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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Dec 15. 2020

'유명해지기 위한 경쟁'에 참가하려 합니다

자존심을 부리느라 좀 늦었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요즘 글을 쓰고 있다고 고백했다. 장류진 작가가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의 후기에서 소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동안 스스로에게  '네가 무슨 소설을 써? 소설 쓰고 있네'라고 속삭였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도 스스로 '나 따위가 무슨 글을..'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내 주제에 글을 쓴다고 하는 게 남들에게 우스워보이지는 않을지, 현실적이지 못하게 꿈만 좇는다고 한심한 취급을 당하지는 않을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자리에 있던 친구들 모두가 드디어 도전을 시작한 거냐며 축하해주고 응원해주었다. 큰 맘 먹고 고백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주 잠깐, 이어진 '어떤 글을 쓰고 있냐'는 물음에 나는 금방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 글의 정체성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아니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나조차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은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줄곧 나를 따라다니던 고민과 같았다. 나는 수필을 사랑하고, 에세이를 써서 책을 내고 싶었지만 나처럼 특별할 것 없는 사람의 이야기는 책이 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수필집을 내고 싶다는 이야기는 목구멍으로 삼키고, '그냥  얘기를 쓰고 싶긴 한데, 아직 책 한 권으로 묶일 정도의 분량을 써낼 수 있는 주제를 못 찾았어.'라고 어물쩍거리며 대답했다. 친구는 '하긴, 에세이는 그 사람의 삶이 궁금해졌을 때야 읽고 싶어 지는 거니까. 유명해진 다음에 쓰는 게 경우가 많지.' 하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나는 모임 내내 내 어깨를 짓누르던 그 위로를 떨쳐내지 못하고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왔다. 과연 그랬다. 작가의 일상생활이 궁금할 때야 겨우 손에 들어보는 것이 수필집이었다.


요즘에야 다양한 주제의 수필집이 인기를 얻고 있고, 독립출판 등으로 개인이 책을 내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명 작가나 유명인들의 책이 에세이 코너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배우나 방송인의 경우 책을 내는 것도, 출간 이후 여러 행사 등으로 관심을 끄는 것도 훨씬 쉬웠으므로 한때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들은 유명해지기 위해 나보다 더 열심히 살았겠지, 그러니까 더 많은 기회를 누리는 거겠지. 유명인의 이야기라는 점도 잘 쓴 글처럼 하나의 셀링 포인트인 거야. 런 사람들을 보며 불평하는 건 네 모습에 대한 핑계일 뿐이야. 혼잣말을 되뇌며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려 노력했지만 자격지심은 계속 내 마음을 괴롭혔다.


성공을 하려면 일단 유명해지라는 말도 있듯, 유명세가 금전적 보상이나 기회를 보증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세대로 살아가며 많은 팔로워가 더 많은 팔로워를 부르고, 많은 좋아요가 더 많은 좋아요와 관심을 부른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다만 나는 무리해서까지 유명해지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가 않았다. 글로, 삶으로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남의 관심을 받는 것에 아무 욕심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거기에 그렇게까지 목을 매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삶은 속수무책으로 엉망이면서 정갈히 정돈된 모습을 꾸며고, 해시태그라는 씨앗을 심 게시물들을 식물 기르듯 가지치기해가며 SNS를 꿔야 하는 그 경쟁이 내겐 진흙탕 싸움처럼 보였다. 솔직함도 잘 갈고닦아 멋들어진 형태로 내보여야 하고, 누군가의 이상향처럼 보이기 위해 부자가 아니라도 부자인 척을 해야 하다니. 굳이 그렇게까지 해가며 이목을 끌어야 하는 걸까. 게다가 그 경쟁에서 뒤처지면 얻을 수 있는 건 냉소도, 멸시도 아닌 무관심뿐인데. 명세를 얻기 위한 노력이 부질없고 무가치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싫었다. 그렇게까지 하며 내 글을 보아달라고 외쳐야 하는 것이.


