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직장에서 살아남기

2025년 9월, 소수책방 라이팅클럽에서

by 조이

“귀교는 00시 교육감배 배구대회에서 공동 3위의 성적을 거두었기에 이 상장을 수여합니다.”


2학기 개학이 얼마 지나지 않은 교무회의, 각 부서의 주간 공지사항이 끝나고 교장 선생님의 말씀만을 남겨둔 참이었다. 조촐한 상장수여식이 시작되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양쪽 어깨가 살짝, 귀와 가까워졌다. 그럴 자격이 있냐 묻는다면, 글쎄. 배구팀에 소속되긴 했으니까. 매주 월요일 교무회의가 끝나고 체육관으로 향해 땀을 흘리기는 했으니까. 실제 코트에 발을 붙이고 선 시간은 1시간이 채 되지 않지만. 경기 중 내 자리는 코트 옆 벤치, 후보의 후보 선수지만. 원래 배구를 좋아했나? 전혀. 임용 전에는 관심조차 없는 스포츠였다. 배구와 관련하여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우리나라가 김연경 보유국이라는 것 정도? 그런 내가 배구팀에 들어가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코로나 발 팬데믹 상황이 잠잠해지고 위드 코로나의 일상으로 접어들던 2022년, 우리 학교와 처음 만나게 됐다. ‘간택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우리 학교에 간택되었다. 기간제 교사 생활과 임용고시 공부를 병행하는 기간이 제법 길었다. 5년. 5년 동안 3자리의 공고가 있었다. 한 번은 1차 탈락, 한 번은 최종 탈락, 한 번은 최종 합격. 마지막 자리가 이곳이었다. 합격 전화를 받고 마냥 좋아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세상이 하얗게 뒤덮여 눈이 시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던 2월이었다. 꿈을 펼칠 단단한 울타리를 만나 기뻤다. 바람을 막아줄 거라는 순진한 믿음이 있었나 보다. 울타리 앞뒤로 촘촘하게 둘러싸인 철조망에 찔려 또다시 울게 될 줄은 몰랐을 거다.


대체로 보수적인 직장은 신규 구성원에게 친절하지 않다. 기존의 구성원들 사이에 굳어진, 수많은, 암묵적인 규칙들은 지뢰와 같이 느껴졌다. 일례로 특별한 날이면 드레스 코드가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평소와 다름 없이 티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출근한 날, 개학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강당 문 앞에서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로 몇 번의 행사를 거치며 학부모가 학교에 방문하는 날이면 각 잡힌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규칙을 알게 되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나 눈치를 채지 못한 나는 졸지에 예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고 가는 모든 말에는 뼈가 있어서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 대답을 하면 나만 바보가 됐다. 사람마다 말을 사용하는 방식도 다 달라서 맞춤형 소통을 해야만 했다. 1인 부서로 직속 상사도 없이 전 직원을 상대하는 나의 입장을 고려하여 친절하게 말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의자에 걸려있는 옷은 뭐야? 라는 물음은 눈에 안 보이게 치우라는 뜻이었고, 힘들지 않아요? 하는 걱정은 눈치 있게 빠지란 뜻이었다. 미묘한 톤 차이로 달라지는 말의 뜻은 암호 같기도 했다.


울타리라 믿고 들어간 돌담 속에 자리한 업무 환경을 보며 겹겹이 포개어진 마트료시카 인형이 떠올랐다. 하나의 목각 인형 안에 크기 순으로 똑같은 인형이 들어 있는 러시아의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 알 수 없는 표정의 얼굴이 반복되는 인형의 수많은 뚜껑을 벗겨내려 지뢰로 이루어진 돌기를 짚으며 암벽 등반을 했다. 불친절한 클라이밍 코스였다. 직접 마음을 다쳐가며 묵묵히 올랐다. 언제 어디서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채로. 그저 오르다 떨어지길 1년 정도 반복했을 즈음 마침내 누군가 조명을 비춰 길을 열어주었다. 예고도 없이 초대된 배구 단체 카톡방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체육관에 모여 땀에 젖은 배구공을 돌렸고 여러 번의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름 석 자에 꼭 따라붙는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성을 뗀 두 글자 이름에 ‘샘’이라는 애정 어린 축약어가 등장했다. 여섯 글자에서 세 글자로의 축약은 학교생활에서 불필요하게 소모되어 온 감정 또한 절반으로 줄여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1년을 후보 선수로 뛰고, 다음 1년은 어깨 부상으로 쉬게 되었다. 조금은 좋았다. 아쉬움도 적었다. 일주일에 한 번 개인 시간이 추가로 확보된다는 것이 직장인에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 사람은 알 거다. 학교에 어느 정도 적응도 했겠다, 배구팀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선수가 아니더라도 배구 경기 날이면 경기를 보러 가야 했다. 교육감배 배구대회는 우리만의 올림픽이니까. 학기 중 조퇴에 허용적이지 않은 분위기임에도 경기 시즌 배구를 이유로 한 조퇴는 웬만하면 승인이 났다. 선수였던 젊은 응원단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불편했다. 내가 난 자리엔 직속 부장님께서 유니폼을 입고 앉아계셨다. 유니폼을 대신 갈아입고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 피어올랐으나 그럴 자격이 없었다. 행동 없는 마음은 의미가 없다. 특히 사회생활에서는. 결국, 올해 3월, 인성과 실력을 기반으로 엄격히 선발했다는 선수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온 걸 발견했을 때 거절 의사를 밝힐 수 없었다.


실은 봄이 오기 전, 늦겨울 워크샵에서 ‘올해 내가 배구를 지속할 것인지’에 대해 친한 동료와 밤샘 토론을 했다. 이렇게 바쁜 업무 환경에서 매주 배구를 하다가는 죽는다, 정말 죽고야 만다. 배구를 제외하고도,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치의 125%로 일하고 있었다. 타이트한 인력에 따른 과한 업무량, 교내 소수 직무에 대한 존중의 부재, 구성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기싸움, 프로 의식을 내세우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보상 구조 등이 번아웃의 원인이었다. 그렇다고 꿈에 그려 온 자리에서 쉽게 좌절할 수는 없었다. 무작정 버티다보니 입사 첫해에는 매달 몸살에 시달렸고, 두 번째 해에는 매달 다른 과의 병원을 찾았다. 전임자가 괜히 40대에 돌아가신 게 아니구나, 매 순간 다시 실감했다.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유산소 운동을 시작했고 심폐지구력의 상승곡선 속에서 꾸역꾸역 버텨내는 중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일을 오래도록 하고 싶다. 그런데 일의 범위에 배구도 포함이 되는 걸까.


잘 웃는, 상냥한, 사근사근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든 일에 프로 의식과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 우리 학교의 인재상이다. 리듬감이라곤 없이 강강강강으로 휘몰아치는, 완벽주의와 인정 욕구를 기반으로 한 구성원들의 예민함과 긴장감이 늘 함께하는 현장. 이곳의 업무 환경이다. 다른 학교와 비교하여 1.5배의 연봉을 주고, 2배의 업무 성과를 가져간다. 만 7세부터 12세까지의 어린이를 하루 9시간 상대하며 퇴근 후에 매주 1회 이상 3시간 운동을 함께 하고 4시간의 회식 자리를 갖는 것, 배구를 좋아한다면 쉬운 일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배구팀에 간택된 젊은이들은 자리를 지킨다. 무엇을 위해? 보수적인 직장에서 가장 능동적인 사람은 가장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능동적으로 수동성을 행한다. 교사라는 직업으로 이끈 내면의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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