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우리의 이별에 안전지대가 필요한 이유
“왔어? 웬일이야. 연애하느라 눈코 틀 새 없는 네가 대전을 다 오고.”
2024년 5월. 애인과 헤어지고 얼마 안 지나 서울에서 대전 고향집에 내려온 날. 엄마는 평소와 다름없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펌을 한 지 얼마 안 됐는지 유독 복실거리는 갈색 앞머리가 눈에 띄었다.
“그냥, 할 일 없어서.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약속도 있고.”
“저녁 안 먹었지? 다 차려놨어. 씻고 와.”
엄마는 내 등을 두어 번 토닥이곤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은은한 국 냄새가 현관까지 풍겨왔다. 엄마가 내가 오는 날만 특별히 내놓는 미나리 된장국이었다.
엄마에게 이별한 사실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다만 카카오톡 프로필에 올려 두었던 커플 사진을 전부 내렸기에 눈치를 챘을 게 뻔했다. 다음번에 대전에 올 땐 그를 꼭 소개해준다고 호언장담했기에 조금의 기대를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반숙 상태의 계란 프라이와 짭짤한 김. 겉면을 살짝 태워 바삭한 스팸과 녹진한 된장찌개.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로 밥상이 가득 채워진다.
“잘 먹겠습니다.”
한 입 뜨려는데 눈물이 투둑 하고 떨어졌다. 엄마의 눈길이 뉴스 화면에 쏠려 있어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는 엄마에게 뭐든 숨기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편이다. 아침 메뉴나 직장에서 있었던 일, 남자친구와 싸운 일 등 아주 사소한 일부터 나직나직 털어놓는다. 학창 시절 때부터 그랬다. 엄마가 내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아줌마들과의 티타임 쿠키로 써먹는 게 문제긴 했지만.
엄마는 내가 이따금 털어놓는 고민에 단 한 번도 무심했던 적이 없었다. 심지어 한 밤 자면 물 젖은 솜사탕처럼 사라질 별 것 아닌 고민들조차. 그 모든 게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그땐 몰랐다.
엄마와 내가 모녀지간이 아닌 마치 친자매처럼 지내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린 많은 면이 자매처럼 닮았다. 행동이나 취향, 말투 따위가 처음부터 닮았던 건 아녔다. 어린 날의 내가 '엄마 따라쟁이'였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닮아갔다. 엄마는 젊은 시절 수채화를 그렸고 나는 만화를 그렸다. 엄마는 단색 계열의 옷을 즐겨 입었고 나는 화려하지 않은 흰 옷을 자주 입었다. 엄마는 진분홍 립스틱을 발랐고 나는 샛분홍 틴트를 칠했다. 그 정도로 나는 엄마를 좋아했다.
수년간은 귀 밑으로 똑 떨어지는 칼단발을 쌍둥이처럼 잘라오기도 했다. 찰랑이는 머리가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짧은 머리 역시 엄마가 먼저 시작했다. 나는 수능이 끝나자마자 미용실로 달려가 어깨까지 오던 머리를 썩둑 잘랐다. 엄마랑 똑같은 색으로 염색도 했다.
엄마는 돌연 미소년이 되어 돌아온 딸의 팔을 잡아끌고 부엌 거울 앞에 나란히 앉았다. 올망졸망한 눈코입, 뾰족한 턱, 귓가에 스치는 갈색 머릿결. "못난이 인형들이 따로 없네." 엄마가 불쑥 꺼낸 말에 우린 밤새도록 웃음을 터트렸다.
우린 사춘기를 달렸던 10대 시절에도 크게 부딪친 적이 없었다. 불씨처럼 튀어 오른 말싸움도 채 몇 마디 오가기 전에 쫑이 났다. 문득 사이가 어색해질 땐 식사 몇 번에 맞웃음을 지었다. 여느 베스트 프렌드가 그렇듯 서로를 향한 다정함을 놓치지 않는 게 비결이었다.
엄마가 어떤 사람인 지 조금 더 자랑하자면 소위 '동네 대표 마당발'이다. 내가 막 유치원 들어갈 때쯤 혼자 집에 있기 무료해진 엄마가 동네 교회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시작이었다.
흰 얼굴과 진한 쌍꺼풀이 진 큰 눈, 높은 콧대까지. 여느 배우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외모를 지닌 엄마를 초면에 낯설어하는 사람도 많이 없었다. 유독 사람 사귀길 좋아하는 쾌활한 성격도 한 몫했다. 엄마는 교회 안에서 금세 자기 사람들을 만들었다.
