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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Apr 01. 2024

원소의 죽음, 그의 사망 원인은 무엇일까?

혹독한 3년상의 후유증? 혹은 스트레스와 연관된 사망?

정말 오래간만에 인사 드립니다.


요즘 여러가지 일로 너무 뒤숭숭하지만, 잠시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의학적으로 분석하기'로 머리를 식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새로운 글을 가져왔습니다.


그 동안 서양의 신화나 동화 등을 주로 다뤄보았는데, 이번에는 동양의 영원한 고전이자 역사의 흔적인 '삼국지' 분석에 도전해보고자 합니다.



*** 저는 삼국지 전문가는 아니기에, 삼국지 관련 지식은 '정미현 작가님(곧 출판예정인 [그래도 여자보다는 삼국지에 대해 잘 알아야하지 않겠어요?"]의 저자)께서 집필해주셨습니다(처음 해보는 공동집필 작업^^!)



오늘은 삼국지의 수많은 영웅호걸 중, 초반에 비극적인 퇴장을 맞이한 영웅인 '원소'의 사망 원인이 무엇인지 추정해보고자 합니다.






累世公卿立大名 (누세공경입대명) 집안 대대로 공경대신 배출해 큰 명성 날리고
少年意氣自縱橫 (소년의기자종횡) 젊어서 뜻 있어 천하를 주름잡았네
空招俊傑三千客 (공초준걸삼천객) 헛되이 준걸 삼천 명을 불러다 먹이고
漫有英雄百萬兵 (만유영웅백만병) 함부로 영웅이라며 백만대군을 거느렸구나
羊質虎皮功不就 (양질호피공불취)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양이라 성공하지 못했고
鳳毛雞膽事難成 (봉모계담사난성) 봉황 깃털에 닭의 배짱이니 큰일을 이루기 어려워라
更憐一種傷心處 (경련일종상심처) 가여워라 한가지 마음 아픈 것은
家難徒延兩弟兄 (가난도연량제형) 집안이 어려운데 쓸데없이 두 형제를 끌어들인 것이네

<연의>의 판본을 완성했다고 알려진 모종강(청나라 시대의 문예비평가)이, 본인이 편집한 <연의>에서 인용한 시입니다. 원소의 인생을 돌아보는 내용이라지만, 한 때나마 천하를 주름잡던 영웅의 일생을 그렸다고 하기에는 제법 각박한 데가 있습니다. 특히 원소에 대한 묘사가 ‘양’이나 ‘닭’이라는 동물로 표현되니 소인배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연의>에서 원소가 대체로 그렇습니다. 반동탁 연합의 맹주로 추대되었음에도 여러 제후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채 우유부단하게 굴다가, 동탁을 타도할 기회를 날려버리죠. 어느 순간 하북의 최강자가 되기도 했지만, 우유부단하게 굴다가 열세였던 조조에게 역전패를 당합니다. 심지어 후계자를 세울 때도 우유부단하게 굴어, 원소 사후 원가의 하북은 통째로 조조의 품에 떨어지게 됩니다.

<연의>의 초반부는, 남들에게 환관의 손자라며 무시나 받던 조조가 어떻게 최종 빌런으로 진화하느냐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최종 빌런으로 진화하는 마지막 관문이, 당대 최강자인 원소와의 전쟁이었고요.

그런데 그렇게 부족한 사람이었다면, 당대 최강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연의>에서는 이런 설정의 빈틈을 원소의 혈통으로 메꿉니다. 능력도 자질도 조조에 비해 부족했지만, 명문가 출신이었기에 사람들이 모였다는 식으로.
그러나 <정사>나 <후한서> 등, 사서의 기록은 <연의>와는 다릅니다. 역사 속 원소는 당대를 살아간 어느 누구보다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외모, 정치적 능력, 인품, 군사적 재능, 모든 면에서요.

단 하나, 혈통만 빼고 말이죠.


