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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Jul 09. 2021

그 많던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는 다 어디로 갔을까

기억하되 그리워는 않겠다

‘인플루언서(Influencer)’, ‘크리에이터(Creator)’의 시절이 도래하기 바로 전, 적어도 ‘블로거(Blogger)’, ‘패피(Fashion People 패션피플의 준말)’의 시절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길거리 위에서 전부 주인공이었다. 

나는 구글에 검색하면 뭐든 다 나온다는 말을 안 믿는다. 내가 검색해서 결과가 나오지 않을 법한 것만 검색하는 경향의 사람일 가능성을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아무튼 그런 내가 무얼 검색하느냐면, 바로 ‘hbnam’이다. 이른바 ‘남작가’로 알려진 스트리트 포토그래퍼이다. 검색 결과는 방금 언급했듯 마뜩잖을 정도로 실속없다. 나는 뭐든 다 찾아준다는 구글에서 더 이상 그가 찍은 스트리트 패션 사진을 찾을 수 없다. 이는 그가 더는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고 보니, 그 많던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는 다 어디로 갔을까? 

당시 이름 꽤나 날렸던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 중 과연 몇 명이나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을까? 여기서 현역이라 함은 광고나 잡지 화보 촬영을 주로 진행하는 패션계 종사자보다는 여전히 길거리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데 가장 크게 적을 둠을 의미한다. 이 글을 구상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있게 증거이자 여망(餘望)으로 들 만한 사진가로 ‘사토리얼리스트(the Sartorialist)’ 스콧 슈만(Scott Schuman)이 있었다. ‘사토리얼리스트’는 스트리트 패션 포토의 전성기를 이끌고 여전히 그 명맥을 잇는 사진가로, 나는 인스타그램 스토리나 계정으로 그의 작업물을 즐겨 보았다. 축소된 스트리트 패션 포토 세계에서 얼마 없는 스트리트 패션 포토를 감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그런데 코로나가 닥치면서 본래 쓰려던 글은 공중분해되었다.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자 ‘사토리얼리스트’의 작품 수는 현저히 줄다 못해 없는 날이 많아졌다. 전염병의 공포에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고, 당연히 길거리에 사람들이 없어지니 스트리트 패션 포토가 나올 리 없었다. 물론 ‘사토리얼리스트’가 유일한 스트리트 포토그래퍼도 아니고, 다른 사진가들처럼 그도 작업 의뢰를 받는 활동을 하니 다른 사진을 구경하면 되긴 하다. 하물며 스트리트 패션 포토를 본뜬 패션 화보도 애초에 존재했고, 코로나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많은 패션 포토가 집 안이나 실내, 혹은 외부인으로부터 통제된 장소에서 작업되어 이전에는 없던 작품이 탄생하였으니, 코로나라고 해서 스트리트든 패션이든 포토든 볼거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구태여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인스타그램의 등장 이후 스트리트 패션 포토는 이미 사람들의 관심에서 꾸준히 잊히고 있었다. 그러나 스트리트 패션 포토는 단순히 스트리트, 패션, 포토가 아니다. 대체품이나 유물도 아니다. 스트리트 패션 포토는 인간이 응당 누려야 할 삶을 대변한다. 

