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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Nov 30. 2020

좋은 게 다 좋은 건 아니야

당신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당신을 더 좋아합니다.

반려견 보리를 데리고 멀리까지 나가 3시간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날이었다. 날씨도 좋았고, 보리의 컨디션도 좋았다. 들판을 질주하던 보리가 뒤를 돌아보며 맑은 웃음을 보여줄 때마다 내 마음에도 행복이 가득 들어찼다. 나, 잘하고 있구나. 내 소중한 존재가 나로 인해 즐거워하고 있구나. 뿌듯한 마음에 멀리 달아나는 보리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조금 훌쩍이기도 했다. 마주 보고 걸어오는 다른 행인들이 보리를 보며 '아이구, 신났네', '너 기분 좋구나' 말할 땐 내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뛰어가고 있을까, 내내 궁금해하며 길고 긴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아오는 길, 엄마의 무릎에 누워 꾸벅꾸벅 졸던 보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깊게 들었다. 꿈에서까지 잔디밭을 질주 중인지 열심히 발을 구르고, 친구라도 만났는지 입도 좀 벙긋거렸다. 저녁 즈음 퇴근한 동생이 몇 시간을 내리 잠만 자는 보리를 발견하고 말했다.


"다리도 안 좋은데 저렇게 뻗을 정도로 오래 산책을 시키면 어떡해?"


보리는 올해로 아홉 살에 돌입한 중년 강아지로, 호기심으로 중무장한 유년기와 넘치는 체력의 청년기를 지나 이제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인생의 시기를 먼저 살아가고 있었다. 동생의 말이 맞았다. 보리는 푸들의 고질병이라는 슬개골 탈구를 앓고 있었고, 매일의 산책으로 기른 다릿심으로 수술을 하지 않고 겨우 버텨내는 중이었다. 산책을 나가면 무척 신나 하기도 하고, 성격이 급해 걷지 않고 곧잘 뛰는 데다가 흥분하면 로켓처럼 발사되어 날아다니기도 했기 때문에 엄마와 나는 멀리까지 보리를 데리고 나가 실컷 놀게 해 주며 그 모습을 보는 데서 행복을 느꼈다. 산책을 하면서 보여주는 보리의 표정은 반짝반짝 빛났다. 새로운 곳을 가거나 아무도 없는 풀밭에 풀어둘 때면 꺄르르 웃는 모습에 내 마음이 다 충만해져서, 그 기쁨을 누리려고 보리를 태우고 여기저기로 놀러 다니며 욕심을 채웠다. 실컷 뛰어논 보리가 쉬고 싶다는 제스처를 보이거나 다리가 아파 보이면 그때 보리를 안아 올려 잠깐 쉬거나 산책을 마무리하곤 했는데 동생은 바로 그걸 걱정했다. 가뜩이나 다리가 안 좋은 애를 무리시킨다는 거였다.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보리가 엄청 좋아하는데. 진짜 행복해하는데? 네가 보리를 데리고 멀리까지 산책을 안 가봐서 그래, 그 표정을 못 봐서 그래, 얼마나 행복해하는데, 반문하자 동생이 어이가 없다는 듯 답했다.


"내가 술을 좋아한다고 매일 술을 처먹어도 되는 건 아니잖아?"


엄마와 나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다는 관용어구를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은 느낌과 동시에 '내 동생 천잰데, 말을 왜 이렇게 잘해?' 놀리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그러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데. 그 생각을 왜 못 했을까.


나만 해도 운동을 좋아한다고 하루에 3시간씩 오버해서 운동을 할 땐 무릎이 안 좋았다. 술이나 담배, 게임, 도박처럼 과하면 인생을 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몸에 좋은 건데, 내가 좋아하는 건데 거기에 좀 미쳐있다고 문제 될 게 있나, 싶었지만 과연 문제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뭐든지 적당한 게 좋다고, 지나치면 안 된다는 말을 했던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구나. 가벼운 대화에서 얻은 깨달음이 컸다.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한참을 생각했다. 좋은 게 다 좋은 건 아니었어. 난 그걸 빡하고 보리를 키웠구나.


