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의 모닥불

by 조이

봄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만났지. 4월 중순, 벚꽃이 만개하는 밤에.


그날은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이었어. 금요일 퇴근 후에 곧바로 경복궁역으로 향했지. 너는 경복궁역 근처에서 외근을 마치고, 내가 내릴 정류장 근처의 빵집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어. 버스에서 내렸을 때, 몇 걸음 앞에 네가 보였어. 머리카락 끝에 갈색 염색이 남아있는 채로 검은색 가죽재킷을 입고, 커다란 백팩을 메고, 뿔테 안경을 쓰고 히죽히죽 웃는 너. 나도 너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고 우리는 이내 땅을 보며 걸었어. 흔들흔들 폴짝거리며 걷는 네 걸음걸이와 그림자를 보면서. 횡단보도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 모닥불이 있는 와인바까지.


가게의 첫 손님은 우리였어. 아직 오픈 시간이 되지 않아 가게 앞 의자에 앉아 기다렸지. 별로 덥지도 않은데 땀을 엄청 흘렸다.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 맞다 넌 테토녀가 좋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너한테 에겐남이냐고 놀렸던 걸로 기억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옆통이 굵고, 운동을 좋아해서 테토남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아웃핏에도 관심이 많은 에겐남. 지금 되돌아보면 이분법적 분류로 어떤 틀에 가두기엔 우리는 입체적이고 다채로운데, 처음에 서로를 알아갈 땐 상대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뇌에 입력할 때마다 어찌나 짜릿한지.


우리 거기서 먹었던 음식 정말 맛있었잖아. 기억나? 김 페스토 파스타였나? 아무튼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나는 네 앞에서 절절맸던 것 같아. 진짜 웃겨, 내가 어디 가서 기죽는 사람이 아닌데. 특히 남자 앞에서는! 아마도 너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과, 거침없으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던 것 같아. 네 앞에서는 입이 저절로 다물어지더라. 기싸움을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 같아. 이래서 인연은 있다고 하는 건가 생각했어. 마주 보고 앉아있을 때 나를 적당히 긴장하게 만들고, 어쩌다 관심 분야가 대화 주제로 등장하면 갑자기 내가 폭 빠져들어 2절 3절까지 얘기를 해도 멋있다며 즐겁게 들어주는 사람. 네가 그런 사람이라 그 자리가 마냥 즐거웠어.


식전주를 마시며 너는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우리처럼 확신이 없는 관계에서는 그럴 수도 있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네?"

"이런 말 냉정하게 들리려나요?"

"아니요. 사실인걸요."


사실이라고 다 내뱉을 거면 사실적시 명예훼손 이런 말은 왜 있냐.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하는 관계에서 '확신이 없다'는 말을 왜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거야. 게다가 그렇게 사랑에 빠진 눈빛을 하고서. 나는 쿨하게 알겠다고 했지만 진심은 표정에서 다 티 났겠지. 안주 두 그릇, 전통주 두 병쯤 비우고 우리는 마당에 있는 모닥불 앞으로 가 캠핑 의자에 나란히 앉았어. 내가 봤을 땐 모닥불에 뭐가 있는 것 같아. 앞으로 시작하는 연인들에게는 여름을 앞두고 있더라도 모닥불 앞으로 가는 걸 추천해야겠어. 그날의 명장면 중에 하나였으니까. 네가 한동안 나를 느끼하게 쳐다보길래 나는 계속 웃으면서 헛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잠깐의 짧은 정적 끝에 네가 그러는 거야.


"확신이 필요해? 확신을 줄까?"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그때부터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확신을 주고 싶어서 안달 난 남자와 이미 확신을 받고 있는 여자. 달콤하잖아.


경복궁 돌담 벚꽃이 예쁘다던데 우리는 그냥 보이는 대로 걸어서 광화문 광장에 닿았다. 세종대왕 동상을 막 지나쳤을 즈음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고, 내가 몇 걸음 더 앞선 채 뒤돌아 너와 마주 보고 걷고 있었어. 너는 사랑이 가득 담겨 얼빠진 얼굴로 나를 보다가 입 맞췄지. 광화문 광장에 퍼져있는 가로등 불빛이 붉어서 우리가 아까 그 모닥불을 가져온 줄 알았어. 너는 모르지, 네 표정. 네가 사랑을 할 때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표정을 짓고 있는지. 광화문 광장이 끝나는 이순신장군 동상 앞 횡단보도에서 너는 내게 고백했지.


"근데 나는 고백해 본 적 한 번도 없는데. 우리 오늘 1일인가?"

"그게 무슨 .. 고등학생이야? 나는 그런 거 고백으로 안 칠래. 마음을 담아 다시 부탁드려요."


그리고 네가 내게 다시 고백하기까지 몇 시간이 걸렸는지. 편의점에서 감자칩과 맥주를 사 들고 광화문 광장 한가운데로 다시 돌아와 한참을 떠들고, 그러다가 막차가 끊겨 종각까지 하염없이 걷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 오픈 준비 공사 중인 가게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또 걷고 걷고 걷다가 어느 이자카야에 들어갔잖아. 이건 아직 말하지 못한 비밀인데, 거기서 소맥 두 잔에 오뎅탕 한 모금을 마신 이후로는 기억이 잘 안 나. 그러니까, 내 머릿속에 우리의 시작은 "우리 오늘 1일인가?"로 남아있다는 소리야. 너는 그 이자카야에서 내가 화장실에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진중하게 마음을 담아 고백했다고 했지만, 미안. 그날을 계기로 우리가 지금까지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니.


그날 우리는 결국 첫 차를 타고 헤어졌지. 30대가 된 이후로 밖에서 밤새워 논 건 처음이었어. 풋풋하고 재밌었다. 하루를 밤새고 주말 이틀 내내 죽어있었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또 이런 시작을 해보겠니. 넌 가끔 내게 이런 말을 하잖아. 네가 차가 없어서, 더 좋은 남자친구가 되어주지 못해서 신경 쓰인다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니.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행복을 꾸려가면 될 일이야. 뚜벅이면 어떠냐. 덕분에 아직도 청춘이고 온 계절이 봄이다. 행복해서 얼빠진 네 얼굴 오래오래 보고 싶다.


생일 축하해. 어제 쓰려고 했는데 하루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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