처음엔 좋아해서 소장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현범의 ‘스트리트 에프에스엔(street fsn)’을 구매했고, 그후로 ‘FASHION WEEK’와 ‘LOOK GOOD BOOK’까지 구매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러니까 브랜드나 유명인들이 인스타그램에 직접 촬영한 사진을 올리고 이에 열광하게 되는 시기가 오자 이 책들을 그저 추억 소환용쯤으로 여겼다. 그리고 코로나 시대가 닥치니 이 책들이 지닌 진가가 선명해진다. 새로 고침 하면 몇 초 만에 지금의 유행이나 다음의 유행을 올려볼 수 있는 인스타그램을 없애고, 이미 지나간 패션을 담은 ‘스트리트 에프에스엔’을 펴 찬찬히 넘겨보았다. 과거에도 이 책들을 흥미롭게 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아는 유명인, 예를 들면 테일러 토마시 힐(Taylor Tomasi Hill), 안나 델로 루소(Anna Dello Russo) 같은 사람들을 찾아보기 바빴다. 하지만 이젠 그들은 유행의 선두엔 없었으니 책 속의 모든 사람들이 마침내 동등하게 보였다. 즉, 그들만 옷을 잘 입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름도 모르는 평범한 인물들과 ‘남작가’가 그 사진 옆에 작게 단 논평이 하나하나 마음으로 다가왔다. 유행은 없었으나 패션은 있었고, 패션을 넘어 개개인의 스타일이 있었다. 그 누구의 스타일 하나 겹치지 않았고, 그 누구의 스타일이든 서로가 서로에게 어울렸다. 튀는 스타일은 있어도 튀는 포즈는 없었다. 자신감은 있어도 허세는 없었다. 또한, 공식이 없어도 개성은 있었다. 예상 가는 스타일은 없어도 예상 못한 스타일이 수두룩했다. 신제품은 없어도 오래 입어 해지고 구겨진 옷이 가득했다. 기실 몇 번을 읽은 건지 셀 수도 없는데도 왜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은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책을 펼 때마다 처음 보는 스타일이 나온다. 이번엔 무릎이 찢어진 연분홍색 바지를 입고 가죽처럼 보이는 소재를 꼰 코트 깃 안으로 물결이 들어간 머플러를 넣은 남자, 군데군데 떨어진 굵은 군청색 니트 소재로 그 끝에 하얀 얼룩이 들어간 술이 달린 로브와 목도리를 두른 남자, 호피무늬 셔츠에 호피무늬 스타킹을 신은 남자가 눈에 띄었다. 한편으로는 촌스럽다고 여겨지거나 달갑지 않을 기억을 상기시키는 카모플라주(camouflage), 카고 팬츠도 스트리트 패션 세계에서는 동뜨지 않고 어엿한 스타일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남작가’가 재발견한 건 비단 아이템 자체 이상으로 활용법이다. 행커치프 대신 장갑의 손가락을 꽃처럼 슈트 앞 주머니에 꽂은 모습에서 아이템이 한 개만 있어도 관심만 있다면 열 개의 아이템 부럽지 않게 활용할 수 있음을 배웠다. 그렇지만 ‘남작가’의 카메라는 누가 봐도 예사롭지 않은 색조합이나 아이템을 갖춘 스타일의 사람만 주목하지 않는다. 그저 흰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여자나 스리피스 슈트를 입은 남자도 포착한다. 무엇이 평범한 옷차림의 그들을 카메라로 기록하게 만들었나 들여다보면 신기하게도 사람이 보인다. 같은 요리사 옷을 입어도 소매를 걷어 올리거나 깃을 세우고 리본을 맨 정도는 다 달랐고, 트렌치 코트는 이름만 같을 뿐 그 길이와 입은 모양새는 다 달랐다. 스타일로 보이는 건 옷이겠지만 그 기저엔 사람이 있었다. 밑기장이 잘려 실밥이 다 보이는 코트엔 아버지의 시간과 딸의 사랑이 보였고, 부러진 안경을 그대로 쓰고 있는 모습엔 새 안경으론 대체할 수 없는 애정이 보였다. 그럼에도 스타일을 완성하는 건 단지 사람마다 사정이 담긴 옷만이 아니었다. 딸기우유를 먹는 꼬마아이, 보조개가 파일 정도로 웃어 보이는 여자, 담배를 피는 남자에서 보듯 개개인의 움직임이었다. 누군가는 걸어갔고, 누군가는 차렷 자세를 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도, 어떤 이는 바지에, 어떤 이는 코트 안에 입은 블레이저에 넣었다. 그중 가장 압권은 아무거나 주운 것 같은 옷을 아무렇게나 맞춰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다음 벽에 등과 한쪽 발을 기댄 노숙자였다. 이렇게 스타일은 옷과 사람, 포즈, 그리고 그 상황이라는 것을 ‘남작가’가 보여주기만 하지 않고 일러줬기에 가능했다. 사진 옆 짧은 문장들 속에는 목도리 대신 아내의 가디건을 두른 남자의 사연이나, 옷과 동시에 나이 드는 법, 사진 속 인물들과의 우정이 담겨 있다. 읽다 보면 ‘남작가’가 옆에서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는 런웨이에서 본 옷을 의외의 방식으로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희열이 얼마나 짜릿했는지 설명하고, 여러 색깔을 충돌시킨 옷차림을 토대로 우린 조금 더 과감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옷을 입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역설했다. 특히, 101쪽에 있는 조노(Jono)의 사진과 이야기는 스트리트 패션 포토의 존재 이유에 관한 것이다. 부스스한 머리와 삐뚤게 풀어헤친 넥타이 스타일은 ‘남작가’의 예측과 다르게 그의 스타일일 뿐임을 대화로 알게 된 후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건물 사이로 비껴 나오는 햇살과 도로 위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그를 비추었다. ‘남작가’는 그 순간으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낳는 즐거움과 결과물은 모방이나 조작, 계산으론 따라잡을 수 없는 유일무이임을 직감한다. 이 이야기는 나의 마음에 깊이 남아 이후에도 책을 펼쳐 이 부분을 살필 때마다 감동을 느낀다. 내가 느낀 감동은 향수가 아니다. 예전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아니다. 그 감동은 심장박동이다. 