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는 성격적으로 잘 맞는 편은 아니었다. 분명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하나가 하나의 뱃속에서 나와 이 이상으로 가까울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와 엄마 사이에도 쉽게 메울 수 없는 큰 간극이 있었다. 나는 이상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싫으면 싫다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속이 풀렸다. 문제가 있다면 그게 어느 때든, 무엇이든 간에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힘들 땐 힘들다고, 속상할 땐 속상하다고 자신을 괴롭게 한 대상에게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푸념을 늘어놓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와 나, 다른 가족들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는 대신 몇 달 동안 그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으로 상황을 회피했다. 어린 나는 그게 싫었다. 엄마가 내게 마음이 상한 날이면 가족 모두가 문을 쾅쾅 닫고 쿵쾅거리며 걸어 다니는 엄마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내게 화가 나면 나에게만 말을 걸지 않고 다른 가족들에게 다정하게 말하는 엄마의 모습을 꾹 참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냥 얘기를 하고 말지, 말을 해서 풀고 말지 왜 저럴까, 무척 답답하게 생각했다.
엄마가 유독 나에게만 매몰찼던 건 아니었지만, 특히 나와 날을 세우는 일이 많았던 건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받은 날이면 엄마는 그 사람에게 무어라 이야기하는 대신 가족들에게 그 사람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지금이야 그런 이야기를 들어주고 엄마의 일기장이 되어주는 것이 가족으로서 내가 해야 할 몫 중 일부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린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가 밖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가 정말 싫어하는 엄마의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화가 날 때가 많았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별 것 아닌 일을 과장해서 해석하고 기분 나빠하는 엄마의 모습이 집에서 내게 작은 일로 화를 내는 모습과 겹쳐 보여 짜증이 나기도 했다. 엄마의 푸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지 못했던 내게 엄마는 착한 동생과 달리 너는 싸가지가 없다며 큰 소리를 치고 나를 나무랐다. 여유가 없어 모든 상황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엄마의 편이 되어줬으면 좋았겠지만 그때의 나는 나대로 시비(是非)에 민감하고 사고가 유연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울고 싶은 엄마와 엄마가 강해졌으면 했던 나는 자주 부딪혔다.
그래서였을까. 한때 나는 엄마가 나를 미워한다고 느끼기도 했다. 어쩌면 그게 착각이 아니고, 진짜로 엄마가 나를 미워했던 순간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배운 것을 자랑하고 칭찬받고 싶어 엄마에게 그날 알게 된 것을 늘어놓을 때면 엄마는 어린 게 벌써 잘난 체를 한다며 엄마를 무시한다고 내게 화를 냈다. 내가 꿈이 생겼다고 말하는 날엔 그게 무엇이든 '네가? 너보다 잘난 사람이 세상에 수도 없이 많아' 하며 내 기를 꺾어놓기도 했다. 내가 엄마를 이해해주지 못했던 만큼 엄마는 내게 거리를 뒀다. 내게 엄마는 좀처럼 기대기 힘든, 내가 조금만 실수해도 부서져버리곤 하는 스티로폼 같은 벽처럼 느껴졌다.
엄마를 정말 좋아했고 지금도 여전히 엄마를 너무 사랑하지만 그만큼 엄마에게 상처를 받았던 적이 많았다. 아마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엄마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라는 말로 모든 걸 엄마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엄마 배에서 나왔지만 엄마와는 너무 달랐다. 어린 시절 나는 나를 낳고 키운 사람이 나와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고, 엄마는 자신이 시간과 정성을 쏟아 키운 사람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나이 서른이 가까워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 차이가 우리 관계의 본질이었다. 나는 가정 밖에서 만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애쓴 만큼 엄마를 받아들이려 노력한 끝에 엄마를 알게 됐다. 엄마는 나와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는 너무나 달랐고, 어느 순간 서로가 미웠던 적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분명 나를 사랑했다. 엄마는 내가 친구들과 싸우고 돌아온 날 이미 덩치가 산만해진 나를 끌어안고 같이 울고 분노했다. 수능날엔세 자식의 것 중 유일하게 보관 중이던 내 배냇저고리를 예쁘게 접어 내 후드 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했다. 내가 우울증을 앓으며 죽을 것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땐 언제나 내 편이 되어 내 옆에 있어주었다. 그리고 엄마는 사는 내내 "'첫째'모 삼천지교"를 실현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빠의 전배로 이사가 잦았다. 내가 태어난 역곡, 창원, 광명을 거쳐 인천에 자리를 잡았던 우리 가족은 교육을 위해 안양 평촌으로 다시 한번 이사를 했다. 내가 조금 뛰어난 것 같다며 교육에 투자를 해야겠다는 주변의 조언 때문이었다. 평촌에서 초, 중학교 시절을 보낸 나는 서울의 한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다. 엄마는 다시 한번, 내가 다니게 될 학교 바로 건너편의 아파트로 과감히 이사를 결심했다. 그때 나와 두 살, 네 살 터울의 동생들은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막 친구들을 사귀고 추억을 쌓으며 교우관계를 단단히 다져가야 할 때에 동생들은 나 때문에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됐다. 친구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가 되는 것이 가장 힘들고 두려운 일인 시기를 지나고 있는 동생들에게, 엄마는 나를 혼자 서울로 보낼 수는 없다며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이사를 못 박았다. 어리고 착한 내 동생들은 친구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에 많이 울었다.
