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룡산 원추리 품어안고
플랫폼의 좌충우돌 백두대간 산행 도전기 11
설렘으로 가득한 리무진버스 안, 한바탕 꿈을 꾸고 났더니 다시금 현실 세계다. 잠에 취했던 것인지 조차도 모호했던 현실과 꿈속사이 경계를 헤매인 이후의 이 허망함. 왠지 낮설게만 느껴진 건 아마도 무룡산 원추리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너무나도 컷던건 아니었을지.
이리저리 흔들리는 리무진버스에 몸을 맡곁다. 살아있다는데 일단 안심하며, 오늘도 왜 떠나고 있는지에 대해 나에게 되묻는다. 어쩌면,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떠나는 길일수도 있겠다. 그렇게 비몽사몽간 장장 세시간여를 더 달려 황점마을에 도착한다.
2주전의 짜릿했던 남덕유의 숨결들이 아직도 남아도는 듯 그리움만 가득했다. 그래서 난, 오늘도 마루금에 몰입하며 일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한없이 허우적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 잠에 취해있는 자연과 숲의 주인공들 사이 길섶을 거닌다. 마음속에 백팔계단을 주문하며 오르는 월성재 오름길, 일명 백팔번뇌길이다. 코가 땅바닥에 닿을 듯 가파른 길을 네발로 기다시피 해서 오르는 중.
몸이 벌써부터 땀으로 담금질 중이다. 세속의 모든 독과 때를 벗겨내는 수행의 과정일거라 여겨 보지만, 결코 만만치 않는 하루가 될거라는 염려와 걱정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시간. 밤의 정적을 깨우는 스틱소리만 요란스럽게 들려온다.
산행은 매번, 초반 30분이 고비다. 한고개 넘었더니 또 한 고개. 비오듯 쏱아져 내리는 무수한 땀방울들을 손수건으로 훔친다. 싱그러움 가득한 새벽 공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 들이며 어둠의 숲을 오직 헤드렌턴 불빛만에 의지한 채 오르는 중.
어둠과 밝음, 같은 듯 다른 듯. 어둠이 있어 곧 밝음도 있고, 어둠도 세상이듯 한줄기 빛도 또다른 세상이라 생각하며 한걸음씩 내딛는다. 수행한다는 핑계로 뭇 생명들 잠을 깨운다는게 조금 미안할 따름이다. 바람도 조금 살가워졌다. 그 새벽바람은 내 옷가지와 나뭇잎들을 두근거리게 했다. 어둠의 공기를 가르며 올랐더니 마루금과 속세를 잇는 고개 월성재. 오늘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는 듯 마음이 심하게 요동쳐 온다.
어스름의 대간길, 돌뿌리에 잠시 앉아 멈춤의 시간을 가져본다. 비록 가는길 멀지라도 여유라는걸 느껴보고 싶었다. 동안 쉴새없이 앞만보고 달려왔던 자아에 대한 보상이라고나 할까. 때마침, 하늘말나리 몇 그루와 일월비비추들이 무리지어 피어 졸고 있는 모습에 난 아무렇치 않다는듯 그냥 단숨에 지나쳐 버릴 순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건지, 춤을 추고 있는 건지. 그 모습 내 어릴적 시골마을 고샅길 모퉁이에서 피어니던 봉숭아 꽃대처럼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이토록 살다보면 잠시 멈춤이란 것도 필요했다. 한때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것 말고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시절을 회고해 본다. 그렇게 멈춤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나에게로 다가와 시답잖은 느림의 미학이란 미션만을 남겨 주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어쩌면, 중년의 삶이 잠자던 날 깨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 삶은 조용히 다가와 지친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잠시 멈춰서서 주변을 관조하는 삶을 살아 달라면서.
멈추니까 보이더라. 완벽함을 꿈꾸며 미쳐 날뛰던 시절엔 결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것들의 내면까지 어느덧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던 것. 겨우 느리게 걸어주었을 뿐이었는데 지름길보다 에둘러 가는길이 내마음에 와 닿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다간길에도 어김없이 조금씩 사위는 밝아왔다. 마음 두근거렸다. 삿갓봉 오름길은 내 어릴적 꿈많던 삶의 여정과도 일맥 통해 있었다. 마루금과 나의 인생 족적들이 신기하게도 맥락이 닮아있었던 샘. 사위가 밝아오니 마루금의 요정들이 날 반겨주는듯 춤을 춘다. 긴산꼬리풀, 짚신나물이 차례로 바람에 흔들거렸다. 그리고 저 멀리 삿갓봉에 용틀임하듯 피어오르는 해오름. 순간 두팔을 번쩍 펼쳐들었다. 여명이 시작되는 이 설레임의 시간.
