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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Jan 24. 2024

미션! 모서리를 없애라!

모난 것은 모두 감추어야 한다.

어느 날 문득 주변 풍경이 생경했다.

무엇 때문일까? 갑자기 왜 이런 느낌이 들까?

들고 있던 가위를 내려놓았다.

나는 가위로 포장지를 자르던 중이었고,

자른 뒤에 모서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때 나의 세계에서 너무나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던 모서리가 익숙해졌다 갑자기 어색했다.




유치원은 모서리 없는 세상이다.

아이들은 비교적 뭉툭한 모서리에도 더 쉽게 다치니

그 어떤 소재의 물체도 모서리가 있어선 안 되었다.

당연하게 존재하는 모서리들에

동그란 모서리 보호 쿠션을 붙여 모서리의 존재를

없애는 건 유치원에서 일종의 의식이었다.


이제 새 학기를 시작하겠다는 의식

유치원 평가를 준비한다는 의식

안전사고에 콩알만 해진 교사의 심장을 달래는 의식

아무도 다치지만 말라는 간절한 의식

교사로 존중해주지 않지만 내 제자를 지킨다는 의식

이곳의 모서리는 모두 없애고 숨기는 의식


사람의 일상에 당연히 존재하는 입체 모서리에는

몽땅 모서리 보호 쿠션을 붙였고,

평면 모서리는 몽땅 모서리 제거 둥근 펀치를 썼다.

내게 모서리는 언제가부터 없애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아무리 모서리를 없애도,

아이들은 다치곤 했다. 어른들도 다치곤 했다.

누군가가 다치고 난 뒤에는 다시 한번 토끼 눈으로

모서리를 찾아 없애는 의식을 치렀다.

무조건반사처럼 모서리를 보면 없앴다.





유치원에 있던 어느 날부턴가 둥글게 보호해 놓은

모서리가 사방에서 날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둥근 모서리들은 사방에서 나를 찌르는 듯했고

애플워치에서는 또 심박수 경고가 떴다.

경고가 울리면 아이 앞에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곧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와, 나 정말 심각한 정신병 환자다.

모서리를 억지로 없애면 남들은 안 다치지만

나는 쿠션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를 없애 놓은

모서리에도 찔려버리는 사람이었다.

이쯤 되면 이 유치원의 모서리는 내가 아닐까?
나의 존재는 가려지는 모서리처럼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걸까?

그렇게 점점 나 스스로 나를 ‘이 조직의 모서리’로

여기게 되었다.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존재.

나만 없으면 이 유치원에 갈등이란 없고 모두가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런 날에는 유에스비를 손에 쥐고 병조퇴를 썼다.

버스에서 겨우 호흡을 잡고 집에 와서 일을 했다.

나는 ‘두통, 현기증, 울렁거림, 구역감 등등등’

수많은 증상들, 매번 다른 사유로 병조퇴를 썼지만

사실 진짜 사유는 단 하나였다.

나는 이 유치원의 모서리니까.

존재하고 싶다면 나를 꽁꽁 싸매 가려야 하니까.

그런데 내 숨이 조여오니까. 일단 도망가는 수밖에.





유치원에서 꼭짓점이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건

물건에게도 사람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존재하려면 ‘내 존재를 없애버려야’했다.


내가 이곳에서 내 모남을 감추어 산다 해도

존재를 가리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모습을 존중하는 곳이 교육기관이라는데

현실은 절대 튀어나오면 안 된다.

숨겨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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