<그림 1>  원소의 초상화, 출처-위키피디아.



원소는 얼자(孼子-천민 신분의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였습니다. 원술의 이복 형이었죠. 원소의 친아버지 원봉은 원소가 태어나자마자, 아들 없이 죽은 친형 원성의 양아들로 입적했습니다. 애초에 이름 소(紹)부터가 남의 후사를 이을 때 쓰이곤 했습니다.

명문가가 쟁쟁한 적자를 두고 서자도 아닌 얼자를 띄워줄 리 없습니다. 명성을 얻기 위해, 원소는 두 번의 삼년상(三年喪)을 치릅니다. 친아버지 원봉의 정실, 즉 원술의 친어머니가 죽자 처음으로 삼년상을 치렀으며, 저의 숙부이자 수양아버지인 원성을 위해 다시 한번 삼년상을 치렀지요.

삼년상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만 26개월에서 27개월 기간 동안 진행되는 행사라고 불 수 있는데, 기간이 3년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삼년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여름이고 겨울이고 부모 무덤 옆의 움막에서 살아야 하며, 거친 삼베를 사용해 만든 참최복(斬衰服-자른 부위를 꿰매지 않음) 혹은 자최복(齊衰服-자른 부위를 꿰맴)을 입어야만 합니다(피부 문제, 면역 기능 저하). 게다가 날씨가 아무리 춥더라도 겹이불을 덮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외출할 때는 모자 비슷하게 생긴 방립을 착용해야만 했는데,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삼년상을 치르는 상주는 햇볕도 제대로 쬘 수 없게 되는 것이죠(비타민D 부족).

이러한 극한 상황의 와중에 식사를 통한 체력 보충도 힘들었습니다. 육류는 당연히 먹을 수 없으며(비타민B, C의 결핍 가능성, 단백질 부족), 몸이 아파도 약조차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조문객이 오면 손님맞이까지 해야 했다고 합니다. 원소는 사세오공(四世五公-4대에 걸쳐 다섯명의 재상을 배출한 집안) 원씨 가문의 삼년상을 연달아 두 번 치렀으니, 전국에서 엄청난 수의 조문객이 왔을 것이기에 그의 체력 소진은 엄청났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게다가 유명한 집안의 자손으로서 지켜보는 눈이 많았고, 자신의 출신의 한계로 더욱 튼튼한 유교적 명문이 필요했던 원소는 이 두 번의 삼년상을 완벽하게 해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 2> 원소가 치른 삼년상의 모습(상상도).



환관이 득세하던 시절입니다. 두 차례의 당고지금[1]으로 청류[2]는 숨소리도 내지 못했습니다. 숨소리를 냈던 청류는 이미 죽거나 옥에 갇혔고요. 숨어 살던 청류 인사들은 너무나 자연스레, 유교의 ‘끝판왕’ 원소를 주목합니다.

혈통의 한계를 뛰어넘은 원소는 누구보다 빠르게 비상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저의 명성에 흠이 가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냉혹하고 잔혹한 일을 많이 저지르기는 했습니다만, 적어도 겉으로는 완벽한 인의군자 그 자체였습니다. 백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죠.

“원소는 사람됨에 인정이 있고 정치를 잘했다. 그렇기에 백성들은 그를 일컬어 '덕' 이라 불렀다. 하북에선 점잖은 선비에 이르기부터 비천한 여인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불만을 품은 자가 없었다. 원소가 죽자 저자 거리에서는 눈물과 통곡이 끊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부모상을 치르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후한서-원소열전]

그러나 이랬던 원소는 결국 관도대전에서 조조에게 패합니다.

[원소의 사망에 관련한 역사 속 기록]
<정사> “군대가 패배한 이후로 병이 나서, 건안 7년 202년 근심하다 죽었다.” [원소전]
[배송지] <위지>에 이르길 “원소는 자군이 패한 이후 병이 생겨 피를 토하며 죽었다.”


