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산행
올라보니 그곳이 비로소 비로자나불의 세상이었다. 눈과 바람과 빛과 희망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곳. 그곳 세상에서 먼발치에 펼쳐진 사바세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니 사바의 집들도, 숨을 죽인채 백설에 잠겨있던 논밭들도 희미하게 파노라마되어 펼쳐졌다. 그러다 도솔천 세상이 또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난 한동안 꿈을 꾸고 있었던걸까. 그져 한순간의 꿈에 불과했던 걸까.
밤새 몸을 뒤척였다. 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 베란다 창문을 열어 젖힌다. 범인는 잔인한 바람이었다. 힘잃고 무척 수척해진 바람.
겨울과 봄이 뒤섞인 바람. 그 사이 시원하고 차가워진 공기가 미끄러지듯 집안 가득 점령했다. 순간 물비린내가 고장난 내 후각을 자극하고 케케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여 본다.
회색빛 짙은 도시의 산야에도 밤새 겨울이 다녀간 걸까. 고양이가 떠나간 자리에 새들이 마음껏 지져귀고 있었다. 머얼리 희미하게 보여지는 산야는 온통 백설의 왕국. 무의식적으로 서두른다. 나홀로. 주섬주섬 의장을 갖춰입고 씻는둥 마는둥 먹는둥 마는둥 아지트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간다. 설레임의 고속도로. 따신 커피 빨아대며 룰루랄라다.
겨우 몇 고개 넘었을 뿐이었는데. 벌써부터 파노라믹한 광경들이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고 있었다. 정말 꿈은 아닐테지, 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를 몇 십분. 그렇게 느즈막하게 도착한 청계호수. 수면은 바람에 의해서 미세하게 물결치고 마치 물비늘처럼 햇볕들에 반짝이고 있었다. 마음이 벌써부터 요동쳐오고 애잔해져 온다. 바쁘다. 벌써부터 유체이탈이 시작된듯.
마음은 이미 정상을 향해 달리는 중이지만 육신은 아직 반짝거리는 호수에 머무는 상태. 산과 숲전체가 마치 하얀 붓칠을 해놓은 듯 온통 백설로 가득하다. 이럴땐 어린왕자의 마음이라도 되어 직접 뽀송뽀송한 산길을 걸어봐야하지 않을까. 주차장에 애마를 곱게 파킹하고 이내 들머리로 향한다. 호숫가 급경사 데크바닥길은 아직 빙판으로 가득. 몇 걸음 걷기도 전인데 길섶 한켠에 있던 찻집에 고드름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중.
주인장이 출타한 틈을 이용 은근슬쩍 온집을 점령해 버린 모양이다. 하늘은 뭉게구름 호위받아 이쁘게 피어있었다. 밤새 눈이 얼마나 퍼부었던 건지 요지경 세상으로 보였다. 내가 밤새 꿈나라를 헤매는 사이 시나브로 알쏭달쏭한 딴 세상이 되어 있었다. 여름내내 푸르름을 뽐내던 나목들. 불과 얼마전 힘들게 이파리를 모두 벗어 버렸었는 데 금새 다른 옷들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이채롭다.
수정고드름이 했볕에 반짝반짝 윤기가 났다. 그리고 심한 된비알 오름이 펼쳐지고 있는 산길. 등로는 하얗게 뒤덮혀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숲인지 도저히 분간하기 조차 어렵다.
그 흔한 참새 발자국, 노루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길. 눈이 멈춰버린 숲속엔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고 우리의 영혼은 자유롭고 아름답게 그냥 무심히 흘러갈 뿐이었다.
그 길을 홀로 개척하며 무심으로 오른다. 유유자적 두발이 자꾸 헛딛기를 반복한다. 이러다간. 그럼 작전을 바꾸어봐야지. 아이젠도 하나 꺼내 장착하고 스틱도 펼쳐든다. 진즉 설계변경할걸 그랬었나 싶어진다. 여름내내 찬란했던 가지마다 파릇파릇한 잎사귀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상황. 어느새 앙상한 가지마다 눈송이들이 대롱대롱 피어있었다.
눈꽃이었다. 세상에 3월에 눈꽃이라니. 내가 동안 그토록 애절하게 보고 싶어했던.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는 완벽한 나목의 상태였는데. 그리고, 더이상 엄동설한 바람따위에 흔들리지 않아도 되었었는데. 이젠 입장이 바뀌었나 보다. 소소한 바람에도 자꾸 흔들거린다. 나무들은 이제 걱정 끝이다 라고 환호성을 외쳤을 텐데.
