 부어야지. (p.164)


  이런 마음으로 산다. 매일을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오늘 좀 망했다면 내일에 기대어 잠을 청해보는거야. 그 내일이 또 별다를 바 없는 오늘이 될지라도 성실한 하루들이 모여 뭐라도 이루어내겠지, 하는 심정으로.




7. 새벽의 방문자들


  '무난하다'는 평균의 가치가 역설적으로 얼마나 희소한 것인지를 해가 지날수록 체감하고 있었다. (p.171)


  '무난'이란 모든 기준에서 평균 이상의 위치에 있어야하기 때문에 결국 '희소'에 가깝다. 그리고 이 위치란 누리고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 경계를 벗어나려고하면 선명해진다. 네버랜드에서 살아온 피터팬은 여러모로 모르고 있다가 서른 이후로 아등바등 살아요. 나의 육각형을 지켜내고 채워내기 위해서.



  긍정과 부정을 수없이 오가면서 내린 결론은 이 의미없는 질문의 반복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P.185)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은 미완으로 남겨둘 줄 아는 것도 용기다.




8. 탐페레 공항


  아주 오래전부터 다큐멘터리를 좋아해왔다고.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오직 이것밖에 없는 것 같다고.

  "사 ㅡ 랑에 ㅡ 빠졌 ㅡ 군요."

  "네, 사랑. 아마도요." (P.199)


  하루에 8시간이 넘도록 함께해야 하는 일이 사랑스럽지 않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진로를 결정할 때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만 발을 디뎠던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속사정을 완벽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이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이 소설을 통해 어느 정도는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인생의 변수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들이닥칠지 모르니, 마냥 남의 일만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래 꿈꿀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내가 뭔가 크게 제도적으로 바꿀 수는 없으니, 그냥 내 자리에서 아이들의 마음에 낭만을 심는 일을 할게.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초라하다고 여겨질 때였다. (중략) 시골 어르신들이 육 밀리 캠코더를 든 나를 보고 '아이고, 감독님'이라고 불러줄 때는 민망하면서도 살짝 기분이 좋긴 했지만. (P.206)

  연봉계약서에 서명하던 그 순간, 씁쓸한 감정이 들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기뻤다. 방송국이고 피디고 뭐고 지긋지긋했다. 대신 4대 보험이 어쩌고 하는 말들과 상여금, 특근수당, 연차와 실비보험 같은 단어들이 그렇게나 따뜻하고 푹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p.207)


  이직한 후로 내가 하는 일이 초라하다고 여겨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 학부모님들, 다른 선생님들께서 '예지 선생님'하고 불러줄 때면 내 정체성 위로 덮혀있던 모래가 단숨에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일도 묵묵히 해내야 하는 게 인생이라지. 본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의 경계가 다를테니 타인의 삶을 쉽게 이해하려고도, 구분지으려고도 하지 않아야겠다.



  야근하다 들른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저녁 뉴스 화면 아래로 지나가는 신입 피디 채용 공고 자막을 본 건, 일주일 전이었다. (p.207)


  학창시절 생활기록부 장래희망 란에 '교사'를 일관되게 적어온 것과는 달리 비사범대로 진학했다. 대학교 1학년 때였나, 당시 유행하던 하이킥 시트콤에서 박하선이 국어교사로 나왔었는데 눈물나게 질투가 났다. 티비 앞에서 엉엉 울고 교직이수를 다짐했다. 그리고 '블랙하선'처럼 독기 가득하게 대학생활을 했지. 깊게 꿔 온 꿈은 애써 잊어내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일종의 사고처럼.




해설 : 센스의 혁명 - 인아영


  작고 평범한 개인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복잡한 그물망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 물음에서 장류진의 첫번째 소설집이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수호해왔던 내면의 진정성이나 비대한 자아가 없다. 깊은 우울과 서정이 있었던 자리에는 대신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기인식, 신속하고 경쾌한 실천, 삶의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있다. (p.215)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스템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질문하며 한걸음 더 나아간다. (p.220)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며 사는 삶에 보내는 현실적인 응원과 연대가 담긴 소설집.

  사회초년생(특히 이십대후반과 삼십대초반의 여성)에게 추천한다. 평소에 소설을 읽기 어려웠던 사람도 담백하고 사실적인 묘사 덕에 술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퍽퍽하고 건조한 삶에 이 책이 위안으로 가 닿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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