썅.
입 안에서 긴장도를 높이며 강하게 파열되는 소리다. 갑자기 들으면 1초쯤 주춤하며 멍해진다. 무슨 말인지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만, 너무 짧아서일까. 알 수 없다.
최 할머니는 혼잣말을 잘한다. 앞에 사람이 있어도 말을 주고받지 않는다. 마치 질문처럼 느껴져서 대답을 하려고 하면 벌써 다음 말로 이어진다. 끼어들 여지도 없지만, 남의 말을 듣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작은 소리도 아니다. 누구든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오늘도 의자를 찾아서 앉으며 굵고 강하게 던진다. 그 말의 여운은 길게 간다.
‘다리가 쑤셔 죽겠어. 허리도 아프고. 주사를 맞아도 물리치료를 해도 그날이 그날이야. 아이고 몸이 다 됐으니 걸어 다니기도 힘들어서 집안에 주저앉고 말겠어. 수술을 두 번이나 했는데 다리 허리가 이렇게 말썽이니 제대로 살겠나. 자식들은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는데 바깥구경 안 하고 어떻게 살아.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면 엄살이 심하다고 말하는데 나이 들어봐. 내 말할 거다. 옆집 할머니 봐 늘 귀부인 노릇만 하니까. 지금도 곱잖아. 평생 먹고살려고 일하다가 세월 갔으니 그럴밖에, 좋은 세상 만났어봐 나도 그렇게 늙지. 곱지 않아도 돼 이놈의 다리만 아프지 않았으면, 허리는 힘도 못쓰고 자꾸 앞으로 고꾸라지네. 목욕탕 매점에서 돈 버느라 잠도 못 자고 햇빛 못 보고 애들 제대로 밥도 못 끓여주고 쭈그리고 앉아서 라면이나 먹고. 햇빛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뭐, 나중에 햇빛 보니까 하긴 별것도 없었어. 그렇게 모은 돈 아들이 홀딱 까먹고 그 뒤로 닥치는 대로 일해서 지금까지 살아왔어. 이제 살만 한데 몸이 아파서 살 수가 없네. 사람 일 뜻대로 안 된다니까.’
의자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진열대 사이로 들어간다. 휘청거리는 몸과 질질 끄는 다리 때문에 위험하다. 진열대에 부딪히거나 넘어질 것 같다. 냄비가 진열된 사이에 앉아서 이리저리 냄비를 둘러본다.
‘냄비를 싹 다 태워버렸어. 찌개 올려놓고 데우다가 폭삭 태워먹었고, 고구마 삶다가 깜박하고 텔레비전에 정신 팔다가 냄비 못쓰게 만들었어. 집에 있는 냄비란 냄비를 죄다 태워버렸더니 남아있는 냄비가 없어. 싼 것 사다가 써야지 좋은 것 다 필요 없어. 뭣보다 불날까 봐 큰일이야. 다리도 부실한데 불나면 어떻게 도망 나와. 위험하지. 근데도 정신 못 차리고 또 태웠으니. 이제 정신 차려야지. 이번엔 전화 때문에 그랬어. 막 찌개 냄비를 올려놓고 있는데 전화가 온 거야. 전화를 받았더니 할머니 통장에 있는 돈을 뺏으려고 누군가 압류를 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거라. 그래서 빨리 돈을 찾아서 다른 통장에 넣어야 한다고 해서 막 혼내줬어. 정신 차려 이놈들아. 소리 지르다 보니 타는 냄새가 나서 놀라서 가보니 냄비가 까맣게 탔어. 이건 얼마지? 왜 이렇게 비싸지. 좋은 물건이긴 한가. 하긴 태워버릴지 모르니 싼 거 사야지. 오래 쓸 수 있지? 하긴 오래 쓸 수 있으려나. 또 태우면 다시 사야 하는데. 그때도 이 냄비 있겠지. 다시 태울 걱정에 다음 냄비를 또 사려고 미리 얘기해 버리네. 아이고 다리야. 허리야. 의자 어딨어. 의자. 냄비는 오래 쓸 수 있나. 어디 보자 흐흐 제 값대로 있다가 버리는 것도 아닌데 또 좋은 냄비 타령을 했네.’
그때 최 할머니 전화벨이 울린다. 작은 가방에서 이리저리 전화기를 찾느라 바쁘다. 힘들게 전화를 꺼내더니 통화버튼을 누른다. 첫마디를 내뱉는다. ‘썅’
‘국제전화는 무슨 누가 외국에 나갔다고 틀렸어. 잘 못 알았어. 이놈들아. 내가 돈 좀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그렇게 내 돈 뺏으려고 난리라니까. 또 전화질을 하고 돈 냄새는 어떻게 맡는지 신기해. 내가 돈 있게 생겼나. 암만 해봐라. 내 돈 뺏을 수 있나. 난 절대 안 속는다. 내가 어떻게 돈을 모았는데. 아들이 와도 이젠 어림없다. 내 목숨 값이여 살아가는 동안 병원비하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돈을 감히 뺏으려 해. 강 할머니가 네 놈들한테 돈 뺏기고 머리 싸매고 누워 있더니 이제 정신도 온전치 못한 거 같은데 그게 다 네 놈들 탓이여. 벼룩이 간을 내 먹지.’
전화는 끊어진 지 오래다. ‘썅’ 그다음에 오는 말은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친 음절이 몇 개가 있다. 놈, 년, 스럽게. 이상한 게 최 할머니는 꼭 말 줄임을 하듯 이런 말을 끝까지 말한 적이 없다. 최 할머니의 교양이 묻어나는 절정의 말이다. 듣는 사람도 거친 말을 다 듣지 않고 속으로 그다음 말을 이어갈 수 있다. 서글픔이나 분노를 속으로 나직하게 말하게 하는 최 할머니의 방법은 듣는 사람마다 서로 모르게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