나는 나 스스로의 인간적인 매력에 대해서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타인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남을 웃기거나 즐겁게 해주는 데 자신이 있었고, 내향적인 성격에도 은근히 친구가 많은 스타일이었고, 모임에선 은은한 농담으로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다. 취업 준비생일 땐 실무진 면접에서 몇 번 탈락한 적이 있었으나 내가 살아온 삶과 내 가치관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임원 면접이나 최종 면접에서는 단연코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주변의 친구들은 언제나 내 이야기를 궁금해했고, 러 곳에 짧은 소설을 연재하며 스스로 만족할만한 관심을 받기도 했다. 나는 그런 나와 내 글을 믿었다. 자연스러운 나를 보여주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적어나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면을 더 다채롭게 만들고, 그걸 잘 표현할 수 있도록 꾸준히 글 쓰는 걸 연습하면 언젠가는 내 글이 많은 사람에게 가 닿을 거라고 자신했다. 어쩌면, 나는 나를 과신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해시태그 같은 건 달아본 적이 없고, 다른 사람을 태그 하는 일도 거의 없는 내 SNS를 둘러보는 건 거의 나를 실제로 알고 있는 지인들뿐이다. 유명인과 닿고 싶은 마음도, 유명인처럼 되고픈 마음도 없어 담담히 일기장처럼 꾸려오던 내 SNS를 돌아보며 문득 '유명해지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지 않았던 건 내 노력 부족이 아닐까 의심하게 됐다. 나는 관심을 받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길 바랐다. 꾸준히 쓰는 것만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그 외의 것들은 노력 옆에 붙은 군더더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실을 다지는 데만 힘을 쏟겠다는 건 일종의 자만에 가까웠다. '브랜딩'이 각광을 받는, 보이는 것이 중요한 세계에서 보이는 삶을 열심히 가꾸고 돌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던 건 과욕이었다. 유명세를 향한 경쟁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건 진흙탕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아니라 운동화 끈을 꽉 묶고 쉬지 않고 뛰고 있는 마라토너들이었다. 그들은 단단히 내실을 다시는 동시에 세상에 그들의 이야기를 펴 나가고 있었고, 나는 편견에 가득 차 그들을 폄하하기 바빴던 모자란 인간일 뿐이었다.


오래도록 글쓰기를 동경해온 내게는 '글을 쓴다'는 행위가 너무 숭고하고 고결하게 느껴졌다. 글을 쓴다는 건 그것 자체로 아름다운 거야, 그걸로 무언가를 욕망해서는 안돼.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누구도 그렇게 일러주지 않았음에도 나는 착각에 빠져 성스러운 글쓰기 옆에 다른 것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글쓰기는 세속적이어선 안돼. 쓴다는 행위 그 하나로 온전해야 해. 글을 써서 얻은 인기로 자신을 채워서는 안돼. 억지로 타인의 관심을 끌어서도 안돼. 나는 수많은 금기로 기둥을 세운 감옥에 내 글을 가두었다.


눈 앞에 너무 많은 정보가 펼쳐지는 시대다. 휴대폰만 들면 내 앞에 여기를 좀 봐달라며 외치는 콘텐츠들이 즐비해 있다. 그중 몇을 골라 확인하는 것도 피곤한데, 굳이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나도 두 손을 높이 들고 이쪽을 좀 쳐다봐 달라고 소리쳐 외치는 것이 맞다. 바쁘시겠지만 제 얘기도 좀 들어봐 달라고, 시간이 아깝지 않을 거라고 외쳐야 한다. 목소리를 듣고 내 글을 찾아온 독자를 재미로, 필력으로 매료시키고 다시 나를 찾게 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들 아는 이 명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상한 자존심을 부리고 있었던 바보였다.


글만 써서 책을 낼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작가였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매일 쓰고 퇴고하여도 부족한 글을 발행하는 초심자다. 다른 이들이 나를 알아차릴 수 있게 목소리를 내는 것이 영 어색해, 꾸준히 내면을 갈고닦고 꾸준히 쓰는 것만으로 나와 내 글을 알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쉬이 놓을 수 없으면서도 그게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역시 잘 알고 있다. 욕심이 나는 만큼의 노력도 하지 않는 건 시간을 버리는 게으른 짓이다. 어떤 키워드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내가 연상되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렇게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해보고 싶다. 잘 될지 그렇지 않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부딪혀보고 싶다. 어렵게 시작한 도전에 아쉬움을 남기는 건 슬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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