하트 모양의 ‘좋아요’가 아니라 진짜 하트(heart), 심장 말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고, 바라고, 하고 싶은 것이라면 무조건 해야만 직성이 풀리기에 멜번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유독 작심했다. 멜번 여행이 그전 여행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카메라의 존재였다. 아이폰으로 촬영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카메라를 사고 나니 그 가치가 휴대폰의 카메라 기능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멜번에서, 건물 안에선 커피를 한 잔 놓고 글을 쓰고 건물 바깥에선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나도 드디어 스트리트 패션 포토를 찍을 수 있다는 설렘을 그때보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옷을 근사하게 입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 그 멋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촬영 실력이 너무 서글플 정도였다. 멋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어보는 건 면접관 앞에 서는 것보다 떨렸다. 가뜩이나 서툰 영어 솜씨는 긴장으로 더욱 엉망진창으로 들렸을 텐데 다들 너그럽게 허락하는 웃음을 지었고, 나는 그러한 상황을 겪고 나서 심장은 본디 긴장이 아니라 용기로 떨림을 깨달았다. 계절을 빗겨간 옷을 입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방랑자, 보풀이 일어난 점퍼에 뉴스보이 캡을 쓴 명품 거리 위 구두닦이, 젊은 사람들보다 멋있게 입고 회사에 가는 할머니 등 다양한 곳에서 온 다양한 직업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 틈에 섞여 카메라로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어느 장소나 집단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소속감을 느꼈다. 누가 뭘 입든, 뭘 하든 이상한 듯 흘금대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광경에서 각양각색보다도 그 각양각색을 이해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그 사이에 녹아들고 있음을 감각하자 덩달아 카메라로 길거리 위 사람들을 촬영하는 이유는 스트리트 패션 포토에 관한 한을 푸는 것이 전부가 아님도 감지했다. 그 활기, 그 역동성, 그 온기는 사람에게 생명력을 줬다. 그 길거리는 하루도 조용한 적이 없었다. 유랑 악사들이 곳곳에 상주했고, 몸이 불편한 이들은 잡지를 팔고, 어느 날은 평화로운 시위가 펼쳐졌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영어 외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도처에 떠돌았고, 커피 향과 사람마다의 고유의 냄새가 섞여 사방에 풍겼다. 늘 책상에서 홀로 네모난 기계의 창으로 저 너머 세상을 염탐하는 수밖에 없었던 내가 드디어 진짜 세상을 정탐하고 있었다. 내가 읽은 교과서와 달리 사람들의 삶은 다채로웠고, 내가 본 시험과 달리 틀린 삶이란 건 없었다. 누구라도 융화되었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걸 보고도 사람들은 피하는 기색이 없었고, 어떤 이들은 촬영을 허락한다는 뜻을 담아 멀리서 나와 눈을 맞춰 인사했다.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나는 그 길거리 위에서 카메라로 어떻게 하면 이 들쭉날쭉하고 펄떡펄떡 솟구치는 사람들의 개성과 열정을 가감 없이 담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마음껏 셔터를 누를 수 있었다. 게다가 어느새,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글로 담는 게 편해졌다. 거리낌없는 자유를 만끽하며 자연스럽게 세계의 일원이 됨을 실감했다. 그 세계는 정돈되고 화려한 세계가 아니었다. 그 세계는 ‘남작가’가 ‘FASHION WEEK’에서 들려줬던 세계였다. ‘FASHION WEEK’는 보통의 스트리트 패션 포토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으로 ‘남작가’의 그 이전 작업물들이나 다른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들의 작업물과도 다르다. 스트리트 패션 포토는 프레임 안에 사람이 서 있으면 그 옷이나 액세서리가 잘 보여야 하지만, ‘남작가’는 그런 이론을 뛰어 넘는다. 런웨이에서 막 뛰쳐나온 듯한 머리 모양을 한 사람과 그로 인해 생소해진 일상의 풍경, 그 속을 지나가는 행인과 신기한 눈빛이 헝클어진 길거리를 ‘남작가’는 곧이곧대로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그러니 보기만 해도 현장감이 생생하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고 차가운 눈싸라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눈발을 헤치며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모델들, 엄청난 인파의 포토그래퍼들, 연출로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표정들이 섞인 그 엉뚱하고 느닷없는 광경은 독특하기만 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즉, 어우러짐이야말로 세계를 형성하는 토대였다. 나는 길거리 위를 걷고 뛰며 느낀 심장 박동을 말미암아 ‘남작가’의 ‘FASHION WEEK’를 오롯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도 동경하던 길거리에서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 그리고 지금, 공허와 경계만이 남은 길거리를 그저 바라봐야 한다고 해도 나의 심장은 멈추지 않는다. 