여느 교회가 그렇듯 어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인 셀모임은 자식과 남편 얘기가 신명 나게 오가는 다과회로 바뀌곤 한다. 그렇게 해서 엄마가 인연을 맺은 사람은 세 트럭도 모자랄 테다. 동네 닭갈비 사장님도 아는 사람, 새로 생긴 꽈배기집 젊은 청년도 아는 사람, 대형 베이커리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여자애도 아는 사람.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네가 서 권사님 딸이구나!"하고 길거리에서 불쑥 인사를 건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딸내미 얼굴을 대문짝만 하게 올렸으니 모를 턱이 있나.
엄마는 외부 활동에도 열심이었지만 나와 두 살 터울의 오빠에게도 허술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본가를 찾으면 부엌 테이블 위엔 늘 과자와 음료수 따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냉장고를 열면 한 면에는 내가 좋아하는 요플레와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다른 면에는 저녁에 구워 줄 마트 소고기가 재워져 있었다. 엄마는 나란히 자취를 하는 남매가 집밥을 먹고 싶도록 유혹해 집에 자주 오게 만들 '먹거리(?)' 전략이라고 했다. 그 한 마디에 남매를 향한 그리움이 온통 묻어있단 걸 누가 몰랐을까.
특히 딸인 내게는 더욱 다정하게 구셨다. 시시콜콜 전화를 걸었고 아빠와의 일상 사진을 종종 보내곤 했다. 캠핑 가서 양고기와 파프리카를 구워 먹는 모습, 대전 하천변 둘레길을 손 잡고 걷는 모습, 외할아버지댁 농장에서 시벌게진 얼굴로 감을 따는 모습.
"즐거워 보이네" 일하다가 무심히 메시지를 보내면 엄마는 꼭 한 마디 덧붙였다.
"너도 와. 같이 놀자. 언제 대전 와?"
그런데 그렇게 목 빼고 기다렸던 딸이 고작 애인과 헤어졌다며 눈이 퉁퉁 불어 본가엘 왔으니. 토요일 아침. 오전 9시도 채 되기도 전에 엄마가 방문을 슬며시 열었다. 난 새벽 내내 울어 홍시처럼 붉어진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렸다. 엄마는 나의 예민함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레 배게 옆에 앉으며 물었다.
"딸, 엄마랑 데이트 갈까?"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유명한 칼국수 집이 하나 있었다. 티브이에도 몇 번 나오고 매번 문 밖에 타지에서 온 사람들의 줄이 늘어진 곳이다. 베이커리로 유명한 대전이 칼국수도 맛있다는 소문이 커져 명언처럼 확실시됐다. 누구의 계락인 진 모를 일이다. 맛은 그리 특별한 건 없었다. 조개들이 와글와글 들어가 국물이 퍽 개운하단 점 빼곤.
오전 11시가 되자마자 가게를 찾았건만 인산인해다. 발꿈치를 살짝 들어 창가 안을 들여다보니 대부분 지역민들은 아니다. 캐리어를 옆에 낀 사람들과 외국인들이 김이 폴폴 나는 칼국수 그릇을 통째 들고 마시고 있었다. 대기줄을 보아하니 30분 내로도 사람은 빠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미안해. 식당 오기 전에 미리 연락하고 왔어야 하는데."
"엄마가 뭐가 미안해? 원래 이 식당 사람 많은 건 알고 있었잖아. 이 주변에 식당 많아. 다른 데 가자."
"우리 딸 맛있는 거 먹이고 싶었는데."
엄마는 마치 기차 놓친 사람처럼 식당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가게 아르바이트생에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냐고 재차 물었다. 그 부산스러움의 이유를 알기에 평소처럼 핀잔을 줄 수 없었다. 그저 말없이 엄마 손을 끌고 칼국수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돈가스집을 찾았다. 영업용 미소를 가득 띤 아주머니가 우릴 반겼다. 매장은 가족끼리 온 손님과 커플 몇몇이 조용히 식사하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우린 돈가스와 메밀국수를 주문했다. 국물은 싱거웠고 돈가스는 기름이 빠져 퍼석퍼석했다. 나는 한 입 물고 우물이다 목구멍으로 넘겼다. 속에 얹힌 듯 목구멍 아래가 꽉 막혔다. 엄마는 내내 나의 기분을 살피는 듯했다. 이따금 농 섞인 아빠 험담이나 친구 아들 얘기를 하긴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때 나는 마치 슬픔으로 내면을 빵빵하게 채운 풍선 같았는데, 누군가 말이나 행동으로 바늘을 콕 찌르면 눈물이 빵 하고 터져버릴 참이었다.