다음번 이사는 남동생까지 모두 대학에 진학한 후였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서울의 오른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기에 나나 동생들이 다니는 대학교와는 거리가 꽤 멀었고, 나와 여동생은 왕복 3시간의 통학 거리를 버텨내고 있던 중이었다. 곧 졸업할 나는 제외하고, 동생들의 학교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지만 거기서도 오래 살지는 못했다. 내가 통근이 오래 걸리는 회사에 합격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가장 시간이 적게 걸리는 셔틀버스를 탈 수 있는 곳 근처로 다시 이사했다. 서울 중심부라서 동생들의 학교나 직장과도 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가장 이득을 본 건 나였다. 게다가 몇 달 다니지 않아 서울에 있는 캠퍼스로 전배를 가게 되어 통근은 더 쉬워졌다. 결혼을 하면서 친정을 떠나게 될 줄 알았던 나는 친정 바로 옆 동에 자리를 잡았고, 엄마는 집을 줄이려 이사를 고민하면서도 이제 곧 아이를 키울지도 모르는 내 걱정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 '네가 강아지랑 떨어져서 어떻게 살래, 네가 엄마 도움 없이 애를 어떻게 키워, 엄마가 그냥 너네 동으로 이사 갈까 봐' 하면서.
어쩌면 나를 위한 지원들이 엄마가 보여줄 수 있는 나에 대한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살아내느라, 자라느라 끊임없이 부대끼면서도 엄마는 나와 동생들에게 기회를 내주었다. 더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기회. 덜 지칠 기회. 더 성장할 기회. 모든 것에 서툴었던 엄마와 함께 자라나야 했던 첫째였지만, 그덕에 동생들보다 조금 더 많은 기회를 얻었다. 엄마는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내가 좀 더 멋진 사람이 되는 데에,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데에, 좀 더 편하게 살아가는 데에, 다시 말해 내가 엄마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에 좀 더 가까워지는 데에 엄마의 열정을 퍼부었다. 나는 동생들보다 훨씬 많은 학원을 다녔고, 다양한 취미를 경험했다. 그건 내가 엄마가 사랑하는 첫째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엄마는 첫째의 앞에 수많은 기회를 깔아주었다.
나는 엄마가 내 앞에 쌓아준 그 기회들 중 몇 개를 골라잡아 지금의 내가 되었다. 예전에 어느 시인이 '주제보다 많이 배운 것이 내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열심히 공부한 만큼, 배우고 익힌 만큼 지금 내가 더 행복해졌는지는 모르겠다.다만, 엄마가 내게 가져다주었던 기회들이 나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삶이 괴롭고 어려운 와중에도 엄마는 내게 많은 것을 해주려고 노력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가족들을 위해 잦은 이사를 다니면서 엄마는 많은 것을 잃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본인을 위해서 이사한 적은 없으니, 그녀가 30년의 세월을 거치며 잃은 것들에 대해서 감히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 준비하며 나도 누군가를 위해 내 것을 내놓아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내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을 결심하고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아이를 셋이나 낳고,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은 엄마가 그 삶을 지탱하며 보여준 태도 덕분이었다. 엄마는 거친 삶에 지쳐 때로 내게 가혹했지만 자신의 평안을 포기하고 자식들에게 기회를 주는 데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그녀가 우리에게 내어준 것이 얼마만큼의 사랑이었는지 생각해본다. 그걸 곱씹고 곱씹을수록, 엄마를 더 사랑하게 된다.
*: 정확한 어구를 찾아 적고 싶은데, 뉘앙스만 기억에 가물가물 하게 남아있어 검색에 실패하였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은 제보 부탁드립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