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열자마자 달려드는 공기가 제법 매섭다. 4월의 끝자락이라지만, 아침 바람은 여전히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서늘함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이 쌀쌀함이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정신을 맑게 깨우는 죽비 소리처럼 느껴진다. 얼른 창을 닫고 커피머신 앞에 선다.
이윽고 거실 가득 퍼지는 고소하고 쌉싸름한 커피 향기. 뜨거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며 온몸의 세포를 깨울 때, 비로소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공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35년을 보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산더미 같은 서류를 처리하며, 민원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시간들.
그 치열했던 세월을 뒤로하고 맞이한 은퇴의 삶은 처음엔 낯선 광야 같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광야를 나만의 정원으로 가꾸는 법을 안다. 오늘 아침처럼 향긋한 커피 한 잔과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는 곳, 문래동의 한 스크린 골프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내가 즐겨 찾는 이곳은 여느 골프장과는 다르다. 흔히 스크린 골프라고 하면 어두컴컴한 지하의 폐쇄된 공간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지상 7층에 자리 잡고 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순간, 통유리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과 맑은 공기가 나를 반긴다. 7층 높이에서 바라보는 도심의 풍경은 마치 내가 세상의 소란함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듯하다.
더군다나 이곳의 주인장은 나의 중학교 동창이다. 어린 시절, 운동장을 함께 누비던 친구가 운영하는 곳이라 그런지 공기마저 친숙하다. 친구의 넉넉한 인심이 담긴 서비스와 저렴한 비용은 덤이다.
퇴직 후의 삶에서 경제적인 효율과 심리적인 편안함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이런 아지트가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중년 이후의 삶이 주는 예기치 못한 행운이다.
골프채를 휘두르는 행위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인생의 삼라만상이 들어있다. 드라이버를 잡고 시원하게 휘두를 때의 쾌감은 지난 세월의 묵은 체증을 날려버리는 해방감과 닮았다. 하지만 골프는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욕심이 들어가면 공은 여지없이 궤도를 벗어난다. 마치 우리네 삶이 과한 욕심 때문에 그르쳐지는 것과 같다.
지인들과 나란히 앉아 차례를 기다리며 나누는 이야기는 골프의 진짜 묘미다. "어이, 이번엔 힘 좀 빼게나."라는 친구의 조언은 비단 골프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녹색 화면을 바라보며 자식 걱정, 건강 걱정, 그리고 지나온 청춘의 무용담을 풀어놓는다. 한 타 한 타에 일희일비하다가도, 서로의 실수에 껄껄 웃음을 터뜨린다. 지하의 탁한 공기가 아닌, 7층의 쾌적한 환경 속에서 나누는 대화는 그 자체로 치유의 과정이다.
사람들은 흔히 골프를 정적인 운동이라 생각하지만, 한 게임을 온전히 소화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집중력과 근력이 필요하다.
특히 나처럼 매일 만 보 가까이 걷기를 실천하는 이들에게 골프는 하체 근력을 유지하고 유연성을 기르는 데 더없이 좋은 동반자다.
스크린 골프는 날씨의 구애를 받지 않으면서도, 실제 필드 못지않은 긴장감을 선사한다.
장애인이나 고령자들에게도 골프는 훌륭한 재활이자 스포츠가 된다는 점을 새삼 느낀다. 큰 무리 없이 전신을 움직이게 하고, 무엇보다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퇴직 후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고, 매일 아침 목적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나를 반겨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신체적 건강보다 더 중요한 정신적 건강의 핵심이다.
오늘도 나는 화면 속 파란 하늘을 향해 공을 날린다. 깡, 하고 명쾌한 타구음이 실내를 울린다. 비록 가상의 공간이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시원한 바람이 부는 초원을 달리고 있다.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거창한 담론을 꺼내지 않겠다. 쌀쌀한 아침에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 지상 7층에서 즐기는 쾌적한 운동, 그리고 허물없는 친구들과 지인들과 나누는 실없는 농담 몇 마디. 이 소박한 일상의 반복이 바로 행복의 본모습이다.
은퇴는 마침표가 아니라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기 위한 쉼표였다.
문래동의 골프채를 휘두르며 나는 오늘도 나의 인생 수필에 기분 좋은 한 줄을 보탠다. 맑은 공기와 향긋한 커피 향, 그리고 "나이스 샷!"이라는 친구의 환호성이 있다면, 나의 후반전 인생은 언제나 '언더파'로 기록될 것이다.
오늘 하루도 친구들과 골프를 하면서 운동도 하고
주식투자 정보와 각종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침에
떠 오른 태양도 서산 너머로 기웃기웃 저물어져 간다
인생 후반기!
겪어보지 못한 하루하루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