길거리를 안심하고 거닐 수도, 세계의 골목 곳곳을 자유로이 쏘다닐 수 없게 되자 난 이렇게 질문했다: 이 코로나가 우리에게서 무얼 앗아갔나? 그러나 이젠 이 질문을 이리 바꾼다: 이 코로나가 우리에게 무얼 깨우쳤나? 질문을 바꾸기 전에는 어떤 답을 생각해도 억울했다. 하지만 질문을 바꾸고 나니, 소중함을 박탈당했다기보다는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가 지구 곳곳을 누빌 자유를 빼앗은 건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자유가 가로막히기 전 우린 길거리를 걷는 자유, 그러니까 더불어 살아감에 관해 감사하고 그 의의를 한 번이라도 몸과 마음으로 되새긴 적이 있었나? 시대가 달라지는 걸 탓하기엔 애초부터 우리가 놓쳤던 것이 너무도 크다. 결국, 공평하다는 착각에서 비롯되었다. 주목받고 싶은 마음이 문제는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인스타그램의 네모 칸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다른 소셜 미디어는 따라가지 못할 인스타그램만의 강점은 조작 편이성, 접근 간편성, 자발적 자아 발현성보다도 누구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 놓일 수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잘하면 스타덤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스타덤이란 인기에 기반하니, 그 인기가 많아지려면 인스타그램 피드에 사람들이 관심 갖는 것들을 포함해야 한다. 이런 조건은 곧 쏠림 현상을 낳았다. 유명할수록 더더욱 열풍을 타고, 대중이 좋아할수록 점점 더 입소문을 탄다는 건 그 반대의 것들은 그 반대의 현상에 놓여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새로 나온 샤넬 가방을 알리는 피드와 새로 나온 책을 알리는 피드 중 어느 것이 사람들의 ‘하트’를 더 많이 받겠나? 새로 나온 디올의 수트를 소개하는 피드와 내가 10년 넘게 입은 바지를 소개하는 피드 중 어느 것이 사람들의 ‘하트’를 더 많이 받겠나? 유명 팝가수의 신곡 뮤직 비디오가 담긴 피드와 무명 버스커의 연주 영상이 담긴 피드 중 어느 것이 더 쉽게 ‘하트’를 받겠나? 인스타그램은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걸 선보일 수 있는 자유의 장처럼 비치지만 그 자유는 허울일 뿐, 실상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걸 선보여야 하는 강박이다. 예뻐 보여야 한다는 강박, 차별화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심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이다.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니 피드의 소재 종류에 따라 ‘하트’의 개수가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지 않겠냐는 변명은 재고의 가치도 없다. 사람들의 시선이 인스타그램의 크기에 집중되는 만큼 관점도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 좁은 화면에 셀린느의 티셔츠 하나만 담겨 사람 마음 홀리기도 벅찰 텐데, 신간 소식이나 연극 홍보, 지구 온난화 뉴스를 실을 구석이 어디 있겠나? 또한, 세상에서 가장 작은 화면인 스마트폰 화면에서 사진만 보기도 눈 아플 텐데 상대방이 무어라 적은 글씨를 읽을 재간이 어디 있겠나? 더군다나 그 협소한 화면에 본인의 흥미만 졸졸 쫓고(follow) 그 외의 것은 무의식적으로 편리하게 건너뛸 수만 있다면? 종국엔 네모꼴 우물에 빠지고 네모 바깥의 세상에 무지하게 된다. 사람이 네모의 크기만큼 편협해질 뿐이다. 주목을 받고만 싶은 가격표와 마네킹이 난무하는 이 쇼윈도가 한편으로는 현대인들의 거울이기도 하다. 실제 세상에서 자기 소개는 SNS 계정으로, 서로의 안부는 SNS 여행 사진으로, 대화는 댓글로 대신한다. 그러다 어색해지면 스마트폰을 본다. 그 가상 세계에서는 입에 차마 올릴 수 없는 말이 끊임없이 올라왔고, 누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보다는 누가 얼마나 더 잘살고 있는지에 관한 뉴스가 넘쳤다. 관심은 설정일 뿐이고, 설정된 관심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을 사람들은 본인의 신경회로보다 믿고 따랐다. 