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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May 08. 2022

그리스 로마 신화 덕후의 눈으로 감상한 닥터 스트레인지

하늘을 나는 황금양과 사랑을 위해 잔혹해진 마녀 메데이아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 연말을 즐겁게 만들어주었던 [스파이더맨-노웨이홈] 이후로 새로운 마블 영화가 개봉하였기에 또 다시 극장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전직 의사 출신 마법사라는 설정 + 어벤져스 내에서의 대활약 덕분에 상당히 관심이 가는 캐릭터이기도 했고, ‘노웨이홈’에서 멀티버스의 벽을 허물어버린 원흉(?)인 닥터 스트레인지의 두번째 솔로 무비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정말 궁금했기에 큰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블 데드]와 [원조 스파이더맨 트릴로지]를 만들었던 샘 레이미 감독이 등판했기에 더욱 이번 영화가 보여줄 모습이 궁금해졌습니다.


극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감상은 ‘매우 샘 레이미 감독이 만든 영화스러웠다.’와 ‘닥터 스트레인지가 겪을 시련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2시간 6분이라는 그닥 길지 않은 러닝타임 덕분인지 지루할 틈 없이 진행되긴 했는데, ‘멀티버스’라는 설정 답게 워낙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다보니 조금은 정신이 없고 깊이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MCU 영화의 특성 상 이번 영화 하나만으로 극한의 완성도를 보여주기 보다는 추후에 계속 나올 다른 영화들과 확장되는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한 발판으로서의 역할도 가져야하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름 괜찮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알고 있던 배우와 캐릭터들이 다중우주 속에서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든가,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다양한 평행세계의 모습(같은 ‘지구’지만 다른 컨셉)을 보여주는 점은 매우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한 멀티버스 속 또 다른 지구의 모습 중 하나.


어쨌든 저는 워낙 그리스-로마 신화를 좋아해서인지, 이번 영화에서도 신화와의 닮은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저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ㅋㅋㅋ). 

이번 영화의 전반적인 핵심 주제인 ‘멀티버스를 건너 다니는 모험 혹은 여행’이란 큰 줄기와 그 동안 겪어 왔던 시련과 절망으로 인해 결국 흑화해버린 ‘완다 막시모프-스칼렛위치’의 모습이,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 등장하는 유명한 보물인 ‘황금양털(Golden fleece)’에 얽힌 이야기의 흐름 및 그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비슷한 점들을 제법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황금양털 이야기는 그리스 안의 ‘보이오티아(Boeotia)’라는 작은 왕국을 다스리던 왕 아타마스(Athamas)가 네펠레(Nephele)라고 하는 ‘구름의 요정(님프)’과 결혼하여 프릭소스(Phrixus)헬레(Helle)라고 하는 남매를 두었다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아타마스 왕은 어느 순간 첫 부인인 네펠레와 헤어지고 이노(Ino)라는 여성과 결혼하게 되는데, 이노는 의붓 자식인 프릭소스와 헬레를 미워하여 그들을 모함하였고(이 남매가 저주를 받아서 보이오티아에 가뭄이 왔다는 식으로), 그로 인해 이 남매는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 때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네펠레가 제우스 신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제우스는 남매를 안타깝게 여겨 날개가 달린 황금빛 양을 보내어 그들을 구출합니다. 양을 타고 날아오른 남매는 고향을 뒤로 하고 멀리 달아나게 되는데, 여동생인 헬레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껴 중간에 떨어지게 되고, 그녀가 추락하여 빠져 죽은 바다의 이름은 ‘헬레스폰토스(헬레의 바다)’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여동생의 죽음이 안타까웠지만 프릭소스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고, 황금양은 프릭소스만을 태운 채 계속 날아가 콜키스(현재의 조지아) 왕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신화 속 프릭소스의 여정.