이젠 눈꽃들이 달라붙어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이래저래 나무들은 피해자 코스프레. 그냥 순응하며 묵묵히 이 자릴 지켜내는 수밖에 없는 건지. 망부석처럼 말이다. 이것이 태생적으로 움직일수 없게 설계되어진 나무들의 운명인걸까. 바람에 잠깐 흔들릴수는 있지만 뿌리채 흔들리지 않을거라는 강인함이 물씬 묻어난다. 겨울나무는 그 자릴 이렇게 묵묵히 지켜내고 있었다.
자연은 이렇게 늘 열쒸미 제 할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안테나가 무감각하여 느끼지 못하였을 뿐. 그 가득하던 번뇌들 모두 벗어버리고 우리에게 무한기쁨들을 안겨주고 있었으니.
한폭의 산수화다. 정상은 까마득한데 여전히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어디가 신선계인지 어디가 인간세상인지 경계마져 모호한 상황. 가지가지마다 주렁주렁 마치 사랑이 걸려있는 듯 보였다.
행복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오르는중 어느 산객을 만났다. 홀로 산객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사와 동시에 서로 한팀이 되었다.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하는 물리적 힘은 없었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였다. 산에 오른다는 공감대. 산객들의 마음은 늘 한결같았다. 출신성분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오늘 초면인데 마치 친구라도 되는것처럼 함께 소통하며 함께 걷고 있었으니. 어디사는지 나이는 어찌되는지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이게 바로 산의 힘이자 자연의 가르침이었다. 같은 마음으로 오르는 자들의 동병상련이랄까. 설경은 점차로 바람타고 구름따라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명경을 보며 인증샷 하나없이 그냥 갈순없는 일. 이 모습보려고 밤새 무서리만 내리고 내겐 잠도오지 않고 꿈속을 헤매였나 싶었다. 우리 둘은 파이팅을 연신 외쳐댔다. 무심코 한마음이 되었다.
눈이 그쳐버린 능선. 칼바람만이 내 두뺨을 때리고 있었다. 우린 산행내내 늘 같은 마음이었다. 이런날엔 먼곳에 있는 님에게 사랑이 묻어나는 편지 라도 한통 써보아야 하지 않을지. 모든게 파라다이스로 보였다. 우리들만의 낙원을 꿈꾸며 걷고 또 걸었다. 그 길은 어지로운 마음을 내려놓을 만큼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사랑스러웠다. 행복을 품고 있었다.
이 황홀한 기분 어떻게 표현할수 있을까. 조화로웠다. 인간과 나무와 바람과 구름. 그리고 설경들이 꾸며낸 낙원. 이 조화로움을 어떻게 드러낼수 있을까. 그져 마음깊은 곳에서 감동이 잔물결처럼 곱게 일고 있었다. 숲의 정경이 산의 그리메가 이렇게 아름답고 황홀할수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혹한의 바람이 얼굴을 때려도 우린 전혀 개의치 않았다. 걷는 다는 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일테니까.
배낭을 어깨에 둘러 맬라치면 없던 에너지가 불끈 솟는 느낌이다. 바위들도 이젠 어엿한 새옷으로 갈아입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는 중. 시나브로 화장술로 위장을 하고 있는 중인걸까.
정상엔 내가 보고자하던 주인공은 없었지만 대신 파도에 밀 들어오는 하얀 포말들처럼 잔잔한 감동들은 있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정상에서 두 뺨을 두드리는 잔잔한 바람에 내 온몸 맡기며 유려한 한북정맥의 산그리메를 바라다본다.
바람따라 산줄기들도 이리저리 출렁거린다. 마치 현기증이 일 정도로. 그렇게 2십여분 정상에서의 시간도 종말을 고하고 있는 중. 다시금 떠나야 했다. 정상에서 너무 취하는 건 금물. 이윽고 하늘엔 뭉게구름 제법 많아졌다.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아무말 없다. 그리고 순백의 옷으로 갈아입은 겨울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혼자 시작했던 산행이 어느덧 둘이 되어 걷고 있다니 둘이 만들어내는 설국여행.
마치 난, 멀고 먼 꿈속을 걷고있는 듯 이곳을 서성이고 있었다. 솜털처럼 빈티지한 옷들을 껴입고 있는 나목들과 몸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풀들. 그리고, 집채만한 바위를 완전 점령해버린 순백의 눈꽃들. 우린 솜사탕을 풀어놓은 듯 황홀한 정경에 취해 걸었다. 나무들도 바람에 꽃비내리듯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이내 우리의 마음도 따라 출렁거리고 있었으니.