스마트폰을 보고 나면 사람들은 SNS에서 유명해진 장소에 가서 사진을 찍고, SNS에서 유행하는 물건을 사러 가고, SNS에서 유통되는 뉴스를 토대로 실제 세상을 판단했다. 인터넷 뉴스가 건물 주인 연예인을 예찬할수록 현실 속 건물 가격은 올랐고, 웹사이트에서 떠도는 유언비어는 현실 속에서도 횡행했다. 와이파이는 안 끊겨도 사람들 간 실제적 교류와 교감은 자꾸 끊겨만 갔다. 누군가 겉으로 행복해 보일 때 누군가는 실제로 행복하려 애쓰는 불행에 빠졌고, 누군가 관심 속에서 살아갈 때 누군가는 무관심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행복에 스스로 공평해지려는 질투의 결과로 사회는 이기심으로 서로 멀어지는 양극화와 불공평에 이르렀다. 방역과 비대면의 시국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세상은 이미 서로 대면하지 않고 방어적이었다. 각자 양 옆에 투명 칸막이를 놓기 전부터 우린 서로에게 장벽을 놓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실화된 비대면, 비접촉과 가시화된 비사회성은 코로나 시대의 단면이기 전 원래 현대인의 표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로 서로에게 거리를 두게 되면서 깨닫는다: 인간은 홀로 숨쉴 수 없다. 우리는 집 안이든 화면 속이든 고립될 수 없고 바깥으로 나와야 하는 존재다. 따라서 우리는 길거리로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긴다. 길거리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일원끼리 어울릴 수 있는 가장 기초적 화합의 장이자 전혀 다른 일생끼리 어우러지는 가장 최소한의 인간적 근거지다. 그리 다양한 삶과 생의 보고(寶庫)를 알리는 자가 바로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다. 

스트리트 패션 포토를 보기 전까지 나에게 길거리는 그저 노정에 불과했다. 목적지에서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통로라서 그저 지나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한 길거리마저 내가 스트리트 패션 포토를 접하고 나서 나의 목적지가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여정은 지루하지 않았다. 패션쇼 바깥에서 흰 티셔츠와 청바지차림만으로도 빛나는 모델들이나 마치 예술 작품을 입은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문화유산이나 미술관에 걸린 그림만큼 아름다웠다. 지구인이라면 옷장에 하나씩은 있을 법한 옷부터 도대체 저런 건 어디서 샀을지 모를 옷까지 독특하게 표현된 옷차림과 그에 반영된 각각의 개성에 매번 놀랐다. 단순히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느냐보다 어떻게 옷을 입느냐가 중요해서, 같은 옷이지만 다르게 입은 사람들에게서 정형적이지 않은 스타일링 기법을 익힐 수 있는 건 기분 좋은 덤이었다. 화려한 퍼 자켓을 입었지만 화장은 전혀 하지 않은 사람, 과감한 파임이 있는 옷을 입은 사람, 연식이 좀 있는 옷과 가장 유행하고 있는 옷을 섞어 입은 사람을 줄곧 보면 직업과 나이에 상관없이 본인이 옷을 입은 대로 인생을 전개해 나가는 삶이 한눈에 보였다. 그렇기에, 그들의 길거리에 비하면 내가 사는 곳의 길거리는 너무도 시시했다. 그들의 길거리에서는 같은 옷일지라도 같은 방법으로 입은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사는 곳의 길거리에서는 똑같거나 엇비슷한 스타일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겪은 길거리에서는 먹구름 아래서 선글라스를 써도 이목을 끌지 않았지만, 내가 사는 길거리에서는 햇살이 쨍쨍한 날 선글라스를 써도 시선이 느껴져 부담스러웠다. 그곳에서는 카메라를 자유롭게 들었지만, 이곳에서는 카메라를 들기만 해도 눈치가 보였다. 숨이 턱 막혔다. 그런 나에게 스트리트 패션 포토는 탈출구로써 의미 이상으로 산소 호흡기였다. 스트리트 패션 포토를 보고 있으면 답답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반 스트리트 패션 포토가 나에게 패션과 스타일을 보는 눈을 선사했다면, ‘남작가’의 스트리트 패션 포토는 그 눈을 뜨게 해 줬다. 