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by 자봉

어제는 안양천 둑방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을

구경하고 왔더니 같은 날 공직을 함께 시작했던 동료에게서 노인 무임 지하철이라는 가십거리

신문기사를 복사하여 카톡으로 전달되었다


은퇴 이후 행정사라는 자유로운 업종으로 오전 10시가 지나야 출근하니 노인이 되었다고 해서 출근시간에 무임으로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아 민폐대상은 아닌 것 같아 천만다행이다


3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방행정 공무원으로 재직하며 무수히 오갔던 그 길 들이지만, 퇴직 후 '행정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시 마주하는 지하철역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예전에는 출근 전쟁을 치르는 시민들의 바쁜 발걸음만 보였다면, 이제는 개찰구 앞에 멈춰 서서 지갑을 뒤적이는 나와 닮은 노인들의 뒷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최근 한 신문 칼럼에서 본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에 관한 이야기는 종일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런던의 사례를 들어 출근 시간대에는 노인들도 요금을 내야 한다는 주장과, 갈수록 불어나는 적자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통계 수치들. 행정사로서 그 숫자들의 정당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차가운 숫자 뒤에는 평생을 이 도시의 기틀을 닦는 데 바쳐온 한 세대의 땀방울이 서려 있다는 사실을, 누가 감히 외면할 수 있을까.

지하철 안에서 마주치는 젊은이들의 눈빛을 가끔 살핀다. 스마트폰에 고개를 묻은 그들에게 '무임승차'를 하는 노인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미래를 갉아먹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행정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수익자 부담 원칙'과 '복지의 보편성' 사이의 갈등이다. 하지만 삶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먼저 길을 간 자'와 '그 길을 이어받은 자' 사이의 이해와 배려의 문제다.

칼럼에서 제안한 것처럼 출근 시간대 요금 부과나 노인 연령의 상향 조정은 분명 검토해 볼 만한 행정적 대안이다.


런던처럼 특정 시간대의 혼잡을 피하게 유도하는 것은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지혜로운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제한'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노인들이 지하철을 타고 밖으로 나와 누군가를 만나고, 도서관에서 신문을 읽고, 만보기를 채우며 건강을 돌보는 행위는 결국 국가 전체의 의료비 절감과 노인 고립 방지라는 더 큰 사회적 편익으로 돌아온다.



나는 오늘도 개찰구를 통과하며 잠시 멈춰 선다.

이 카드가 주는 혜택은 단순히 '무료 통행'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50년,

아니 이 땅의 노인들이 보낸 수십 년의 세월에 대해 사회가 건네는 최소한의 경의라고 믿고 싶다.

96세의 아버님을 모시며, 또 두 딸이 사회의 역군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끼는 것은, 세대란 결국 서로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는 거대한 피라미드와 같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정치가나 행정가들이 단순히 '적자'라는 단어 뒤에 숨어 세대 갈등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정직한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는 노인 복지가 곧 자신들의 미래임을 설득하고, 노인 세대에게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조금씩 양보할 수 있는 용기를 구해야 한다. 나 역시 행정사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이 징검

다리를 놓는 일에 기꺼이 마음을 보태고 싶다.



가끔씩 글쓰기를 위해 종종 찾은 평생학습관 창밖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비춘다

오늘도 1만 보의 걸음을 채우기 위해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하지만, 무임승차 제도가 어떻게 변하든,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차가운 숫자가 아닌 따뜻한 온기를 머금었으면 한다.


지하철은 오늘도 멈추지 않고 달린다.

그 안에는 우리 아버지의 어제와, 나의 오늘과, 내 자녀들의 내일이 나란히 앉아 있다.

우리가 함께 탄 이 열차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무게를 기꺼이 나누어지려는 넉넉한 마음이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항상 퇴근시간 전 오후 다섯 시 이전에 집으로 돌아 돌아가지만 지하철 안, 차창에 비친 내 모습 너머로 우리 사회의 더 밝은 내일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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