태양신 헬리오스의 아들이자 콜키스의 왕인 아이에테스(Aeëtes)는 멀리서 날아온 프릭소스를 따뜻하게 맞이하였고, 프릭소스를 자신의 딸인 칼키오페(Chalciope)와 혼인까지 시켜주었습니다. 이러한 환대에 큰 감사를 느낀 프릭소스는 황금양을 잡아(?) 그 털을 아이에테스 왕에게 바쳤고, 이후로 황금양털은 콜키스 왕국의 보물이 되어 ‘잠들지 않는 용(군신 아레스의 신수)’이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황금양털의 명성이 널리 퍼져나가서인지, 그리스의 또 다른 왕국 이올코스의 왕자 이아손(Jason)이 이 양털을 얻기 위한 영웅들의 모임을 만들게 되고, 이들을 가리키는 이름이 바로 그 유명한 ‘아르고 원정대(아르고나우타이)’입니다. 

아르고호. 로렌조 코스타의 작품.


이 원정대에는 황금양털을 얻어 삼촌(펠리아스)로부터 왕위를 되찾으려는 이아손과 더불어, 펠레우스(아킬레우스의 아버지), 아탈란테, 멜레아그로스, 네스토르, 오르페우스, 헤라클레스와 같은 수많은 영웅들이 자신들의 명예를 드높이고 모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황금양털을 얻는데 이들 모두보다 더 큰 활약을 했던 사람은, 콜키스의 공주였던 ‘메데이아(Medea)’였습니다. 

메데이아. 에블린 드 모르간의 작품.


그녀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손녀이자, 마녀 키르케의 조카이며, 동시에 모든 마법과 주술을 총괄하는 여신인 ‘헤카테(Hecate)’를 숭배하는 마법사이기도 했습니다. 온갖 마법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지혜로웠던 그녀는 이아손을 보고 사랑에 빠졌고(아프로디테 여신이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이아손을 돕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황금양털을 지키는 용과 그 용의 이빨에서 만들어진 용아병을 물리치는 방법을 알려주고, 아르고호가 콜키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게 하기 위해 자신의 동생을 죽여 그 시체를 바다에 던지는 끔찍한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올코스에 도착한 이후에는 남편에게 왕위를 순순히 내주지 않는 펠리아스를 없애기 위해 ‘젊음을 되찾아 준다’고 속여 펠리아스의 딸들이 직접 그를 죽이고 시체를 삶도록 만들기도 했죠. 

펠리아스의 딸들을 속여,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죽이게 만드는 메데이아.


그녀가 한 행동들만 보면 인면수심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잔인한 것들 뿐이었으나, 결국 그녀가 이렇게 잔혹하게 된 까닭은 오직 ‘이아손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메데이아의 악행에 분노한 이올코스 백성들의 분노로 인해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코린토스로 도망쳤고, 코린토스에 도착한 이아손은 결과가 어찌되었든 그 동안 자신을 위해 엄청난 일들을 저질렀던 메데이아를 버리고 그 곳의 공주인 크레우사(혹은 글라우케)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이에 분노한 메데이아가 코린토스의 왕과 공주, 그리고 자신과 이아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까지 죽인 후 용이 끄는 마차를 타고 떠나는 것으로 황금양털에 얽힌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황금양을 타고 날아올라 콜키스에 도착하는 프릭소스가, ‘아메리카 차베즈가 여는 포탈을 타고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스케일의 영화 내용이 과연 고대 신화와 어떻게 비슷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나타낼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부터 최소 3~4천년 전 즈음에 살았던 사람들의 세계관에 맞춰 생각해보면, ‘날개 달린 황금양을 타고 하늘을 날아 머나먼 나라에 순식간에 도착하는 것’은 정말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신비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메리카 차베즈의 힘으로 열리는 포탈. 저 통로를 통해 다른 평행우주로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신화 속 황금양 만큼이나 신비한 힘이죠.


