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나리 Dec 06. 2023

우리는 서로 도울 것이고, 다들 괜찮을 것이다

미쉘 오바마 <비커밍>에서 건져올린 문장들

안녕하세요 슬님, 


황선우 작가와 김혼비 작가의 서간문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라는 책을 알고 있을테지요. 황선우 작가가 책 출간을 기념한 팟캐스트에서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상대에게 편지가 도착하는 순간부터 답장을 써서 보내는 그 순간까지 대략 한달의 반 정도는 일상을 '편지' 모드로 살게 되었었다고요. 저도 딱 그랬습니다. 새벽 러닝을 하다가도 '슬님..' 하고 마음속으로 불러보고 겨울 아침나절의 낮은 해덕분에 유독 따뜻하게 비춰지는 거실의 햇살을 보면서도 '슬님...' 하고 불러보았지요. 그렇게 수없이 많은 슬님을 부른뒤에야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게 되네요. 


슬님의 치열했던 여름과 가을을 함께 한 책이 '미쉘 오바마'의 책이었다니 분명 좋은 위로와 힘이 되었을거라 생각합니다. 몇해전 우리가 같이 읽었던 그녀의 첫 책 '비커밍'을 기억하나요? 당시 발췌한 문장들을 찾으러 우리가 그때 만들어둔 커뮤니티에 오랜만에 접속을 했어요. (우리 그때 친한 몇몇과 독서모임을 만들어 함께 책을 읽고 나누기도 했었는데 어느새 또 지난 일이 되어있네요. 책을 읽고 여러 문장들을 마음에 담지만 또 금새 흘리곤 하는데 이렇게 남겨 두고 다시 읽을 수 있다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새해에는 느슨하고 느린 독서모임을 이어가자고 제안해야겠다 마음 먹습니다.) 

나는 메리 타일러 무어처럼 적극적으로 세상에 뛰어드는 독립적이고 열정적인 직업인으로 살고 싶었지만, 그러면서도 안정되고 희생적이고 겉보기에는 단조로운 듯 평범한 아내 및 어머니 역할에도 끌렸다. 직장 생활과 가정생활을 둘 다 갖고 싶었지만 어느 쪽이 다른 쪽을 찍어누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 했다. 정확히 어머니처럼 되고 싶으면서도 결코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웠다. 나는 둘 다 가질 수 있을까? 둘 다 갖게 될까? 알 수 없었다. (미쉘 오바마 <비커밍>)

슬님의 지난 계절도 아마 위의 저 문장처럼 일과 가정 또는 일과 나 사이를 줄타기 하듯 오가느라 괴로웠을거라 짐작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일을 하다가 문득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이것이 내가, 우리 가족이, 내 아이가 행복한 길이 맞나?‘ 라는 질문을 자꾸만 하게 되었거든요. 그건 바로 나에게 커리어 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것이 생겨버렸기 때문일 거에요. 이렇게 될 거라곤 엄마가 되기전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커리어와 나(가족)는 양립할 수 없는 걸까요? 저도 요즘 한참 고민이 많습니다. 회복의 시간을 가지며 잠시 '돈벌이'라는 행위로부터 떨어져 있는 지금은 몸과 마음이 아주 건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언젠가 다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면 다시 똑같은 괴로움이 반복되는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잠시 불행을 유예하는 것 뿐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않는가 싶은 마음이 들면 내 삶을 소소하게 가꾸는 운동이나 취미생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고 한없이 부정적이 됩니다. 슬님이 복직을 앞두고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보겠다' 했던 다짐이 이내 무색해 진 것을 옆에서 지켜보니 더 그랬던 것 같아요. 


휴직을 하면서 열었던 문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끝없이 경쟁하고 충고랍시고 평가하는 사람들말고 진정으로 연대하고 서로를 다정하게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런 세상이 있다는 걸 알고도 다시 그 전쟁터로 돌아가게되면 더 괴롭진 않을까 덜컥 겁이 나는 순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배운것중에 가장 깊이 마음에 담아둔 것은 "인생에 빛만 있거나 어둠만 있지는 않다는 걸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겠다'가 아니라 시시때때로 흔들리더라도 다시 중심을 잘 잡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닮고싶은 모습의 사람들을 곁에 두고 비슷한 고민을 하며 고군분투하는 친구와 마음을 나누며 방법을 찾아가야겠다 생각합니다.  

친구들은 모두 공부를 많이 했고, 직업적 야망이 있었고, 아이들에게도 헌신하는 여성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측면들을 하나로 통합할 방법을 몰라서 난감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략) 그 친구들과 함께 보낸 시간 덕분에, 나는 어머니가 되는 일에는 정해진 공식이 없다는 걸 깨우쳤다. 무조건 옳거나 그른 방식이란 없었다. 이것은 유용한 깨달음이었다. 놀이방을 메운 우리 아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왜 그렇게 키우느냐와 무관하게 모두 사랑받았고, 무탈하게 크고 있었다. 우리가 한자리에 모일 때마다, 자식을 잘 키우려고 애쓰는 여자들의 집단적인 힘이 느껴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서로 도울 것이고, 다들 괜찮을 것이다. (미쉘 오바마 <비커밍>)


한가지 고백을 하자면 슬님의 전시에 갔던 날, 그간의 고생과 괴로움보다 슬님이 이룬 크고 화려한 성취가 가장 먼저 눈에 보였습니다. 나는 그대로 멈추어 있는데 슬님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는 것 같단 생각이 들면서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졌습니다.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가까운 친구의 성취도 오롯이 깨끗한 마음으로 축하해 줄 수 없는 나 자신이 한없이 못나게 느껴졌어요. 불안과 자책때문에 바닥으로 가라앉는 나를 끌어올려준 건 "Run your run" 이라는 마라톤 슬로건이었어요. 각자의 속도대로 자신만의 달리기를 하라는 의미인데요. 그 짧은 문장이 저를 구원했습니다. 그간 사회가 정한 속도, 타인과의 빠르기를 늘 비교하며 달리던 삶을 멈추겠다고 다짐해 놓고도 순간의 불안과 초조 때문에 또 길을 잃을 뻔 했지 뭐에요. 


우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순간에도 무엇인가 잡고 제자리에 다시 설 수 있다는 것을 믿어봅시다. 읽고 있던 책에서 만난 문장이, 속깊은 지인의 다정한 응원이, 서로의 편지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줄거라 기대하며 좋은 문장을 꾸준히 모으고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어요. 어둠이 있으면 또 언젠가 빛이 있다고 믿기만 해도 정말 최악은 아니지 않나요.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서로 도울 것이고, 다들 괜찮을 겁니다. 




뮈르달 겨울 컬렉션  '빛'이라는 테마에 맞게 슬님이 선정한 책들과 함께 놓이면 좋겠다 싶은 소설책 몇권을 골라봤어요. 겨울에는 뭐니뭐니해도 문학이지 않을까 싶어서. (제안하건대, 우리가 이 겨울에 나눈 미쉘 오바마의 책 두권도 꼭 컬렉션에 함께 놓아주세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단편)

<프리즘> 손원평 (장편)

<눈부신 안부> 백수린 (장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단편)




슬님, 언젠가 우리를 구할 문장을 야금야금 마음에 담는 겨울 되시길 바래요.  

미나리가.  

 

매거진의 이전글 어둡지만 빛나는 겨울밤을 기다리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