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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Aug 31. 2022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음에 듭니다

My Life but Better: 잦은 은상 수상 경험이 이끈 변화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음에 듭니다

_ 잦은 은상 수상 경험이 이끈 삶의 변화

__ My Life but Better

___ 둥글게 둥글게 



언젠가부터 은상을 받으면 집에 와서 울곤 했다. 나는 왜 안 되냐고 울분을 격하게 터뜨렸다. 그런 나를 주변 사람들은 고사하고 가족조차 이해하지 않았다. 누구나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과 목소리로 “다음에 금상 타면 되지.” 그런데 나는 알았다, 말은 참 간단하고 이 다음에 난 또 은상을 탈 것임을. 그리고 역시 예외가 없었다. 나는 또 울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아무 상도 타지 않는 게 낫다고 여길 만큼 은상이 싫었다. 이는 스포츠 경기의 메달리스트 중 은메달리스트가 가장 불행하다는 조사 결과와 이론에 필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은상을 수상할 때마다 은메달리스트의 기분을 알 것만도 같다고 파렴치하게도 지레짐작하였다. 하지만 그보다도 은상을 받은 기분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별다른 화려한 미사여구가 필요 없다. 그 기분은 그냥 금상을 눈 앞에서 놓친 기분이다. 비 오는 날 비를 흠뻑 맞은 걸로도 모자라 진흙탕에 처박힌 기분이 바로 은상을 받은 기분이라고 비유하곤 하였다. 연이어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한다. 도대체 금상과 내가 뭐가 다르길래 내가 금상을 놓쳐야 했을까? 솔직히 그 이유를 나는 진작 어느 정도 추정하고 있었고, 나의 예측은 틀린 적이 없었다. 어김없이 들어맞는 예측에 은상만 보면 부아가 치밀었다. 저 판에 박힌 글이 금상이라고? 나는 금상을 받은 글을 읽을 때마다 어디선가 읽은 듯한 기시감이 들고, 교과서와 같은 정답을 따른 인상을 받았고, 무엇보다 흥미롭지도 재밌지도 않았다. 아, 그 대신, 굉장히 착하다고 생각했다. 금상이 판에 박힌 글이라면 은상을 받은 내 글은 삐쭉빼쭉에 천방지축이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쓴 글 주제에 아무것도 시도하지도, 도전하지도, 모험하지도 않는 글이 금상이라고? 해답은 둘 중 하나였다, 금상을 받는 같은 반 학급생처럼 착한 글을 쓰든가 아니면 내가 더 잘하거나. 나는 은상을 받은 글을 들고 ‘여러’ 국어 선생님을 쫓아 갔다. 

“제 글이 (금상을 받을 수 있도록) 어디를 고쳐야 할까요?”

감사하게도 선생님들은 바쁜 와중에도 틈을 내어 내 글을 봐주셨다. 불온하게도 난 그 지적과 개선 지점, 심지어 칭찬까지도 뒤돌면 잊었다. 잊고 싶어서 잊은 건 절대 아니다. 그저 망망대해 위 보물섬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는데 저마다 전혀 엉뚱한 곳을 짚어준 느낌이었다. 즉 내가 알려 달라고 (부득부득) 부탁드려 들은 것이지만 그다지 크게 납득이 가지 않은 것이다. 돌이켜 회상하면, 선생님들은 틀림없는 방법을 알려 주셨고, 나는 틀림없는 방법을 내심 틀리고 싶었다. 문제에 도입하는 서론-문제의 원인을 논술하는 본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결론과 같은 전개는 뻔했고, 묘사를 위해 단어를 세 개씩 쌓아 올리지 못하면 내가 원하는 바를 다 표현하지 못해 답답했다. 혹은 이런 요건들을 차치하더라도, 금상을 받을 수 있는 글의 주형이 있음이 대단히 내키지 않았다. 벗어나지 않는 글의 규격만 의식하면 마치 영혼이 이미 짠 관짝에 들어가는 심경에 휩싸였다. 영혼. 그러고 보면 선생님들은 글에 담긴 내 심정은 언급한 적이 없으셨다. 그동안 나의 노력이 있지 금상의 틀에 박힌 글처럼만큼은 절대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금상을 받고 싶은 굴뚝 같은 마음은 그렇게 언제나 충돌해서 갈수록 글은 더 어쭙잖았다. 내가 비겁했다. 비빔밥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영락없는 음식물 쓰레기였다. 금상은 받고 싶은데, 금상의 글처럼 쓰고 싶지 않았던 내가 졸렬했다. 금상커녕 수상마저 더더욱 멀어지는 날이 잦아졌고 난 된정나게 의무 교육 과정을 졸업했다. 졸업하고 나서 과거를 얼른 잊기 위해 서랍 정리를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쌓인 수두룩한 상장이 참 처치곤란이었다. 상장의 부문만 보면 나는 환경부 장관보다 환경을 더 생각하고 과격한 인권운동가에 무엇보다 참 착한 아이였다. 뿐만 아니라 상장의 부문은 내가 어떤 글을 썼을 거라고 암시했어도 글의 당사자였을 나는 어떤 글을 썼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누런 건 상장 종이고, 검은 건 어차피 다 지나면 의미 없어질 공치사 혹은 빈말이었다.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매한가지였다. 나는 어지간하면 수상을 하는 유형에 속하고 또 수상을 당연히 간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금상에 대한 욕심과 은상에 대한 실망은 왜 금상이 아닌 은상이어야 하는지 의문에서 출발한 것뿐이었다. 나도 상을 받으면 기뻤다. 그런데 그 상을 증명하는 상장들이 빈 깡통이 되었다. 나는 의무 교육 과정 시절 받은 모든 상장을 전부 쓰레기통에 찢어서 버렸다. 어떤 글을 쓴지도 모른 채 글을 썼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결국 내가 한 노력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함이나 좋은 글에 대한 고민을 위함이 아니라 그저 은상이 부끄러워 저지른 짓이었다. 글 같은 건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글을 쓸 자격이 없었다. 