"엄마, 나 헤어졌어. 이제 일주일쯤 됐나."
먼저 나의 상황에 대한 말을 꺼냈다. 이미 벌어진 외적 상황을 말로 표현하니 정말 내게 있었던 일이란 게 실감이 됐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메밀을 한 입 가득 넣고 꾹꾹 눌러버렸다. 엄마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곤 나를 응시했다. 엄마는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주일이면 아직 힘들 때네. 이번엔 좀 오래갈 것 같더니."
"응.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근데 엄마. 생각보다 그 사람 나랑 잘 안 맞았어. 나 별로 안 행복했어. 헤어져야 하는 걸 알았는데 헤어지지 못했어. 사귀면서 속이 많이 앓았는데 그냥 이별이 싫어서 참았나 봐. 너무 바보 같았어 "
어제는 언제까지고 이별 사실을 숨기고 싶었는데 막상 털어놓고 나니 하소연이 콸콸 쏟아졌다. 10여 년 전 고등학교 2학년 때 사귀던 학교 선배랑 헤어졌을 때가 생각났다. 엄마와 외식을 하러 가던 차 안에서 눈물콧물 터트리며 이별 소식을 털어놨었다. 운전대를 잡은 엄마는 별안간 펑펑 우는 딸을 옆에 앉힌 채 안절부절 밤길 차도를 달렸다. 철부지 딸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언젠가 괜찮아질 거야. 시간은 또 흐르잖니. 사람에겐 그마다 맞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야. 그때는 하나님만이 아실뿐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어."
"나도 알아. 하지만 그 사람이 나랑 맞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착각하면서 긴 시간 함께 하다 보니, 이별을 하고 나서 생긴 빈자리를 견딜 수가 없어. 내 착각에 대한 한스러움이나 후회, 배신감. 그런 거 같아."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하긴 했구나. 우리 딸, 어른 다 됐네.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하고."
그 말에 눈물이 여과 없이 터져 나왔다. 엄마의 말들 중에 어떤 단어가 나의 마음을 어루만졌는지는 모르겠다. 모든 단어가 그랬다. 엄마는 가만가만히 내 손을 쓸었다. 차갑게 식은 돈가스 몇 조각이 기름진 잔향을 풍겼다. 엄마도 맛이 없었나 보다.
"그런데 있잖니. 주위를 둘러봐. 네 곁에 앉아 있는 가족들. 우리 뒷자리에 앉은 젊은 커플. 그리고 저기 매장에서 일하는 젊은 부부. 다들 처음부터 서로를 알아보고 만났을까.
저 사람들도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거치고 난 뒤에야 저 자리에서 함께하고 있는 거야. 원래 만남이 그래. 인연이 그래. 한 없이 아파하면서도 결국 누군가와 함께하는 거야. 그게 사랑이야."
"엄마, 엄마는.. 아빠를 어떻게 만났어?"
"소개팅으로 만났지. 서울에 사는 촌놈과 광양에 사는 귀한 처자 둘이." 엄마의 말에 작게 웃음 터트렸다. 엄마는 그날을 회상하는 듯 맑은 웃음을 입가에 걸며 말을 이어갔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금방 느낄 수 있었지. 너네 아빠가 오죽 순한 사람이야. 말 수도 별로 없고 유머스럽지도 않았지만 선한 사람이란 건 금방 알 수 있었어. 말투나 태도에서 묻어나는 순박함이 참 맘에 들더라고.
그렇게 한 번 만나고 두 번 만나고 마지막 세 번째 만났을 때 너네 아빠가 손 달달 떨면서 고백하더라. 매 항시 무덤덤하고 침착했던 사람이.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뭔가, 이 사람하고 결혼할 것 같은데?' 그런 꽤 유치하고 대담한 예감이.
연애 처음은 그랬지. 우리도 많이 싸웠어. 너처럼 매일 지지고 볶고 헤어지잔 말도 몇 번 오갔어. 너도 알겠지만 너네 아빠가 감정 공감을 잘 못하는 사람이잖아. 사랑 표현도 어찌나 안 하는지 답답하지 그지없었지. 그에 반해 엄마는 평소 표현도 많고 꽤 감성적인 편이니까. 이 사람은 나를 분명 사랑하는 게 맞는 걸까, 나랑 결혼할 생각은 있는 건가. 그런 서운할 때도 많고 아쉬울 때도 많았어.