원소의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으나 어린시절부터 친구였다는 조조와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원소는 40대 후반, 많아봐야 50대 초반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원소는 ‘용모가 단정하고 예의가 발랐다’라는 묘사 있는 것으로 볼 때, 평소 방탕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이진 않으며, 상당히 자기관리를 잘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시대의 군주급 인물들인 조조(65세)나 유비(62세)가 60대에 사망한 것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지는 이른 죽음이죠.

원소가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 병이 났다는 기록으로 보면 극심한 스트레스와 같은 심리적인 문제가 그의 사망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근심하다 죽었다는 문장과도 일치하죠.

그러나 패전부터 사망까지의 기간은 1년 반 정도입니다. 그 사이 원소는 병상에만 누워 있지 않았습니다. 배반한 성읍을 진압하고, 반란군을 평정했습니다. 물론 평생토록 백성에게 사랑받았던 원소에게는 반란 그 자체가 충격이었을 수는 있겠습니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쌓였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또는, 젊은 시절 그 힘든 삼년상을 두 번이나 치렀으니, 그때 이미 몸이 망가진 것이라는 가설도 고려해볼 수 있죠.

한국 역사 속에도 조선 시대 5대 왕인 문종이 어머니 소현왕후와 아버지 세종의 삼년상을 연달아 치르는 동안 몸이 상해, 결국 재위 2년 만인 38세의 나이에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후 조선 역사는 단종의 왕위를 문종의 동생이었던 수양대군이 찬탈하며 요동치게 됩니다. 문종의 경우는 부모의 상치레와 사망까지의 기간이 짧았기에, 삼년상으로 인한 건강 문제가 그의 사망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비해 원소는 문종만큼 삼년상 이후 사망까지의 기간이 짧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체력에 무리가 갈만한 삼년상을 2회나 치렀다면, 그 기간 동안의 극심한 피로와 영양 부족 상태가 만성 질환이 발병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습니다.



*첫 번째 가설
예를 들면, 결핵 감염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결핵의 원인균은 ‘마이코박테리움 투버클로시스(Mycobacterium tuberculosis)’로, 마이코박테리움 속(genus)은 대략 1억 천만년 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박테리아입니다. 결핵균은 7만년 이상을 생존해왔고, 현재는 전세계적으로 거의 2십억명 이상의 사람들을 감염시킵니다(1). 기원 전 3000년 전 고대 중국에서도 결핵 환자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황제내경에서 ‘소모성 질환’이라고 묘사됨)(2). 그러므로 원소가 활약한 시기에도 당연히 결핵균과 그에 감염된 환자들은 존재했을 것입니다.
결핵은 호흡기 감염 질환으로, 원소가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반복했을, 많은 문상객을 맞이하는 행위는 결핵에 감염될 위험도를 상승시켰을 것입니다. 위생 관리가 잘 안되는 무덤 곁 생활, 그리고 영양 결핍 상태의 지속이 결핵이 악화되는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합니다.