또한, 포탈을 넘어서는 충격에 의한 멀미(?)로 인해 구토하는 닥터 스트레인지는, 황금양을 타고 날아올랐을 때 현기증을 느낀 헬레의 모습과도 비슷한 점이 있고요. 어지럼증과 구토라는 방식으로 처음 이용하는 이동 수단에 대한 거부감을 잘 표현한 것 같은데, 황금양을 타고 높이 날아올랐을 때 현기증을 느끼는 헬레를 묘사한 고대 이야기꾼의 디테일에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프릭소스와 헬레. 바다로 추락하는 헬레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프릭소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좀 곁가지지만, 멸망한 멀티버스 속의 또다른 닥터 스트레인지와의 대화에서 잠깐 언급된 ‘여동생 도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헬레의 죽음과 겹쳐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기증을 느끼며 하늘 위에서 바다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한 헬레와 ‘얼어붙은 강 위에서 놀다가 깨진 틈 사이로 빠져 죽게 되었던 도나’의 이야기가 너무 비슷하게 느껴져서 영화를 보던 중에도 신기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의 빌런이자 또 한 명의 주인공으로 느껴지는 ‘완다’는 황금양털 이야기 속의 또 다른 주요 인물이자 그리스 신화 속 최고의 마녀이기도 한 '메데이아'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완다는 이전 작품들에서 활약하던 어벤져스 일원의 모습이 아닌, ‘스칼렛 위치’로 완벽하게 각성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타노스에게 사랑하는 비전을 잃고 그 슬픔과 절망을 이기지 못해 일종의 현실조작을 일으켰었던(드라마 ‘완다비전’의 내용) 그녀는, 그 환상 속에서 태어나게 만들었던 자신의 쌍둥이 아들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사악한 마법서인 ‘다크홀드’의 힘에 매료되어 결국 빌런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죠.

드라마 ‘완다비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칼렛 위치’로 각성한 완다.


사실 그녀가 겪은 비극을 생각해보면 이번 영화 속의 잔인한 모습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결국 그녀가 벌이는 행동들은 수많은 죽음과 파괴를 몰고옵니다. 이번 영화 속에서는 완다에 의해, MCU 작품답지 않게 상당히 잔인한 장면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수위가 높은 편인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도 고어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 메데이아 이야기와 흡사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고, 무슨 대가를 치뤄서라도 만나서 같이 살아가고 싶어했던 또 다른 평행 세계 속의 쌍둥이 아들들에게 괴물 취급을 당하게 됩니다. 마치 신화 속의 메데이아가 ‘이아손에 대한 사랑’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한 나머지, 자신의 남동생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해치고 결국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조차도 그녀를 마녀로서 두려워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마지막으로 황금양털 신화와 이번 영화의 가장 안타까운(…) 닮은 점은 닥터 스트레인지의 존재감이 약하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영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신화 속 황금양털 이야에서 ‘프릭소스’보다 ‘황금양털’이 더 자주 언급되고 ‘메데이아’가 가장 강렬한 인물인 것처럼, 닥터 스트레인지 자체보다는 황금양털과 같은 ‘포탈을 여는 힘’과 ‘멀티버스’라는 존재가 더 강조되고, 메데이아 급의 강렬함을 지닌 ‘완다-스칼렛 위치’가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영화의 시작도 알고 보면 완다에 의한 것이었으며, 결말도 닥터 스트레인지가 사태를 해결했다기 보다는 완다 스스로가 마음을 바꾸어 다크홀드와 함께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니까요.

여러가지 의미로 ‘스칼렛 위치’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이번 영화.



물론 이번 영화에서 닥터 스트레인지의 서사 역시 존재했으며(특히 크리스틴 관련), 다중우주를 넘나들며 여러 가지로 실패한 ‘자신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기에 다음 영화에서는 더욱 성장한 마법사로서의 위엄을 보여줄 것 같다는 기대감도 커졌습니다. 특히 ‘어벤져스-인피니티 워’ 당시 단 하나의 승리하는 미래의 길을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감수했던, 공리주의적이지만 냉정한 캐릭터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성격(마지막에 아메리카 차베즈를 믿고 응원했듯이)으로 변해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향후의 모습이 궁금해집니다. 닥터 스트레인지 특유의 까칠한 성격도 매력적이지만, 기존 영웅들이 대거 은퇴한 상황에서 중심축을 잡아줄 만한 캐릭터가 되어야하기에 이런 식의 변화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화 속 프릭소스가 ‘새엄마로부터 도망친 후 도착한 콜키스에서 공주님과 결혼하고 황금양털은 임금님께 바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란 고전적인 결말이었다면, 닥터 스트레인지는 황금양을 타고 날아다니는 듯한 멀티버스 모험을 지속하며 새로운 모험을 경험하게 될 것 같습니다. 꽉 닫힌 결말을 지닌 고대 신화도 읽는 사람으로서는 즐겁지만, MCU가 보여줄 다중우주 만큼이나 결론을 예측하기 힘든 이야기도 참으로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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