일반 스트리트 패션 포토로 단꿈에 빠졌다면, ‘남작가’의 스트리트 패션 포토로 그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궁극엔 마주했다. ‘남작가’의 ‘스트리트 에프에스엔’으로 사람의 스타일 뒤엔 사람의 사연이 있다는 걸 배웠기에 어떤 옷을 입어도 자신감과 소신을 자부하게 되었으며, ‘FASHION WEEK’ 속 돌발 상황이 담긴 사진에서 패션은 사람의 삶과 동떨어질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즉, 세상이 예쁘지만은 않음을 받아들였다. 일반 스트리트 패션 포토를 보는 것처럼 옷만 눈에 띄지 않았다. 바지가 더러운 길바닥까지 질질 끌려도 개의치 않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이 눈을 찌푸릴 정도로 노출이 심한 옷을 입어도 의연한 사람, 다 떨어진 신발과 실밥이 터진 원피스를 입고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는 사람이 보였다. 인스타그램은 피드를 새로고침하기만 해도 항상 이번 시즌 패션 하우스 브랜드에서 새로 출시한 명품 광고를 보기 바빴던 반면, 실제 길거리 위 사람들은 비싼 새 옷만 입지 않았던 것이다. 괴리감은 그뿐이 아니었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사진이 아무리 자연스러워도 기실 짜여진 연출에 불과했다. 나는 그래도 부자연스러운 포즈나 분위기의 사진을 재미있어 하는 편지만, 현실은 늘상 무대나 연극이 될 수도 없고 또 아님을 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남작가’의 스트리트 패션 포토가 독보적인 까닭은 주인공을 따로 만들지 않는 데 있다. 매체로부터 피사체 옆에서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는 행인을 지워달라는 청을 받았다는 ‘남작가’는 ‘LOOK GOOD BOOK’에 다다르자 비로소 독립독보(獨立獨步)한다. ‘LOOK GOOD BOOK’에는 런웨이나 패션 필름처럼 주인공이 따로 없다. 오직 사람과 환경, 그리고 순간이 공존한다. 오뜨 꾸뛰르를 입든 슬립 드레스를 입든 모두 같은 하늘 아래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인간이었다. 어떤 옷은 조명이 없어도 그림자로 인해 그 아름다움이 도리어 살아났고, 또 어떤 옷은 우연히 옆에 있는 노란색 벽 때문에 자기 안의 노란색 꽃무늬가 오히려 돋보였다. 거센 바람은 머리를 흐트러뜨려 그 어떤 무대 효과보다 드라마틱했고, 각자 안면이 없어도 우연히 옆에 서 있어서 서로의 옷차림을 빛내기도 했다. 형광 주황색 작업복을 입은 한 할아버지가 까멜리아가 달린 샤넬 종이가방을 든 것처럼 피차에게 생경한 것들의 조합은 그 어떤 각본으로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특히, 멋지게 차려 입은 손님과 멋있는 종업원이 대화하는 모습이 삐뚠 앵글로 담긴 사진이 그가 해온 작업의 정수이자 스트리트 패션 포토의 존재 가치를 보여준다. 사진에 대한 이해를 돕자면, 손님은 어떤 직업으로 먹고 사는지 알 수 없지만 옷차림으로는 그녀가 어떤 사람일지 짐작해 볼 수 있고, 자기 주관이 강렬한 그 손님은 누군가의 삶의 현장에 속해 그의 생업을 거들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담은 앵글이 어슷한 건 ‘남작가’가 그 광경을 내내 주시하거나 일부러 만든 게 아니라 목격한 찰나 촬영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사람이든, 상황이든, 주변이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고 있고, 그게 바로 현실이라는 것이다. 통제불가능하고, 생뚱맞고, 우발적이다. 그리고 상호 간의 삶에서 격리될 수 없다. 예를 들면, 근사한 옷을 입고 다음 쇼장으로 얼른 가야 하는 사람과 이동을 위해 탄 택시를 운전하는 사람은 인스타그램에서는 다른 화면에 담길지라도 현실에서는 같은 시야에 놓인다. 인스타그램에서는 길거리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셀럽만 보이겠지만, 현실에서는 그 길거리를 매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도 빼놓을 수 없다. 길거리는 본래 만인과 만물에게 공평하다. 주목하지 않아도 괜찮을 삶이라는 건 없다, 주목하지 않은 사람과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그러니 나는 도저히 멈춰지지 않는다. 

