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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Feb 13. 2021

퇴사를 저질렀다

2021년 2월. 난생처음으로 뭔가를 '저질러' 봤다.

만으로 6년 하고도 한 달 그리고 8일을 더 다닌 회사를 떠난다.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도 아니면서 막상 퇴사를 눈앞에 두니 심리적 여유가 전혀 없고 잡생각만 들어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유치원에 입학하고 나서 처음으로 소속이 없는 상태에 놓인 게 아닌가 싶다. 대책 없는 말괄량이로 사는 척하면서도 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는 대학을, 대학의 문을 나오면서는 회사를 정해두고 곧장 다음 할 일과 목표들을 연결하며 살아왔다. 이후의 삶을 계획하고 그에 맞춰 시간을 일구며 사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완전히 자유로워진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이 얼떨떨함은 이상한 게 아니라 해방감이나 아쉬움 같은 것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감정일지 모른다. 어색하고 불편한 게 당연한 낯선 감정이 마음에 들어찬다. 처음으로 전혀 준비하지 않은 길에 들어선다. 저질렀다. 진짜로,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한 건 꽤 오래되었다. 처우에 불만족하거나 하는 일에 싫증을 느낀 건 아니었고,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하고픈 일이 늘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그 일을 하지 않고 사는 나의 삶이 초라해 보이고 안타까워서 스스로를 연민할 지경으로 나를 갉아먹는 꿈을 꾸었다. 여러 해 동안 많은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긴 시간 주변인들을 괴롭힌 뒤에야 나의 결단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곁에서 답이 없는 나의 푸념과 자조를 묵묵히 들어준 가족과 친구들에게 고맙다.

인생 2막이나 새 출발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조금 부끄럽다. 아주 오래전에 시작한 일을 막연함이 아닌 구체적이고 선연한 무언가로 채워 넣으려 할 뿐,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조금도 없다. 그래도 나의 '다음'을 응원하며 기운을 북돋워 준 여러 사람들에게 고맙다. 생각지도 못한 축하와 격려를 전해 받았다. 이런 변화를 질러갈 때에나 내가 꽤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구나, 생각하게 되는 게 민망할 따름이다. 받은 것에 그 어떤 조금이라도 더 얹어서 돌려주고 싶다. 이런 마음이 지지 않도록 잘 보관해야 함을 알고 있다.

책임감으로 서로를 붙들겠다는 약속을 뒤로하고 욕심으로 가는 발걸음을 응원해준 남편에게 가장 고맙다. 이상주의자인 나를 현실에 발 붙이게 하느라 애쓰고 또 애쓰는 것을 안다. 헬륨가스가 든 풍선처럼 날아다니다 터질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최대한 자유로웠으면 하는 다정한 손길로 내가 매달린 줄 끝을 살짝 붙들고 선 남편의 모습을 본다. 그에게 언젠가는 이 고마움을 모두 갚겠다고, 당신이 내게 준 모든 걸 꼭 갚고야 말겠다고 약속한다.

마지막 퇴근을 하고는 곧장 서점으로 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지도 위를 직접 짚어보고 싶다. 지도 위에 항로를 그린다. 수천 번 흔들리며 몇 번이고 수정될 항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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