근데 어떤 면에서 이 사람을 확신했냐면. 문득문득 뒤에서 말없이 포옹해 줄 때. 수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군말 없이 차로 데리러 올 때. 무료해 보이면 가만히 짐을 싸서 국내 여기저기를 여행 다닐 때. 그때도 지금도 전혀 변함없는 모습에. 사랑은 시간이 흐르면 분명 어떤 형태로든 변하지만, 그 사랑이 끝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건 또 다른 얘기란다.
예전에 그런 일도 있었어. 결혼 초반 때 시부모님이 엄마를 별로 안 좋아하셨거든. 그래서 시댁을 오가는 일이 늘 엄마한텐 고역이었지. 명절에 시댁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자주 삭히기도 했어.
그러던 중에 집으로 시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서 받았는데 또 잔소리였던 거야. 엄마가 잔뜩 주눅 들어서 무릎을 꿇고 전화를 받고 있는데 아빠가 대뜸 전화기를 뺏더니 버럭버럭 화를 내는 거야. 연애 때도 작은 성질 한 번 부린 적 없던 사람이.
'그 사람 제 아내예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제발 그만 좀 책망하세요!' 그러고 전화를 확 끊더라. 너네 아빠가 네 남매 중 막내잖아. 애지중지 귀염과 사랑만 받던 차분한 막내가 그렇게 화내는 걸 시부모님도 난생 첨 봤다고 하더라고. 그 후론 시부모님과 관계가 조금 서먹해지긴 했지만 당시 엄마는 그래도 괜찮았어. 엄마에겐 영원한 내 편이 생긴 거니까."
내 전 남자친구는 그랬다. 그는 연애 초반엔 활활 타오르듯 나를 안았지만 몇 달 채 지나지 않아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태도가 달라졌다. 나는 하루가 끝날 때 늘 사랑한다는 말로 맺음을 지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 흔한 예쁘단 말도 보고 싶단 말도. 연애 초에 흘리듯 말한 게 전부였다.
그에게 미련하게 연연했던 건였다. 그의 모든 행동과 말투에서 일말의 사랑을 찾으려고 늘 불안에 젖어 있었다. 아빠처럼 굳이 찾지 않아도 보이는 게 사랑인데. 너무나 겉으로 투명하고 순수해서 스치기만 해도 묻어나는 게 사랑인데. 그걸 기어코 증명하려 애쓴 내가 바보였다.
"엄마도 지금의 아빠를 만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인연을 만나고 보내줬겠니. 영원한 내 편을 찾아가는 여정이 그리 쉬울 줄 알았니. 다만 그 길이 힘들고 고된 만큼 더욱 너와 맞는 사람. 배울 점도 많고 든든한 너의 편을 분명 만나게 될 거야.
엄마도 매 인연을 만날 때마다 첫사랑처럼 사랑하고 끝사랑처럼 보내줬어. 그리고 너의 아빠를 운명처럼 만나 너와 너희 오빠도 세상에서 만날 수 있었지. 이렇게 큰 행운을 젊은 날의 내가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니.
그러니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야. 그래서 삶이 재밌는 거야. 인연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고 삶은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툴툴 털고 즐기며 살아. 네가 내 딸인데 어디 좋은 사람 못 만나겠니."
엄마, 문득 엄마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엄마는 어린 사춘기 딸을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옆 테이블에서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젊은 부부의 얼굴도. 그 순간 나는 이별 후 처음으로 잔잔한 파도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아주 마음 깊은 곳의 나의 작은 바다가 비로소 아픔의 파동을 끝냈다.
엄마는 내게 단 한 명의 '안전지대'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위로의 존재다. 30년 동안 내가 어떤 시간 속에 살면서도 오롯이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엄마가 언제토록 내 편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영원히 내 곁에 있을 수 없단 건 안다. 언젠가. 나는 안전지대를 잃어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에게 나를 기댄다. 그 따뜻한 품에 비집고 안긴다. 한 없이 울고 쿵쿵대고 아픔을 쏟아낸다. 엄마는 늘 온전히 나의 감정을 안아주었다. 그리곤 다시 내가 밖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었다. 엄마 만이 딸에게 건넬 수 있는 허물어지지 않는 사랑이다.
우린 집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카페를 찾았다. 동네마다 하나씩 있을 법한 작은 카페다. 우린 엄마가 추천한 아인슈페너 두 잔을 마셨다. 커피 위에 올려진 새하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동그랬다. 울적하고 지독했던 감정도 아이스크림 한 입 맛보고 나니 금세 누그러졌다. 문득 엄마가 내 눈을 맞추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