그러나 당시 원소가 폐결핵에 걸렸다고 하기엔 삼년상 후에도 꽤 오래 살아 있었고, 역사 기록의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결핵 환자 특유의 용모나 임상 증상(창백한 피부, 마른 몸, 잦은 기침과 각혈 소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서 이것을 주사망원인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 가설
원소가 간염 바이러스 감염(이 역시 위생 및 영양 상태와 관계가 있는 질환)되었을 가능성입니다. 간염의 가장 흔한 원인 중 하나인 B형 간염 바이러스는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3). B형 간염 바이러스는 다양한 경로 감염이 가능(주로 혈액을 통해 감염되지만, 간염 환자의 타액, 질액, 정액에 바이러스가 존재하기 때문에 성행위에 의해 전염될 수도 있음, 혹은 간염 환자의 모친에 의한 수직 감염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에 모종의 경로로 원소가 감염된 상태에서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만성 간염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성 간염 환자는 주로 전신의 병감 및 피로감과 식욕 감퇴 등을 느낄 수 있는데, 이러한 증상을 느꼈다고 해도, 고대 중국에 살았으며 의학 지식도 없던 원소가 그 원인을 간의 이상에 의한 것으로 파악했을 가능성은 떨어지며, 오히려 정치 및 전쟁 수행에 의한 근심으로 인해 느껴지는 증상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성 간염은 간경화나 간암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원소에게 간경화가 있었다면 이에 의해 식도 정맥류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간경변증이 심해지면 간 조직 내 혈액이 지나가는 통로에 압박을 가해지게 되고 간문맥에 대한 저항력이 증가하여 압력이 상승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문맥압 항진증이라고 하는데, 이 상태에서는 간 주위에 있는 식도나 위에 있는 혈관이 발달하게 되어 식도 정맥류까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식도 정맥류가 생겨나면, 이 혈관에서 출혈이 발생할 위험성이 증가하게 됩니다. 만에 하나 출혈이 되면, 다량의 피를 토하게 되고 자칫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게 되죠. 원소가 정말로 ‘다량의 피를 토하고 사망’했다면, 이 가설이 상당히 유력해집니다.


<그림 3> 정상 간(좌측)과 간경화가 일어난 간(우측)을 비교. 간경화가 발생하면 간 주위에 있는 혈관들이 발달하게 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출처-서울아산병원 홈페이지.



*세 번째 가설
원소에게 만성적으로 가해진 육체적, 정신적인 스트레스(두 차례의 삼년상과 정치 및 군사 지도자 위치에서 겪는 고뇌 등등)에 의해 고혈압이나 당뇨가 중년 이후 발병했을 수 있습니다(4, 5).
물론 이 두 질환이 발생했다고 해도, 고대 중국이라는 시대적 한계에 의해 원소는 그와 같은 만성 질환의 존재를 모르고 지냈을 것입니다.

특히 고혈압의 경우에는 딱히 임상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게다가 당뇨병도 혈당이 아주 높거나 낮지 않은 경우에는 별 다른 증상을 못 느끼고 지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원소에게 고혈압이나 당뇨병이 있었다고 해도(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별 다른 몸의 이상을 못 느낀 채, 혈압이나 혈당 조절도 하지 않고 지냈을 것입니다(고대에는 만에 하나 이 두 질환을 진단했다 한들 조절할 방법도 약제도 없었으니까요).

어쨌든 이 두 질환을 조절하지 않고 지낼 경우에는 심혈관 및 뇌혈관 질환이 발생할 위험도가 증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원소가 겪은 심리적 스트레스 역시 이와 같은 혈관 질환 발생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6). 게다가 두 번의 삼년상 이후 원소의 식습관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당한 명문대가 답게 기름지고 호화로운 식사를 하기 쉬웠다면(현대 하북 지역 대표 요리 중 하나가 북경오리…고대 시절에도 이런 것을 먹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런 스타일의 음식을 먹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상지질혈증(Dyslipidemia)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이상지질혈증 역시 심혈관이나 뇌혈관 질환 발생의 위험인자로 작용하기에 원소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7).

원소가 혈압과 혈당을 조절하지 못한 상태에서 관도대전 패전 등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면, 현대에도 높은 치사율을 보이는 급성 심근경색(Acute myocardial infarction, AMI) 혹은 뇌졸중(뇌경색이나 뇌출혈)이 발생하여 급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심혈관이나 뇌혈관 질환으로는 ‘피를 토하는 증상’이 발생하긴 어렵지만, 만성적인 심리적 스트레스가 원소를 죽음에 이르게 한 과정을 설명하기엔 적합할 수도 있겠습니다.



최근에는 선후, 혹은 인과관계를 반대로 보기도 합니다. 두 번의 삼년상이 원소의 건강을 악화시켰고, 그 때문에 관도에서 실책을 저질러 패배했다는 시각입니다.

