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고전, 리딩극으로 '예술가,자아,삶' 묻는 존재론적 질문
“죽음을 욕망하다니!”
최근 아는 동생과 관극 후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제 뇌리를 스치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구린 예술이라는 노래에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 말에 왜인지 가슴에 불편함이라는 가시가 미묘하게 통증을 전해왔습니다. '예술가는 가난해야 한다'는 통념에 대한 진정한 저의가 과연 무엇인지, 저는 집에 가는 길 내내 그 생각에 맴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에 대한 고찰을 담은 한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한 리딩 연극을 통해 저의 오랜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바로 연극 <황야의 이리>입니다. 네버엔딩플레이에서 '현 시대의 고전, 새롭게 무대에 오르다'라는 기획 의도로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리딩 쇼케이스 '암전' 시리즈의 레퍼토리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1927년 출간된 헤르만 헤세의 동명 소설 『황야의 이리』를 재구성과 각색을 가미해 희곡으로 구성했습니다. 헤세가 50대에 자신을 투영하여 쓴 이 소설은, 주인공 '하리 할러(Hari Haller)'가 자신의 분열된 자아를 '인간'과 '이리'로 인식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걸작입니다.
연극 <황야의 이리>는 원작의 핵심적인 서사를 살리되, 인물의 성별과 설정을 일부 수정하여 무대로서 더욱 현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각색을 가미했습니다. 극은 고모의 집에 세를 들어 칩거하며 사회 규범 속에서 고립되어 방황하는 '하리'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는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죽음을 맴돌던 중, 우연히 동네에 있는 '마술 극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낯선 방문객의 도움으로 마술 극장 안으로 입장하게 되면서, 정체되어 있던 자신의 예술 감각을 깨우치기 시작하죠.
서두에 인용된 "죽음을 욕망하다니!"라는 말은 바로 사회와의 단절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하리 할러의 깊은 절망과, 동시에 죽음을 통해서라도 이 절망에서 벗어나고픈 그의 복합적인 내면을 보여주는 비명과도 같습니다. 연극은 바로 이러한 하리의 양가감정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몽환적인 공간에 담아냅니다.
연극 <황야의 이리>는 자신의 예술과 영감을 대변하는 여러 페르소나들, 즉 '헤르만', '마리안', '파블로'와의 교류와 소통을 통해 하리가 예술과 영감에 대한 자아의 일치와 통합을 찾아가는 과정을 각색을 통해 잘 풀어냈습니다.
원작 소설에서 이들은 하리 할러의 내면에 존재하는 다양한 측면을 상징합니다. 헤르만은 그의 지적인 자아와 고결함을, 마리안은 감각적인 자유와 해방을, 파블로는 본능적 즐거움과 현실적 쾌락을 대변하며, 하리는 이들과의 교감을 통해 자신의 분열된 자아를 이해하고 통합하려 애씁니다. 이를 시각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소품과 무대를 구성하여 극 중에서 표현하는 몽환적인 공간에 대한 표현과 조명을 활용하여 인물의 심정 변화를 복합적으로 잘 나타낸 무대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장면 전환을 넘어, 하리의 내면 풍경 그 자체를 비추는 듯했습니다.
사회 규범 속에 황야에 홀로 남은 이리처럼 고립되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죽음을 쫓던 하리가 마술 극장을 통해 진정으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예술과 자아 통합을 이루기 위한 내면의 갈등과 성장을 함축적으로 잘 담아냈습니다.
그렇기에 연극 <황야의 이리>를 보면서 저는 예술을 만들기 위해 예술가 본인이 내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창작의 고통을 무대로서 직접 접할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리 할러의 번뇌는 단순히 그의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예술을 추구하는 창작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실과도 같습니다. 예술은 고립된 영혼을 구원하고 자아를 통합시키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음을 작품은 역설합니다.
다만, 헤세의 철학이 깊이 담긴 작품이기에 연극 <황야의 이리>는 분명 난해한 지점이 존재합니다. 상징적인 장면이나 은유적인 대사가 많아 관념적으로 느껴지거나, 주제가 여러 방향으로 산개되어 난해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극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높아야 하는 작품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추후 본 공연을 진행한다면, 관객들이 이야기의 흐름과 인물의 변화를 더욱 직관적으로 따라갈 수 있도록 플롯을 좀 더 명확하게 각색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황야의 이리>는 헤세의 소설을 알리며 예술가의 영감과 예술로의 승화에 대한 원작자의 고심과 고백을 극으로 접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예술을 향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재능이 부재한 한 인간으로서, 저는 예술가의 성장과 성찰을 선망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금 자각하는 경험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황야의 이리'처럼 사회 규범 속에 갇히거나 스스로 고립되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신만의 '마술 극장'을 찾아 자아를 통합하는 여정이 필요함을 이 작품은 이야기합니다. 이 연극이 당신에게도 자신만의 '이리'를 마주하고,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작성자 정보]: 은밀한 수집가, 丁火 丁海緣 드림
[질문]: 연극 <황야의 이리>를 보면서 당신의 마음에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내면의 이리'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혹은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가의 성장'이란 어떤 여정인가요? 댓글로 함께 이야기 나눠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