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대한 사실과 해석이 기록으로 진실된 시대

기록이 권력이 된 밀실 속, '누가 말할 수 있는가'를 묻는 심리 스릴러

by 은밀한 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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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뭘 알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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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히 사회안에 숨어 기록을 하는 저는, 현대의 기록 중에서 가장 기억을 의존하는 고전적인 기록을 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현대에는 기록의 다양성과 편의성이 생겼기에 최근에는 '포렌식'이라는 말이 익숙해질 정도로, 기록은 일상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기록은 평상시에는 존재하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증거이자 권력'으로서 살아 숨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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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기록이 권력의 산물로 변모하여 힘으로 상황을 장악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 연극 <테이프>에 대한 후기를 작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품은 '기억에 대한 사실과 해석을 기록은 묵살시킨다'는 뼈아픈 명제를 던지며, 진실을 재단하려는 우리 시대의 단면을 날카롭게 보여줍니다.




모텔 방에 갇힌 진실: 녹취로 시작된 심리 공방


연극 <테이프>는 스테판 벨버(Stephen Belber)의 작품으로, 창작집단 결에서 제작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연극 '시추'를 선보여 작년 많은 관객들에게 화제가 되었던 극단이죠. 창작집단 결은 힙합무용극 '킬링맥벌스', 카톡참여극 '햄릿재판' 등 다양한 형식과 주제의 작품들을 기록하고 선보여왔습니다. 이러한 극단의 실험적이고 독특한 색깔이 밀실극 <테이프>에서는 어떤 긴장감을 만들어낼지 기대가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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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영화제 참석을 위해 뉴욕을 방문한 감독 존이 친구 빈스의 모텔 방으로 저녁 식사를 위해 찾아오면서 시작됩니다. 그곳에서 빈스는 존에게 과거 존과 에이미 사이에 있었던 사건의 진실을 집요하게 캐묻습니다. 존이 대화를 회피하려 하자, 빈스는 자신이 이미 존과의 대화를 테이프에 녹음하고 있음을 밝히고, 잠시 후 사건의 당사자인 에이미가 자신의 모텔 방으로 올 예정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세 남녀의 숨 막히는 진실 공방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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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 방이라는 밀실은 그 자체로 외부와 단절된 하나의 법정처럼 기능합니다. 이곳에서 3인은 과거 고등학교에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과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진실을 둘러싸고 존과 빈스는 팽팽한 힘겨루기를 이어갑니다. 이 연극은 단순히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며, 발화 주체의 권력과 기록의 정치성을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진실의 실종: 기록이 만들어낸 '믿고 싶은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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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테이프>는 그들이 과거 고등학교에서 발생했던 사건을 통해 '동의에 대한 정의'와 같은 중요한 질문들을 불편하지만 빈스와 존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진실의 모호함'과 '기록의 권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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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사건 속 존은 분명 전 애인인 에이미에게 애인으로서 성적 폭력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에이미 역시 존에게 지울 수 없는 물리적 폭력과 상흔을 남겼음이 드러납니다. 이는 두 인물이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양가적인 감정과 입장이 동시에 존재하며, 그 행동의 당위성이 사랑인지 분노인지 하나의 감정으로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는 복합성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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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은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을 흑백논리나 확증편향, 그리고 일반화의 오류 등으로 재단하려는 시도의 문제점을 잘 보여줍니다. 사건의 당사자인 에이미가 결국 진실을 이야기했을 때조차, 존과 빈스는 그 진실의 진위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싶은 정답과 정의'를 강요합니다. '기록'이라는 물질적인 증거에 매몰되어, 결국 진실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기록의 주최자는 그것을 무기 삼아 타인을 억압하고 조정하는 추악한 권력 게임으로 변질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기록의 권력화: 현대 사회를 비추는 거울


<테이프>가 전하는 주제는 오늘날 미투, 증언, 폭로, 녹취, 여론 재판 등 다양한 사회적 상황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말하는 자의 위치, 기록의 정치성, 그리고 피해 언급 후 발생되는 2차 가해의 위험 등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요소들 속에 정작 '사건의 진실'과 '당사자의 입장과 기억'은 묻히거나 왜곡되는 비극적 현실을 상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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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존과 빈스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이나 올바른 정의가 아니라, 오직 '자신들이 납득 가능한 진실과 명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예, 자존심, 권위 등을 지키고자 당시 사건의 진실이나 순수한 기억을 파악하기보다, 자기 합리화를 위한 '추한 현재'만 남게 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비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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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테이프>는 최근 많은 사건 사고가 넘치는 현재의 사회에 맞닿아 있는 여러 지점이 존재하는 작품이며, 깊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 속 많은 익명의 군중들 역시 연극 <테이프>의 빈스처럼 사건의 진실 자체보다는, 누군가를 굴복시키거나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기록의 진실'과 '공개 재판'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혼돈의 시대, 진정한 정의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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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테이프>는 무너진 신뢰와 갈등으로 점철된 현대 사회 속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맹신하는 신념이 어떻게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예리하게 보여줍니다. 모호한 사건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선과 악의 이분법적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지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지적인 불편함과 깊은 성찰을 선사합니다. 해체주의적 무대와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는 복잡한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기록'과 '정의'의 열매가 과연 진실을 회복할지, 아니면 또 다른 파괴를 가져올지에 대해 묻습니다. 이 연극은 모든 일에 '올바름'이 절대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애매모호한' 영역이 더 많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사유하게 만듭니다. <테이프>를 통해 던져진 질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든 점에서 인상 깊은 작품이었으며, '사유하는 관객'으로서 우리의 몫이 무엇인지 일깨우는 강력한 작품이었습니다.


[마무리]

[작성자 정보]: 은밀한 수집가, 丁火 丁海緣 드림

[질문]: 연극 <테이프>를 보면서 여러분에게 가장 깊이 와닿은 '기록의 권력'은 무엇이었나요? 혹은 이 작품이 여러분의 '진실 판단'에 어떤 질문을 던졌나요? 댓글로 함께 이야기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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