사실 원소는 관도대전에서 승리가 거의 확실시된 상황이었습니다. 힘의 차이부터 컸습니다. 조조군의 두 배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죠. 그런데도 오소가 불타기 전까지 군량이 부족했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보급까지 원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의대조 사건의 생존자인 유비를 영입하며 명분도 손에 쥐었습니다. 힘에서도, 명분에서도 밀린 조조는 순욱과 허도로의 귀환을 의논했을 정도로 궁핍했습니다.

그런데도 원소는 끝내 패배했습니다. 전쟁 막바지, 두 가지 실책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군 기밀을 쥐고 있는 허유와 허유의 가족을 홀대 혹은 박대해, 허유가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끔 몰아붙인 것. 또 하나는 오소가 습격당했을 때, 주력군을 오소 대신 본영이 있던 관도에 보냈던 것입니다.

전자는 원소의 인용술에 관련된 부분입니다. 원소는 아랫사람의 갈등 및 충성 경쟁을 조장해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곤고히 했습니다. 이유가 어쨌든, 본인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더욱 결정적인 실책은 후자였습니다.

후자의 실책은 그때까지 성과를 거뒀던 지구전 전략을 버리고, 속공 전략을 택한 데서 나왔습니다.

원소는 확실하지 않으면 나서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일단 부딪치는 조조와는 달랐습니다. 이는 군량 문제에서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조조는 정벌 당시 군량 부족의 문제에 자주 시달렸지만, 원소는 하북의 네 개 주를 평정하는 동안 보급으로 곤란했던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확실한 상황을 만들어놓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원소는 시간과의 싸움에 강했습니다. 6년 가까운 시기를 갈아 넣어 청계의 중심이 되었고, 십상시를 제거할 때는 흑산적의 소행을 주작하면서까지 군벌을 불러모을 명목상의 이유를 만들었습니다. 한참을 공들였던 이간질과 여론 조작으로 기주의 지배자가 되기도 했고,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공손찬의 역경루 공성도, 4년 동안 차근차근 진행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관도대전 막바지에는 갑작스레 속공으로 태세를 바꿉니다. 개전 8개월 만의 일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게 쉽게 함락될 관도였다면 진작 함락되었을 테니까요. 원소의 평소 성향과도 다릅니다. 그렇다면 원소는 왜 갑자기 조바심을 냈을까요?

“전쟁의 신 그 자체”라 불렸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워털루 전쟁 당시 건강이 상당히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전투 도중 네 원수에게 지휘를 맡기고 막사로 돌아가 휴식을 취해야 했을 정도죠. 고통이 너무나 심해 아편을 과다 복용했다가, 반 혼수 상태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제아무리 전쟁 천재여도, 그런 몸으로는 군을 지휘할 수 없습니다. 나폴레옹은 결국 전쟁에서 패하며 몰락합니다.

원소 역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언급한 이유 등으로 몸 상태가 좋지 못해 전황을 오판한 것이죠. 혹은, 자신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에 성급해졌을 수도 있고요.


만약 원소가 여러가지 건강 문제 관리를 잘 해서, 매우 건강한 상태로 지냈거나,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죽음의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면 역사는 어떠한 방향으로 흘려갔을까요?



<<IF 원소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대부분의 삼국지 관련 매체에서는 조조의 하북 평정을 간략하게만 그립니다. 패배한 원소가 화병으로 죽고, 조조는 하북을 꿀꺽했다 정도로요. 조조 중심의 매체라면 오환 정벌을 추가로 넣어주고요.

그런데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림 4. 삼국지 속 3대 대전의 전투 장소 및 시기>, 출처: 위키피디아.

* 그림 속 붉은 색 원 안이 원소의 세력권이고 푸른 색 원 안이 조조의 세력권이었습니다. 지도 상에서 원소와 조조의 세력은 비슷해 보이지만, 삼보의 난이나 서주대학살 등의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조조의 영토에 비해 원소의 영토는 비옥하고 풍요로웠습니다.