사람은 그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 대학에서 작성하거나 필기하는 일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골치가 아팠다. 대회가 아닌 곳에서 글 같은 것을 써 본 적이 없어서 펜을 잡거나 키보드 앞에서 굳어 버리기 일쑤였다. 설령 어떻게 운을 떼더라도 사람이 제 버릇 개 줄까, 그것도 작법이라고 경험과 세월은 무의식보다 강했다. 그마저도 하기 싫다는 의식과 부딪혀 글 같은 것을 쓸 때마다 죽을 쒔다. 이렇게 쓰고 보니 도대체 그 경험과 세월은 무슨 소용인지, 원. 난 그동안 헛짓거리를 한 것이 틀림없다고 단념하려는 시점, 한 교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주제로 글을 쓰라는 과제를 주셨다. 이런, 첫 줄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글을 그렇게 썼으면서 나를 주제로 글을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이제 그 글은 없고 또 어떤 문장으로 시작과 끝을 맺고 그 사이를 메웠는지 아예 기억나지 않지만, ‘글이 재미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오로지 나에 관해서만 글을 쓰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글이 재미있다는 의견을 들은 건 더더욱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상장을 받을 줄만 알았고, 왜 이 상장을 받는지 의문이었으며, 왜 상을 받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상을 받는다는 데서 그릇된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보이 매거진에 글을 응모할 용기가 났다. 사심 없이 교수님께 글을 제출했던 것처럼 실력과 평가에 구애받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쓰고 싶었고, 결코 쉽지 않았다.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이 써지지 않은 상태는 잼 뚜껑이 열리지 않아 폭폭한 심정에 비견할 수 있다. 이건 다 내 안에서 나를 꺼낸 적이 없기에…?

“나는 내 느낌만 썼는데 왜 금상을 줘?”

아니구나. 있었다. 2학년 때 독후감 대회에서 금상을 받았을 때 충격이 선연하다. 난 다른 학생들이 줄거리를 쓸 때 줄거리는 안 쓰고 오직 나의 느낀 점만 써서 제출하고 나서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만 줄거리를 안 썼잖아? 그런데 금상을 받으니 기분이 좋으면서 깜짝 놀랐고 엄마에게 느낌만 쓴 내가 왜 금상을 받았을까 이야기한 것이다. 그랬더니 엄마가 태평하게 말하길. 

“그렇게 하면 돼.”