산은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묘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산은 어머니의 포근함을 닮았는지 맑고 고왔다. 사람뿐아니라 모든 만물을 따뜻이 품어주는 넓은 가슴을 지니고 있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늘 대자연과 숲의 주인공들에게 한발짝 다가서는 일일지도 모른다. 말없이 산길을 걷노라면 마음이 절로 차분해 진다. 이 느낌받으려고 가는게 산행이 아닐까.
놀랍게도 우리 둘은 어느덧 완벽한 원팀이 되어가고 있었다. 같은 꿈을 꾸며 같은 삶을 설계하는 동반자처럼.
왠지 이곳이 낮설어 보였다. 왜일까. 마치 처음 왔던 곳인 것처럼. 수번, 수십번을 오르지만 산은 항상 새롭다. 순백의 결정체들과 산호초를 닮은 듯한 눈꽃들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니. 이내 마음 저려왔다. 추워서 솜털옷을 몇 겹 덧입었나.
벌거벗은 나뭇가지마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눈꽃들.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 널뛰기하고 있었다. 내리막길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미끄러질까봐. 따스한 봄햇볕에 모두 사라져 버릴까봐.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길을 걷다 잠시 멈추고 혼자가 아닌 나 란 노래를 읇조려 보았다.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와도 모진 바람 불어와도
금새 햇살은 비추니까.
혼자가 아닌 나, 정효빈
속세에서의 삶도 늘 이랬다. 뭉게구름 둥둥둥 떠노니는 하늘을 바라 보았다. 나무위에 핀 눈꽃들도 정말 혼자가 아닌것처럼 보였다. 혼자인 삶보다 오늘처럼 더불어 부대끼며 어울려 사는 것임을 산길을 걸으며 터득하게 된것.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내리막이 있어 주었다. 거기다가 산은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산은 자연의 보고이자 오직 약육강식의 서열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발걸음도, 심장박동소리도, 마음까지도 어느새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숲의 본 모습을 최대한 느끼며 걷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아스라이 보여지는 산그리메의 위용들을 조용히 바라 보는것만으로도 마음이 터질듯 부풀어 오른다.
오늘도 걸을 수 있음에 산의 정렬들께 무한 감사드렸다. 숲을 걷고있다는 데 대해 행복한 마음들 가득 했다. 이처럼 걸을수 있다는 건 분명 축복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걷는다는 건 내가 그래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증표임이 틀림없을 테니. 길섶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돌맹이 하나에서부터 잔뜩 웅크리고 있는 풀들. 그리고 나체상태의 나목들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이해하며 걷고자 하였다.
살갖을 에이는 듯 내 두볼을 스치우는 바람의 마음까지도 느껴보고 싶었다. 작금의 우리들 자신이 아닌것들에 삶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겨 버린채 사는게 아닌 피동적으로 살아지고 있는 나.
핸드폰이 없는 삶은 아예 생각할수 조차도 없어져 버린 우리. 어떻게 하면 집나간 마음을 오롯이 회복할 수 있을까. 지금 무심이 걷는 일이 잃어버린 마음을 재차 회복하는 길이기를 바래본다.
마음과 영혼 또한 살리는 길이 되어주길 무심히 걷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미워했던 마음도 서운했던 마음도 따신 봄날에 눈녹듯 녹아들고 있었다. 바위들도 순백의 옷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나목들이 벗어버린 낙엽조차도 모두 제몸을 감추어 버린지 오래. 두근거리는 심장을 제위치로 되돌려 놓아야 하는데 요동쳐오는 가슴을 부여잡아본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오늘 걸었던 길들을 바라보았다. 그져 아스라했다.
내가 지나온 그 길이 맞나 싶었다. 행복을 이어주는 길이지 싶었다. 그리고 순백의 미려한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걸었던 그 길은 온종일 꽃길이었다. 누군가, 순백의 바위위에 아주 절절한 사랑고백을 이렇게 증표로 남겨놓았다. 무슨 애절한 사연이라도 있는 건지. 그 마음 아름다웠다.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행복하냐고 보고싶다고 사랑한다고 쓴 눈물의 러브레터같았다.
그리운 이에게 편지라도 한번 써보고 싶은 마음이 애절해지는 찰나의 순간들이다. 하지만 타오르는 욕망을 억지로 잠재우고 애마가 기다리도 있을 주차장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심장과 가슴이 제 위치를 되찾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침에 삶의 흔적 가득했던 청계호수에도 어느새 하루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두발과 심장의 요동침도 두근거림도 어느새 사라지고 이내 난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아지트로 조용히 향하고 있었다.
몸은 고달픔인데 어느새 울적했더 정신은 기쁨으로 넘치는 상황. 이게 산행이 지닌 매력중 으뜸이 아닐지싶다. 마지막으로 내 행복여행에 특별히 독참해주신 모 산객께도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