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그리스 신화 읽기

신화 속 끓어오르는 강, 그리고 '로키'의 고향 40 에리다니

by Iatros

그 새 또 영화를 한 편 보고 왔다.

요즘 핫한 SF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글을 너무 쉬어도 손이 굳을 것 같아서 이번에도 짧지만, 약간은 이상한(?) 감상문을 남겨본다.


태양을 갉아먹는 우주적 포식자 '아스트로파지(이름 그대로 별을 먹는 자)'와 이를 막기 위한 인류의 마지막 희망,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난 경이로운 미지의 존재. 앤디 위어의 우주 3부작 소설 중 하나인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탄탄한 하드 SF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종의 한계를 뛰어넘는 찬란한 우정과 인류애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흔히 대중매체 속 외계인이라 하면, 산성 침을 흘리며 인간을 사냥하거나 지구를 정복하려는 적대적인 괴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외계인 '로키'는 다르다. 거대한 바위거미를 연상시키는 기괴한 외형과 달리, 그는 지극히 이성적이며 동시에 눈물겨울 정도로 따뜻한 감성을 지닌 천재 엔지니어다. 시각 대신 청각으로 세상을 인지하는 고온-고압의 행성 출신 외계인과, 우주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 지구인 과학자 라일랜드 그레이스가 나누는 교감은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우리에게 공포를 주는 외계인(좌)와 이번 영화 속 귀염뽀쨕의 아이콘 로키(우)


이 감동의 물결 사이로, 문득 한 가지 흥미로운(어쩌면 나만 그럴 수도...)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바로 로키가 살아온 고향 별, '40 에리다니(40 Eridani)'라는 이름이다.


40 에리다니는 에리다누스(Eridanus) 별자리에 위치한 항성계다. 그리스 신화 덕후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 '에리다누스'라는 이름은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기시감을 준다. 에리다누스는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전설의 강 이름이며, 여기에는 아주 유명하고도 비극적인 전설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에리다누스 별자리(좌-붉은 색 원 안에 표시된 별이 바로 40에리다니, 우-밤하늘에서의 모습)


그리스 신화 속에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또 불운한 인물들도 많은데, 그런 비극의 주인공 중 제법 네임드인 인물인 파에톤이 로키의 고향과 연관이 있다.


태양신 헬리오스(아폴론 이전의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졸라 태양 마차 운전에 도전하는 용감한 청년이다. 그러나 신이 아닌 인간의 몸으로 뜨겁고 거친 태양 마차를 다루다가 운전 미숙으로 궤도를 벗어나 지상을 불태우게 되었다. 지상의 곳곳이 불타 오르게 되자 수많은 존재들이 이 상황에 울부짖었고, 이에 놀란 제우스가 내린 벼락을 맞고 파에톤은 추락하게 된다.

하늘에서 불타오르는 태양 마차와 함께 파에톤이 추락한 곳이 바로 '에리다누스 강'이다. 신화는 이때 에리다누스 강이 펄펄 끓어오르며 요동쳤다고 전한다.


파에톤의 추락, 루벤스 작품


이제 다시 작품 속 로키의 고향 행성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에리디안들이 살아가는 곳은 대기압이 지구의 수십 배에 달하고, 암석이 녹아내릴 정도로 펄펄 끓어오르는 극한의 환경이다(오죽하면 바닷물조차 '차갑다'는 개념이 없다). 두꺼운 가스대기층으로 인해 빛조차 닿지 않는 이 고온-고압의 행성계 이름이, 공교롭게도 태양 마차의 추락으로 끓어올랐던 신화 속 강 '에리다누스'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로키의 고향이 펄펄 끓는 지옥 같은(그러나 로키와 같은 에리디안들에게는 완벽한 안식처인) 환경이라는 점은, '에리다니'라는 이름에서부터 이미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셈일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에서 다시 작품 본래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살펴보면, 이 영화는 차가운 과학을 넘어 결국 '우리와 같은 존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흔히 모든 전쟁 영화가 사실은 반전(反戰) 영화이듯이, 모든 우주 영화는 결국 '지구 영화'다. 끝없는 미지의 공간을 유영하면서도 결국 지구를 그리워하는 서사인 것이다.


모험을 떠나는 이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이유는 돌아갈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마치 이타카를 향해 포기하지 않고 바다를 건너는 오디세우스처럼).


비록 타의에 의해 강제적으로 우주로 떠밀려온 그레이스(게다가 지구엔 가족이나 친구, 반려동물마저 없던--;)였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지구를 그리워하고 또 구하고자 분투한다. 그 과정은 우리에게 고향, 좀 더 거시적으로는 '모성(母星)'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절대적이고 소중한 것인지를 묵직하게 깨닫게 해준다.


그런데 결말에 이르러 영화는 이 고향의 의미를 한 차원 더 아름답게 확장시킨다. 서로의 목숨을 구원한 친구 로키의 행성인 '에리드'를 기꺼이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살아가는 그레이스의 모습은, 고향이란 꼭 자신이 태어난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가 숨 쉬는 곳, 그곳이 언제든 제2의 고향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 신화 속에서는 비극적인 불길로 끓어오르던 에리다누스의 강물이, 그레이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다정한 위로의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결국 인간이란 '사랑'만 있다면 이 광활하고 척박한 우주 어디서든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그 어떤 우주적 재난 앞에서도 결코 스러지지 않는 연대와 사랑을 그려낸, SF의 형식을 빌린 '인간 찬가'라는 생각이 든다.


#프로젝트헤일메리 #에리다누스 #그리스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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