지금 누군가는 마스크도 없이 야외 공연을 즐기겠지만, 누군가는 마스크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집 밖으로 나올 수 없거나, 누군가는 명칭만 같은 길거리에서 마스크 없이 죽어가고 있다. 또 어떤 길거리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지만, 어떤 길거리엔 인적을 찾을 수 없다. 길거리가 점점 불공평해지고 있다. 이를 안타깝게만 방관하고 싶지 않다. 전보다 팽팽한 공기마저도 복면을 써서 같이 나누지 못하더라도, 내 눈은 복면에 가려지지 않아 길거리와 거리가 보인다. 바깥에 나가는 날이 손에 꼽아도, 길거리가 예전 같지 않아도, 서로의 거리가 멀어도 관점과 관심을 달리할 이유가 없다. 마스크를 써도 ‘스트리트 에프에스엔’ 속 한 커플로부터 영감 받은 줄무늬 셔츠와 트랙 팬츠의 옷차림은 그대로다. 길거리엔 사람들이 줄어들어도, 그 줄어든 수만큼 사람에 대한 집중력은 더더욱 높아진다. 그리고 낯선 길거리에서 카메라를 든 마음 그대로 낯익은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여전히 관찰하며, 자신만의 표현 방식을 견지하는 포토그래퍼처럼 사람들의 옷차림을 글로 보고한다. 그 바탕에는 패션 지식이나 사진 경력 없던 공대생이 오직 호기심과 흥미만으로 열심히 돈을 모아 산 카메라로 뉴욕에서 처음 스트리트 패션 포토를 찍기 시작한 후 변화한 개인의 삶이 있다. 그 삶은 나에게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과 함께 호흡하는 법을 가져다 줬고, 나는 다양한 삶의 존재와 공생을 잊지 말자고 글로써 표현하는 바다. 선한 행동, 그것도 상생에 관한 통찰은 그 시대의 공기가 어떻든 생존해야 하고, 전염되는 건 질병 말고도 선의도 있다. 고로, 비록 심장박동의 정도는 달라야 할지라도 나는 언제나 같은 심장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코로나 다음의 시대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코로나로 인해 억눌린 많은 삶들이 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는 것만큼은 자명하다. 마치 겨우내 땅 속에 몸을 웅크리다 봄이 되어 그 밖으로 튀어 오르는 새싹의 이치와 같다. 그렇지만 코로나가 물러간 길거리가 오더라도 그 이전과 다르게 서로 간의 거리가 없길 희망한다. 다가올 길거리 위에서는 마스크보다는 미소가, 인스타그램에서 ‘하트’를 많이 받은 옷보다는 본인이 좋아하는 옷이, 경계보다는 눈인사가, 스마트폰 화면보다는 대면, 말뿐인 소통보다 말로 된 대화가 활보하길 소망한다. 그때가 오면 인종, 나이,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여행자와 현지인, 부자와 빈자, 유랑자와 예술가, 학생, 무직자와 직업인 모두가 서로의 다정한 눈길에 들길 염원한다. 그 길거리 위 사람들 사이에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 군단이 다시 서서 많고도 짧은 인생의 순간을 남겨 주길 기원한다. 그럼 그 속에서 나도 그 어떤 구속감이나 경계심 없이 카메라를 들면 뛰어다니고 펜을 들면 쉬어 가며 내가 몰랐던 사람들과 호흡을 같이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렇게 걷다가 어느 길거리 위 독특하고 본인다운 옷차림을 한 사람들 틈에서 내가 존경하는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를 마주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 글을 뒷받침하는 사진(하나하나 확대해서 감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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