이 순간에도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멈춤의 시간들을 가져본다. 이내 젊은날의 기억속으로 깊숙이 빠져든다. 그 많던 꿈틀거리던 꿈들이 사라버린 자리에 후회만이 잔뜩 남아 내 마음을 흔들어 댄다. 그땐 참으로 당당했었지. 가진건 별로 없었어도 고집하나 만큼은 억척스러웠다.
활짝 펼쳐진 두팔에 힘을 더 불어넣는다. 저 불구덩이 속으로 내 모든 근심과 헛된 번뇌, 못된 욕망들을 모두 던져버리고 싶었다. 짜릿함속을 한참을 걸었더니 내 육신은 이미 삿갓봉에 닿아 있었다. 해가 떠나간 자리엔 운무가 대신했고. 저멀리 비비추꽃을 빼닮은 무룡산이 온통 운무로 뒤덮혀 있었다. 한줄기 바람에 운무도. 야생화들도 출렁거리기를 되풀이한다.
오늘도 여전히 함께걷는 걷는길이다. 머나먼 마루금 눈부신 풍경앞에 딸랑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게 얼마나 다행한일인지. 말없이 내미는 손길 하나 하나가 마루금 여정의 큰 의미를 담는다. 좋은사람들 사이먼님과 함께 걷는 길이어서 점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중이랄까. 저 구름속을 거니는것이 오늘 산행인 거겠구나, 혼자 읇조리며 덕이 넘치고 한없이 너그러운 어머니 품속과도 같은 덕유평전을 향해 떠난다.
남덕유의 깊은 골에서부터 점차 차가운 바람 불어오고 운무는 무룡산을 넘고 덕유능선 어느 길목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다가 슬그머니 지나갔다. 삿갓봉 정상에서 외로이 흔들리고 있는 배초향 몇 송이. 때로는 바람에 흔들리며, 때로는 바람을 즐기며 옹기종기 모여 서로 기대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에 쓰러질듯 하나씩 피워올린 여리디 여린 꽃송이들.
순간, 내 어릴적 마당 한켠에 심겨져 있던 나리꽃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활짝핀 물레나물의 미소와 함께 한여름의 무더위 마져도 잊은 채, 추억속의 하늘길을 걷는다. 붉은산꽃하늘소 한마리 나뭇잎새 위에서 낮잠을 자고. 가는장구채도 졸고 있다. 내가 지나가도 모른채, 오늘 오르지 않았다면 전혀 느낄 수 없는 쾌감. 육신이 삿갓골재를 지나 삿갓골대피소에 닿는다. 길가던 나그네에게 잠깐 쉼과 희망을 주는 곳.
산은 강을 품고
강은 사람을 품어 키우고
무룡산은
원추리와 비비추를
담아 키우고 있었다
무룡산으로 향한다. 마음 두근거리고 점점 고조된다. 오름길은 그야말로 행복이 걸려있는 길. 정상에 걸린 운무쫒아 오르다 멈추다를 그져 반복할 뿐이다. 원추리들 하늘 바라보며 춤을 주고 있다. 자신을 있게 한 하늘신께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처럼.
무아지경이다. 이곳에선 한시도 욕망같은 건 품을 수가 없었다. 비비추들 활짝 웃으니 원추리들도 곁에서 흥을 돋구듯 춤을 추고 있었다. 이렇게 먼길을 가다보면 멈춤이란게 가끔은 필요하다. 자연의 소릴 들어주기 위해서. 멈추지 않으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불가능한 일.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것은 관심이었다. 함께하는 삶을 뜻하기도.
하늘은 뭐가 못마땅한 것인지 잔뜩 흐리고 흙들마져 젖어 있었다. 잿빛 하늘과 운무 가득한 마루금의 조합. 새들의 울름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간절함이 서려있었다. 관심 좀 갖어달라는 애원에 가까워 보였다. 맑고 청명한 소리. 세속에서의 소음공해가 아닌 백색소음이었다. 그 울음소리 엄호받으며 다시금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남덕유와 북덕유를 이어주는 무룡산 정상으로. 드디어 얼굴 보여준 무룡산. 용이 춤추는 듯한 형상이라는 무룡산은 신비 가득했다. 정말로 운무속에 용이 승천하는 건 아닌지. 운무는 위태로워 보였다. 금새라도 물방울되어 내 머리위로 쏱아질것만 같았다.
