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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Sep 08. 2023

도시 사람의 남쪽 여행기

미지의 감각을 입는 일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온 언니와 둘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제는 보고 싶을 때 보고 얘기하고 싶을 때 얘기할 수 있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온전한 우리만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으로 발 빠르게 떠나 그려본 여행 후보지에는 여러 곳이 있었다. '국내 여행'하면 공식처럼 생각나는 대표 지역 3곳 제주, 부산, 강원부터 경주, 여수, 통영, 전주 등등. 방구석 가설 여행은 흐르고 흘러 어느 의문점으로 생각이 번졌다. 대한민국 지도를 펀펀하게 펼쳐보면 궁금하고 알고 싶은 미지의 땅이 수두룩 빽빽인데 왜 매양 밟아봤던 땅을 밟으려 하는지 의구가 일었다. 그래 뭐, 늘 붐비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지역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시설이 편하다거나 가볼 만한 관광지가 즐비하고 즐길 수 있는 선택지가 많다는 얘기겠지. 합리성과 익숙함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나는 왜인지 다른 차원의 감각으로 넘어가는데 목말라 있었다. 매번 가게 되는 뻔한 곳은 저리 밀어 두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나 앞으로도 들여다볼 기회가 적어 보이는 곳을 가보고 싶어 머리를 굴렸다. 발 디디고 싶은 미지의 영역을 맴돌며 어슬렁거리다 남쪽 땅 끝에 있는 하동과 구례를 콕 집었다. 언니는 은근히 각오가 필요할 거라는 뉘앙스로 말했다.


여기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감성 카페 전혀 없고 완전히 시골일 거야.


응 괜찮아. 난 시골 좋아해.
(비록 이 몸으로 겪어본 적 없다만 나에겐 어려서부터 매스컴으로 다져진 야무진 경력이 있지-)


숙소와 교통편을 예약한 뒤 기다려지는 설렘 속에서도 가는 길이 결코 대수롭지 않을 거란 추측에 걱정이 앞섰다. 서울에서 하동까지 거리가 본디 멀고 수요가 적어서 그런지 한 번에 가는 차편이 없었다. 서울에서 ktx를 타고 순천에 들러 3시간 대기를 하다가 하동으로 기차를 타고 넘어가는 일정으로 집에서부터 총 8시간이 소요되는 일정이었다.


쉬러 가는 여행인데 이거 진짜 보통일이 아니게 돼버렸잖아.. 그냥 제주도 간다고 할걸. 괜히 오버해 가지고.. 어휴.


디데이가 다가올수록 스멀스멀 올라오는 후회의 민낯이 드러났다.


여행 당일. 새벽 5시부터 부랴부랴 준비해 구불구불 긴 여정으로 하동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해 하동에 안긴 첫 장면은 푸르름으로 넉넉했다. 빙글빙글 지리산에 에워싸여 섬진강의 물줄기를 품고 있는 차고 남음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지?'라고 물어오는 인자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아, 이거 보려고 왔구나.' 이 신에서 만큼은 흐릿하고 뿌연 몸과 마음이 말끔히 씻겨진다. 대충 짐을 풀고 나가 우연히 만난 계단을 따라 들어간 차 박물관에서 운 좋게 다도를 배울 수 있었다. 마감이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는데 인심 좋은 분들이 우리를 마지막 체험자로 받아주셨다.



사람이나 여행지나 첫인상, 첫 이미지가 앞으로의 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안건이 되곤 하는데 첫 느낌의 하동은 은은하게 싱그럽고 다사로웠다. 동네 걷는 길 족족 초록으로 물든 차밭이어서 그런 걸까. 우연히 발 닿은 곳에서 다도를 알려준 선생님의 몸에 스며든 배려가 감사해서일까. 다도 체험이 끝나고도 나의 단순 무구한 호기심 배인 질문들에 선생님은 차분하고 세세하게 알려주셨다.  


녹차잎을 덖는 과정을 거친다고 하셨는데 그럼 잎에 뿌린 농약을 어떻게 처리하나요?


아주 좋은 질문을 해주셨어요! 하동은 법적으로 청정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모든 농작물에 농약을 쓸 수 없답니다. 그래서 이곳엔 축사나 공장도 들어설 수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알수록 투명한 유리병 안에 유연자적 떠다니는 하동이었다. 마치 이런 시나리오가 스쳤다. 무언가에 지친 누군가가 어쩌다 발들인 이곳에서 수수한 보살핌으로 품어질 것 같은 너른 무드의 시나리오. 삶의 중심이 방향을 잃어 마음이 무르고 뭉그러질 때 보면 조용한 위로가 몸에 감겨오는 그런 귀한 영화.




기운 빠진 배로 들어간 식당에선 이곳에서 나는 식자재들로 만들어진 요리들이 어긋남 없는 합주를 하고 있었다. 지리산에서 나는 이름 모를 각양각색 산나물들과 더덕, 처음 보는 생김새로 맞이하는 버섯들, 섬진강에 사는 참게와 재첩으로 만든 요리들이 상을 메웠다. 젓가락질을 할수록 배의 기운이 차고 영혼은 불룩하게 부풀었다.




초록으로 감겨 지낸 이틀간의 하동을 떠나 버스를 타고 구례로 넘어왔다. 구례는 하동보다는 조금 더 새침데기 소녀 같은 이미지였다. 도로 차선이 많아졌고 카카오 택시를 부를 수도 있었다. 구례에는 오기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빵집 하나가 있었다. 첫날 방문하고 마지막 날 기차 타기 전 또 들를 정도로 언니와 내 마음을 모자란 구석 없이 흡족시켰다. 재료 본연의 맛을 해침 없이 잘 살린 구수하고 담백한 빵 맛에는 알고 보니 막대한 비법이 숨어있었다. 사장님의 아버지가 구슬땀으로 키운 구례 토종밀과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팥, 감, 밤 등의 재료들을 적극 활용해 만든 점이었다. 자연과 사람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앙상블의 힘을 맛볼 수 있는 복이 따로 없었다.



역시 직접 와봐야 알아. 이런 맛은, 이런 앎은 두 눈으로 보고 냄새 맡고 듣고 만져 봐야 알 수 있지.


닷새 동안 자연의 향유자로 온몸이 눈이 되고 코가 되고 귀가 되어 감각하고 응답했다. 마음의 층위에 초록색 지붕을 단 집이 하나 더 지어졌다. 이 고유의 동네에는 색이 더해지면서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운 마음의 길이 열리는 집들이 모여 산다. 변변히 미지의 세상으로 들어가 또 다른 낯선 구성원을 업어오고 싶은 근거가 되는 마을이다. 끝이 아니 보이던 무더운 여름의 요정이 퇴장하고 살갗에 선선한 바람이 닿는 계절의 전개처럼 때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는 재미가 흠뻑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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