그렇게 하는 방법을 점점 새까맣게 잊었던 원인은 그렇게 하면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을 받는 횟수가 늘자 나의 느낌을 쓰는 것보다 수상 자체에 집착하게 되었다. 동시에, 내가 글을 잘 쓴다는 착각이 늘었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고, 이 글쓰기가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상념에 사로잡혔다. 한 번은,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교외 글짓기 대회에 출전시켰다. 동시 쓰기 대회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결과적으로 탈락하였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담임 선생님이 내가 잘하고 싶어하는 것을 잘한다고 인정해 주신 점과 내가 그 인정을 증명해 보이려 애썼다는 점이 마찰되어 내 안에서 새로운 빛이 솟구쳤다: 될 때까지 하겠다. 그러니 글짓기 대회를 미친듯이 나가고 논술 과외도 들었지만 항상 형언상 결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에는 ‘글은 잘 쓰지만 어딘지 모르게 식상하다’는 평을 곧잘 받았고 필자인 나조차도 글을 읽으면 답답하다는 감이 섰다. (그건 표현상 절제미와는 분명히 다르다.) 마치 소파 밑바닥을 청소하는데 벽과 맞닿는 끝 모서리까지 손이 닿지 않는 심정이었다. 다른 작가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난 요령과 방법을 몰라서 매번 내가 시도할 수 있을 만큼 다르게 쓰는 수밖에 없었다. 이 지면에서도 ‘나는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썼다’는 문장 외에는 당시의 노력을 묘사할 길이 없다. 중학교를 마치기 직전에야 그 결박이 겨우 풀렸다는 것을 ‘한우리 독서 논술’ 선생님께서 증명해 주셨다. 

“이제야 해리의 글이 자유로워졌네.”

논술 선생님의 말씀이 감사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자유로워진 기점을 전혀 모른다. 결박이 풀렸어도 자신감이 부족해서 대회에 내보내기 전에는 엄마에게, 대회의 결과가 나오고 나서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글을 검사하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수상과 비수상이든 검사든 타인이 내린 평가에 스스로 수긍하지 못해 내가 알아서 하는 지경으로 갔다.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나의 글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비록 그 결과가 내내 불만족스러웠음에도 말이다. 결국 은상은 현실과의 타협이 아니라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자아를 단련하였다. 그러니까 난 언제나 글에서 나만의 언어를 갖기 위해 또, 나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애썼고, 그 서툰 노력에도 은상이 주어졌던 셈이다. 값진 은상이었고 자랑스러운 은상이었다, 이렇게 뒤늦게나마. 이제는 기억하고 싶어도 아예 기억할 수 없는 수상작들과 비수상작들이, 수도 없이 거쳤을 고뇌와 무수히 지웠을 문장들이, 넌더리 났던 착오와 시행이 태양의 햇빛과 바다의 수면이 만나 빛나는 은빛 윤슬이었다. 나의 글을 쓴다는 건 애쓸 이유 없는 자연이었다. 

오보이 매거진에 글이 실릴 적이면, 또는 존경하는 분들이 나의 글을 읽으셨을 때면, 그리고 ‘글이 정말 좋다’고 감상을 들었을 때 나의 글이 세상에 오롯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기고 지는 경쟁 없이,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 없이 나의 글이 다른 이들의 글과 나란히 공존한다는 점도 흡족하였다. 수상을 할 때면 수상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점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이는 떨어졌을 때도 마찬가지고, 다른 수상자와 수상에 도전하는 학생들의 글을 볼 기회도 적다는 점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회로 인해 우등과 차등이 발생한다는 점이 싫었고, 잘 쓴 글이라는 애매모호한 기준 아래 종국에는 심사위원 마음에 드는 글이 뽑힌다는 점이 서글펐다. 더군다나 상을 받는 영광을 누릴지라도 겨우 혹은 기껏 글을 읽는 사람이 심사위원에 한정된다는 점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시상대를 선망하는 것보다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것을 선호한다. 나의 글이 세상에서 경쟁하지 않아도 온전하게 살아남을 방식을 모색함이 곧 자의적 작문의 날갯짓을 위한 동력이 되었다. 독자와 글을 공유하고 공감을 표하는 날갯짓의 바람에 남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무의 도금이 비로소 벗겨졌다. 나는 ‘그렇게’ 글을 쓰고 나의 글은 자유롭다, 주제를 넘나들고 양식을 아우르며 종이와 웹사이트를 너머 독자 당신의 마음에서 나의 날개를 잠시 접어 안착하고. 그러고 보니 요즘은 활짝 웃는 은메달리스트가 천지더라. 그 은메달리스트들이 반드시 말하는 소감을 빌려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한 편의 글을 쓸 때마다 많이 배우고, 그 배움이 뜻 깊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제 글을 읽은 독자 분들께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계속 응원해주세요.”

원하는 것 없이 글을 쓰고, 그 글과 그 글의 길을 평온히 지켜볼 수만 있다면. 늘 그렇게. 

그리고 노력을 더는 지우지 않기로. 


바다만큼 이로운 글 

언제까지고 

당신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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