흰여로 한송이 외롭게 하늘거리고, 홍다리노린재 홀로 흰여로 잎새위에서 수행중에 있었다. 이렇게 무룡산에서의 즐거운 꿈나라 여행이 어느덧 종착역을 향해 치닫는다. 동업령으로 내려서는 길에서 하늘말나리 3형제와의 만남이 있었다. 결국, 만남이 있으면 또 헤어짐이 있는법. 아쉬움을 뒤로한채 또 떠난다. 삶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 떠남과 돌아옴의 이중주. 몸이 심하게 흔들거렸다. 야생화에 취한 것인지. 운무에 너무 몸을 기대어서인 건지 모를 일이었다.
덕유평전 바람은
그리움 가득싣고 능선과 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바람따라 숲속과 대기를 이리저리 떠다니는 운무들! 이들은 방랑자처럼 온산야를 휘감싸고 있었다. 마치 수묵화를 그리다 남은 한켠의 여백처럼 유유히 빛나고 있었다. 마치 자신만이 발광체인것처럼 영혼의 길라잡이가 되려 하고 있었다.
새들의 합창소리도 요란했다. 어수리 한그루 아름드리 피어 흐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떠난다는게 뭇내 아쉬웠던 것일까. 난, 어수리에게 귓속말로 살포시 말해주었다. "헤어짐이란 또다시 만남을 의미하는 거라고" 그 말을 끝으로 이별은 시작되었다.
당분간은 오지못할 마지막 눈물의 메시지였다. 이별이란 "내 마음의 문을 조금은 열어둔다는 말이자, 조금 더 열수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삼십여분 내려 걷다보니 경남 거창과 전북 무주를 잇는 동업령.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는 곳이다. 배낭을 풀어 체리 한주먹 목에 넘겨주었다. 창자속으로 엄금엄금 기어 들어가니 대장과 소장에서 금새 흡수하여 혈관을 통해 뇌까지 전달되는 느낌이다.
트랭글 GPS트랙을 확인해보니 오늘 27킬로미터 중 약 12킬로미터. 시간은 오전 9시. 새벽 3시경 첫걸음을 뗀후 6시간째 여행을 계속중이다. 다시금 신발끈을 단단히 조여맸다. 끝없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된다. 속단꽃 몇 송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하늘신께서 보내주신 걸까. 운무로 가득찬 마루금길에 잔잔한 희망이되고 있었다.
손을 뻗어 한웅큼 잡아보았다. 잡힐듯 말듯 마치 어딘가를 향해 기약없는 여행을 떠날것만 같았다. 백암봉 오르는 길 길섶에 여로꽃 한송이도 삭풍에 휘날린다. 이에 뒤질새라 산오이풀 한송이 필듯 팔듯 청초한 모습, 민낯의 얼굴 보여주었다. 어느새 운무는 구름비가 되어 젖은 내 뺨에 살포시 날라와 앉는다. 마루금에서 듣는 빗소리는 참 새롭고 신비롭다. 세속에선 소란스러웠던 소리가 이곳에선 청아하게만 들려온다.
바람에 떨리는 나뭇잎 몸뒤집는 모습. 안개비가 되어 내 머리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안개비 사이로 가느다란 빗줄기가 수직 낙하한다. 희미하게 떨어지는 그 안개비는 갈길먼 내 맘을 더욱 초조하고 심란하게 휘젓고 있다.
백암봉 오름 숲길은 신기루 같았다. 보일듯 말듯 모습 보였다가 어느순간 사라지고. 골은 골대로, 숲은 숲대로 바람따라 안개비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나무들도 심하게 흔들거렸다. 나뭇잎과 가지에 떨어지는 안개비가 덕유능선 마루금위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음악선생님께서 연주하시던 풍금소리처럼 들려왔다. 내 마음속 가장 심오한 곳까지 파고든다. 베일에 가려진 그 풍금소리가 울려퍼졌고 구름비와 안개비는 그렇게 나에게 여운이라는 숙제만을 남기고 사무친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그냥 자연의 선물인 안개비를 맞으며 세속의 모는 근심과 번뇌 내려놓으려 한다. 안개비를 맞으며 평온함과 안온함을 느끼며 자연의 품에 폭 안겨보려한다.
능선의 바다의 끝은 어디메일까. 마치 심연의 바다를 보는 듯 까마득했다. 내가 지금껏 걸어온 건 망망대해위를 걸어온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은 그렇게 연이어 끝없이 이어졌다. 백암봉에 도착하니 운무가 제법 물방울되어 내 옷깃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뭇생명들 원천인. 드디어 비가 우리를 환영한다. 우린 우비를 걸쳐입고 또 빼재를 향한다.
계속해서, 플랫폼의 좌충우돌 백두대간 마루금 산행 도전기 12화가 발행될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