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주요 미디어에서도 retirement/퇴직* 준비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부동산, 재무자산, 여행 등에 대한 홍보성 기사는 있는 편이지만, 감정적/정서적 측면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내용은 최근에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재무자산의 규모를 퇴직 준비의 완성이라고 보는 시각이 훨씬 뚜렷하고요. 그러나 제가 지난 10개월 간 만나 뵈었던 임원 이상 직급(약 100인)의 대부분은 재무적인 고충보다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어려움을 굉장히 크게 느끼고 계셨습니다.
"임원으로 퇴직한 만큼 '먹고 살 걱정'은 없지 않느냐"라는 주변의 인식 때문에 본인의 심리 상태를 잘 내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생활 시작 후 인생 최대의 위기라 할 수 있는 갑작스러운 경력 단절 상황에서 분노, 포기, 극도의 우울감 등 복합 정서를 드러내십니다. 그동안 극심한 경쟁 속에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할 기회가 없었기에 그러한 다양하고 복합적인 정서가 맥락 없이 튀어나오기도 하여, 스스로도 당혹해하시는 경우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정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막강했던 조직 내 영향력이 현실에서 더 이상 발휘되지 못한다는 '통제력 상실'의 인식, 그리고 이로 인한 분노와 실망감이 심리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무적인 준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냐, 혹은 재무적인 준비조차 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는 반론은 여기서 논외로 하겠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임에는 분명합니다. 다만, 갑작스러운 퇴직이 한 개인의 정서적 측면에 미치는 영향은 타인으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극도의 충격이라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일상 회복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은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평균 3~4년, 리더 직급의 경우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연구가 있고, 제가 뵈었던 분들 중에서도 십 년 가까이 과거의 한 시점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상당했습니다.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라고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납득이 되실 겁니다. 직무 이동, 승진, 이직 등 익숙한 조직 환경에서 일어난 일들도 성과를 내기까지 그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하니까요. 하물며 한 개인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던 경력 목표가 무너진 상황에서의 일상 적응에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예측 가능성과 퇴직 충격의 상관관계
게다가 퇴직의 충격은 예측 가능성의 크기와도 상관관계가 있는데, 얼마나 자주 퇴직 이후의 상황을 생각해 보는지,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는지가 퇴직 후 일상 회복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런데 현직에서는 내일 당장 퇴직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현직에서부터 퇴직 이후를 그려보는 것과 정서적 준비는 안정적인 퇴직 생활을 위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정서적 측면에서의 퇴직 준비는 재무자산 준비만큼이나 중요하고,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점에서도 관심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만간 언제든 퇴직하게 되겠지만, 사실 겁이 많이 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왜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21살 된 아들도 있어요. 와이프와 가보지 않은 곳으로 여행을 하고 책을 읽을 여유도 있어요. 즐기고 싶은 오페라와 가보고 싶은 레스토랑에도 갈 수 있지만, 그것들이 아침에 침대를 박차고 나올 이유가 되지는 않아요.”
커리어를 그만두는 일은 정체성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일이며, 목표 없는 일상에 익숙해지기까지 예상보다 큰 변화의 과정을 겪습니다. 심리학자 Guy Winch는 성공적인 퇴직 적응을 위해 최소 몇 년을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스스로를 재정의해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시간이 필요합니다.”
최고의 심리학자 Guy 박사는 정서적으로 준비된 퇴직을 위해 다음의 네 가지 전략을 제안합니다.
1. 현재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일들을 찾으세요.
2. 퇴직 후의 나를 새롭게 정의하세요.
3. 퇴직 후 이상적인 일상을 눈앞에 그려 보세요.
4. 몰입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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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irement 영어로는 더 이상 활발히 일하지 않는 상태, 즉 '은퇴'의 개념이 강한데 우리나라는 구분 없이 쓰이고 있습니다. 대기업 중심 고용 구조의 영향으로 정년퇴직을 은퇴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해 왔으나, 더 이상 그렇지 못한 사회 구조가 되었죠. 그 과정에서 50대 초반의 비자발적 퇴직자들이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니 일에 대한 의사/필요는 있는데, 당장 원하는 포지션으로의 수평 이동은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일시적 상태를 설명할 적절한 용어가 없습니다. 심지어 일반적으로 '은퇴'했다고 인식되는 연령에 계셔도 스스로 은퇴했다고 말씀하시는 경우는 많지가 않았고, 긱워커의 세상에서 풀타임 고용이 아니더라도 경제적 활동을 유지한다면 '은퇴'는 아니라고 생각하여 일관적으로 '퇴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