관도대전은 200년 2월 원소가 조조를 침공한 데서 시작해, 10월 조조가 원소의 침공을 막고 원소를 쫓아낸 데서 끝납니다. 원소는 202년 6월[3]에야 사망했지만, 조조는 바로 하북을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203년 4월, 원소의 후계자였던 원상은 조조를 역으로 공격하여 패퇴시켰습니다. 조조는 허도로 귀환해야 했죠. 원상은 당시 10대 중반으로 추정됩니다. 고작해야 10대 중반의 소년이 당대 최고의 전략가 중 하나였던 조조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침 조조가 물러나자, 원소의 두 아들이었던 원담과 원상이 후계자 다툼을 벌입니다. 조조는 장자 원담과 손을 잡고, 원씨 세력의 본거지였던 업성 공략에 나섭니다. 업성은 204년 8월이 되어서야 함락됩니다. 조조는 이어 205년 1월에는 원담과의 전투에서 승리, 남피(南皮 – 현재는 허베이성 창저우시의 현)를 얻습니다.

원상은 만리장성 이북으로 도망쳤으나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북방의 이민족이었던 오환족과 결탁해 반反조조 세력을 결성, 조조를 곤란하게 만들었죠. 수많은 기주와 유주의 백성들이 원상을 따라갑니다. 조조를 상대로 한 반란도 끊이질 않았습니다. 하북에서 원씨 세력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원소가 사실상 낙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놀랍습니다.

조조는 207년 8월, 북벌에 나서 오환을 정벌합니다. 그후 9월, 마침내 원희와 원상의 수급을 받습니다.

여기서 삼국지의 3대 대전을 살펴볼까요? 관도대전 말고도 두 개의 대전이 더 있습니다. 바로 ‘적벽대전’과 ‘이릉대전’입니다. 적벽대전은 조조의 침공을 손권과 유비의 연합이 막아낸 전쟁이고, 이릉대전은 유비의 침공을 손권이 막아낸 전쟁입니다.

적벽대전 후에도 조조는 사망하지 않습니다. 12년을 더 살았죠. 그동안 여러 차례의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그 후 조조의 정권은 안정을 되찾고, 통일의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이릉대전 후, 촉은 영토뿐 아니라 수많은 인재와 병력을 잃었습니다. 유비는 손실을 복구할 틈도 없이, 패전 10개월 만에 죽고 맙니다. 다행스럽게도 제갈량은 내정에 강했고, 그 덕에 촉은 세력을 어느 정도 회복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촉은 삼국 중 가장 약했고, 이 전력차는 멸망 당시까지도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적벽대전과 이릉대전을 통해, 원소가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지 짐작해봅시다.

아마 초기에는 반란을 진압하느라 바빴을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랬고요. 하지만 어느 정도 반란이 진압되고 나면, 충분히 내정을 안정시켰겠죠. 적벽대전 후 조조가 그랬듯이 말이죠.

당대에는 하북 지역을 중심으로 도삭군(度朔君: 당나귀 정도 크기의 네발 달린 짐승으로 몸 전체가 하얗고 털이 매우 매끄럽다고 묘사되는 신령) 설화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조조의 후계자, 위문제 조비가 편집한 <열이전>에도 등장합니다. 도삭군은 원소를 상징하는 신으로, 백성에게 복을 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신으로까지 추앙받았던 원소입니다. 이릉대전, 유비 사후의 촉도 삼국의 하나로 올라섰듯이, 원소 역시 세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지 않았을까요? 유선이나 제갈량에 비해 상황이 나으면 나았지, 나쁘지는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조조가 원씨 세력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원담, 원상 형제의 후계자 다툼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소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원소가 후계자 원상을 위해 장자 원담을 어떤 방식으로든 제거하지 않았을까요?