보리와 함께하는 산책이 너무 행복해서 산책이 객관적으로 보리한테 해로운 것도 아닌데, 좀 과하면 어떻다고 그래, 우기고 싶었지만 과유불급이란 말은 보리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을 거였다. 행복해서 웃고 뛰어도 나중엔 안아달라고 보챘다. 력적으로 힘들어요, 이제 지쳤어요, 좀 안아주세요, 그런 말이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아쉽게도 보리의 진짜 속뜻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평소에는 조금만 안고 걸어도 내려달라고 몸을 뒤트는 아이가 긴 산책 끝에는 차로 돌아가는 길까지 내내 안고 걸어도 별다른 반응 없이 얌전히 안겨 있었다는 것으로 그녀의 고단함이나 불편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


내가 좋아하는 걸 과하게 하지 않는 건 조금만 애쓰고 신경 쓰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좀 더 누워있고 싶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지만 일어나고, 좀 더 놀고 싶지만 적당히 즐기다 집에 가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자주 과식을 하거나 운동을 미친 듯이 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게 몸에 좋지 않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다 지나간 일로 만들었다. 그런데 보리에겐 그게 참 어려웠다. 간식을 많이 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보리가 와서 애교를 부릴 때면 아이고 예뻐, 감탄을 연발하며 간식을 줬고 산책하며 꺄르르 웃는 모습에 뛰면 안 되는 보리를 데리고 들판을 질주했다. 좋아도 하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 적당히 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서 평생 모를 아이였다. 말을 할 수 없으니까 내가 하는 행동들이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좋다고 다 해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좋아한다고 다 들어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생각해보면 오래전부터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약했다. 어릴 적에는 아빠의 생일 선물로 재떨이를 줬던 적이 있었을 만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계속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학창 시절엔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게임을 하거나 잠을 자는 친구들이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다들 그런다고 그들을 다독였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는 감당하지 못할 가격의 가방을 사고파 하는 친구에게 네가 그렇게 사고 싶으면 사야지, 돈이야 벌면 되니까, 하고 용기를 북돋워줬다.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데 오늘은 진짜 치킨을 먹고 싶다고 말하는 동생에게는 늘 먹고 싶을 때 먹으라고 말하며 치킨을 시켜주기까지 했다. 나중을 생각하지 않고 듣고 싶은 말만 해주려고 한 건 맹세코 아니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행복하기만 했으면 하고 바랐던 마음이 다였다. 하고 싶은 걸 못하는 건 너무 속상하니까. 절제하며 산다는 건 괴로운 일이니까. 그게 그렇게 해로운 것도 아닌데, 몸이나 인생을 망칠 정도도 아닌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큼은 하고 싶은 건 그냥 하고 살 수 있었으면 했다. 내 응원이나 위로, 조언이야 말뿐이고 선택은 그들이 하는 거라지만 아마 이런 나의 태도가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정 부분 약한 독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또 보리에게 행복한 순간이 더 많았으면 하는 마음. 런 따스한 마음으로 했던 말과 행동이 조금쯤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살짝 마음이 아팠다. 듣기 쓴소리를 하고 싶지 않고 악역이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이기심을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하는 말로 포장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뜨끔하기도 했다 (정말 그런 마음은 아니었지만). 가족으로서, 친구로서 해줘야 하는 말 대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당장 원하는 걸 하지 못해서 느낄 괴로움을 나중으로 미루는 데 일조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래. 술을 좋아하는 동생에게 과음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보리의 산책도 조절해 줄 필요가 있겠군. 좋은 거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니까.


보리를 포함한 가족들에게는 정도를 넘어갈 때 살짝 브레이크를 걸어줘야겠다는 결심이 섰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고파 하는 것에 대해서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해야 할 때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여전히 고민이 되고 망설여진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염려한다는 이유로 당신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 사실 지금까지 절대로 해선 안 될 것 같거나 차후가 심히 염려되는 일은 없었기도 하고, 그런 것들까지도 결국은 본인의 선택이니 나는 응원을 할 수밖에 없는 위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진짜 친구라면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하고픈 건 좀 하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는 걸.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는 내 마음이 그런 걸. 그래도 정말 아닌 것 같은 순간이 오면 그때는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당신을 더 좋아합니다.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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