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의 배웅과 우정

by 자봉

벚꽃과 개나리꽃들은 떨어지고 이제 철쭉들이

만화방창 피어난 계절이다

초여름 날씨 같은 4월의 어느 봄날에 북한산을 서서히 오르며 자연의 순리를 혼자서 만끽하던 중 핸드폰 진동이 울려온다


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동창이고 반창이었던 친구의 전화 한 통은 평온하던 주말의 흐름을 남도 끝자락 광주로 돌려놓는다

고교 3학년 시절 같은 반이었던 친구의 부친께서 2년 부족한 백세(百歲)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는 비보였다.


거의 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내하며 자식들을 길러내신 어르신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것은 단순히 친구의 슬픔을 나누는 일을 넘어, 우리들 삶의 뿌리를 확인하는 경건한 의례와도 같았기에 병오는 경기도 퇴촌에서 양재역까지 한달음에 차를 몰고 달려와 주었다.

그렇게 세 명이 모여 병오의 수소차에 몸을 싣고 오후 3시 반, 양재역에서 우정의 연료를 가득 채운 채 광주를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


봄볕이 내리쬐는 토요일 오후의 고속도로를 교대로

운전대를 번갈아 잡아가며 우리는 잠시 고교 시절의 까까머리 소년들로 돌아가 옛 추억을 주워 담았으나, 광주 그린 장례식장에 도착할 무렵인 저녁 7시가 되자 예상치 못한 복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오가 새로 마련한 수소차의 연료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타지에서 수소 충전소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고단했다.

광주 시내 수소차 충전소를 샅샅이 검색해 보았으나 몇 군대가 되지 않았고 그것도 오후 6시까지만

영업하고 문을 닫은 상태였다


이 시간에 수소 충전이 가능한 곳은 없고

우리 셋은 잠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밤늦게 서울로 가야 했던 한 친구는 KTX 표가 몇 장 남아 있어 다행히 운 좋게 예매를 한 후 용산으로 발길을 돌렸고, 차를 책임져야 하는 친구와 함께 수소 충전소를 찾아 밤의 미로를 헤매기 시작했다.

고향 장흥으로 내려가 하룻밤을 묵고 내일 충전을 할지 아니면 밤새 길 위를 방황할지 고민하던 찰나, 문득 재미나이로 검색을 해 보니 백양사 휴게소의 충전소가 밤 10시까지 영업한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서둘러 백양사 휴게소로 향해 밤 9시가 넘어서야 겨우 수소 연료를 채울 수 있었고, 안도감 섞인 한숨을 내쉬며 친구와 나는 번갈아 운전대를 교대 잡고 서울을 향해 밤의 어둠을 뚫고 나아갔다.

공덕역에 도착하니 시곗바늘은 벌써 새벽 1시를 향해가고 있었고, 차를 가지고 온 친구는 거기서 또다시 경기도 퇴촌 집까지 먼 길을 달려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긴 여정을 마쳤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일흔이 다된 우리들이 서로가 노구를 이끌면서 왕복 수백 킬로미터의 고속도로를 오고 가며 겪은 이 짧고도 긴 소동은, 돌아보니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우리가 여전히 서로의 '충전소'가 되어주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고교 3학년, 그 푸르던 시절에 만나 이제는 부모님들을 떠나보내며 조문객의 자리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늦게나마 서로의 슬픔에 곁을 내어주고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며 함께 달릴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닫는다.

동창이고 같은 반 반창이었기에 몇 년 전 반창 모임을

만들어 서로 인생 후반기에 우정을 쌓아 가고 있다

친구 아버님의 백세 장수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처럼, 이제 우리들의 얼마 남지 않은 우정도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그렇게 묵묵히, 따뜻하게 깊어가고 있다


고딩 반창회 모임이 만들어지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항상 친구들 모임에 가장 앞장서서

궂은일과 힘든 일 어려운 일들을 솔선 수범해 주는

교육자 출신 김교장 친구가 있어 모임이 잘 되어간다

항상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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