원소는 원담을 진작부터 죽은 형의 양자로 입적시켰습니다. 원담 대신 원상을 후계자로 낙점했다는 뜻이었죠. 그러나 친족의 대부분이 이복 동생이었던 원술을 따라갔기 때문에, 군사를 맡길 만한 사람이 없어 원담에게도 병력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럴 법도 한데, 피가 섞이지 않았음에도 믿고 맡겼던 조조는 원소로부터 독립해버렸거든요. 한 번 배신당한 원소였으니 다른 배신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원상이 연륜과 경륜을 얻을 만한 나이가 되면, 더는 원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원소는 맹진항에서의 백성 도륙이나 호모반 살해, 한복의 자살 유도 등, 잔혹하고 냉혹한 계략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원담을 크게 총애했다는 기록도 없으니, 쫓아내거나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원상의 후계자 등극에는 장애물이 없었겠죠. 조조 역시 원씨 형제의 갈등을 발판으로 삼을 수 없고요.

심지어 원상은 어린 나이에 조조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던 인물입니다. 잠재력은 충분했습니다. 그러니 경험을 쌓고 나면, 원소에 이어 훌륭한 통치자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유비는 반조조의 기치를 내걸어 수많은 백성을 얻었으며, 이를 발판으로 영토까지 얻어 나라를 세웠습니다. 촉의 건국 이념이 반反조조이자 반反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소가 살아 있었다면, 원소가 이 역할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조조 타도를 외치는 사람들은 유비 대신, 이미 검증된 데다 조조와 견줄 만한 세력을 지닌 원소에게 몰렸겠지요.

더군다나 원소 혹은 자질이 훌륭했던 원소의 후계자가 오롯이 건재한 이상, 조조는 쉽게 남하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적벽대전도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유비가 부상할 기회는 더욱 없어지고 맙니다.

삼국은 삼국이되, 유비 없는 삼국시대. 즉, 조조와 원소, 손권으로 이루어진 삼국시대를 추측해봅니다. 삼국지 팬들을 뜨겁게 달구는 적벽대전과 이릉대전이 없어서 조금은 심심할 수도, 혹은 원소에 의해 더 멋진 대전들이 벌어지는 숨막히는 삼국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삼국지 관련 각주>
1.    후한 말, 환관 세력이 사대부 세력의 유력 인사 다수를 금고에 처했던 정치적 탄압 사건. 피해자가 총 8, 900명에 달했다
2.    전통 사대부
3.    음력 5월 21일

<의학 참고문헌>
1.    The history of tuberculosis: from the first historical records to the isolation of Koch's bacillus. I. Barberis, N.L. Bragazzi, L. Galluzzo, and M. Martini, J Prev Med Hyg. 2017 Mar; 58(1): E9–E12.
2.    The tuberculosis timeline: Of white plague, a birthday present, and vignettes of myriad hues. Y. Agarwal, R. Chopra, +1 author R. Sethi. April 2017. Medicine. Astrocyte
3.    Ancient hepatitis B viruses from the Bronze Age to the Medieval period. Barbara Mühlemann, Terry C. Jones, Peter de Barros Damgaard, et al., Nature volume 557, pages418–423 (2018)
4.    Stress-Induced Diabetes: A Review. Kapil Sharma, Shivani Akre, Swarupa Chakole, and Mayur B Wanjari. Cureus. 2022 Sep; 14(9): e29142.
5.    Clinical significance of stress-related increase in blood pressure: current evidence in office and out-of-office settings. Masanori Munakata. Hypertension Research volume 41, pages553–569 (2018)
6.    Mental Stress and Its Effects on Vascular Health. Jaskanwal Deep Singh Sara, MBChB,a Takumi Toya, MD,a Ali Ahmad, MD, et al., Mayo Clin Proc. 2022 May; 97(5): 951–990.
7.    A Modern Approach to Dyslipidemia. Amanda J Berberich and Robert A Hegele, Endocr Rev. 2022 Aug; 43(4): 61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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