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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Aug 18. 2022

의학 용어의 기원이 된 그리스 신들의 이름 (3)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질병, 노소이(Nosoi)

오늘 다룰 의학 용어는 ‘질병’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nosos (nosus)’에서 파생된 ‘nosocomial (병원내, 병원 유래, hospital-acquired)’입니다.


이 단어는 질병을 의미하는 어근 ’noso-‘에 돌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 ‘komeion’을 더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말그대로 ‘환자를 돌보는 곳에서 발생하는 질병’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발생하는 질환이나 상태의 앞에는 ‘nosocomial’이라는 단어를 붙이게 되는 것이죠.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병원내 감염을 의미하는 ‘nosocomial infection’입니다.

여러분도 코로나 바이러스 판데믹 이후로 종종 뉴스에서 아래와 같이 ‘원내 감염’를 소재로 다루는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코로나 검사로 병·의원 북새통… 원내 감염 가능성은?

출처 :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2/03/15/2022031501561.html



병원이라는 곳이 아무래도 많은 환자가 모이다 보니, 전염병을 지닌 환자가 입원하여 그 병이 퍼지게 되는 사태도 있을 수 있고, 환자들이 전반적으로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라 감염에 더 취약하여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의료진이 다양한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병원균이 옮아가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병원 내 손소독과 같은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질병관리본부에서 제시한 의료기관 손위생 관리 지침.



그럼 질병을 의미하는 ‘nosos’와 관련이 있는 신(혹은 존재)가 나오는 그리스 신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제가 ‘신 혹은 존재’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이 신화의 주인공인 노소이(nosoi)의 정체가 조금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질병을 의인화한 존재라는 설정도 있고, 한 편으로는 밤의 여신 닉스 혹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자식이라는 설도 있기 때문에 저도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우선은 ‘신’의 하나로 보고 진행하기로 하겠습니다.



노소이가 등장하는 순간은 기나긴 그리스 신화 속에서 아주 잠깐이긴 합니다.

노소이는 헤시오도스(Hesiod)가 쓴 신통기(Theogony)에 등장하는데, 바로 최초의 인간 여성인 ‘판도라(Pandora)’가, 신들로부터 받은 상자(원래는 항아리)를 열었을 때 이 세상으로 빠져나온 존재 중 하나이기 때문이죠.

판도라의 상자(존 윌리엄 워터하우스)를 묘사한 그림(좌), 실제 신통기 속에 묘사된 판도라의 상자는 사실 사진과 같은 형태의 항아리(Pithos)였습니다(우).


현대에는 대단한 비밀이 밝혀지거나 하는 경우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지만, 신화 속 판도라의 상자는 신들이 인간에게 보낸 ‘벌칙’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사실 판도라 자체가 ‘모든 것을 선물을 받은’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인간에 대한 제우스의 ‘악의’가 가득 담긴 채 창조된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판도라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그리스 신화 속 ‘인간의 시대’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시대에 대해서는 헤시오도스와 오비디우스가 조금 다르게 묘사하는데, 저는 헤시오도스의 의견에 따라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시대는 티탄 신족인 크로노스가 다스리던 ‘황금시대’이며, 이 때의 인간들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다툼이나 경쟁 없이 평화롭게 지내며 땅에서는 농사 짓지 않아도 수많은 곡식과 과실이 저절로 자라나 인간들을 배부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주 건강하게 오래 살다가 잠자듯이 편하게 죽게 되며 그들 중 훌륭한 영혼 일부는 후세의 인류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황금시대를 묘사한 그림.



두번째 시대는 제우스가 신들의 제왕이 된 후에 나타난 인류들이 사는 시대로, 은의 시대라고 불리웠습니다. 이들 역시 오래 살고 비교적 평화롭게 지냈으나 황금시대의 사람들만큼 고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죽은 후에는 모두 ‘축복받은 영혼’으로 대접을 받았으며, 이 시대까지는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가 인간들 사이에서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은의 시대를 묘사한 그림.



세번째 시대인 청동 시대는 훨씬 힘들고 거친 시대였으며, 제우스는 이 시대의 인간들을 물푸레나무에서 창조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폭력적이고 다툼을 일삼아서 그 누구도 이름 있는 영혼을 남기지 못하고 하데스가 다스리는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고 합니다. 이 시대엔 이미 정의의 여신이 세상을 등진 상태(그녀는 처녀자리로, 그녀가 들고 있던 천칭은 천칭자리로)였으며, 결국에는 대홍수로 세상은 한 번 멸망하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들을 버리고 하늘로 올라간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



네번째 시대는 ‘영웅들의 시대’이고, 이 시대는 이전보다는 나은 인류들이 살았고, 헤라클레스와 같은 반신(半神) 영웅들이 활약하였으며, 트로이 전쟁 이야기도 이 시대에 속한다고 여겨집니다. 보통 저희가 그리스 신화라고 생각하는, 신과 인간들이 어우러지고 수많은 위대한 영웅들이 활약하는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트로이전쟁을 끝낸 트로이의 목마. 그리스 신화 속 굵직한 사건들은 모두 영웅들의 시대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섯번째 시대는 철의 시대로, 헤시오도스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바로 철의 시대라고 여겼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형제끼리 싸우며 손님과 주인이 서로를 믿지 못하며, 끝없는 전쟁과 다툼이 지속되고 힘과 거짓이 지배하는 시대인 것이죠.

철의 시대를 묘사한 그림.



신들이 함께 하지 않는 인간들의 시대가 불의로 가득 차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아이고 말세다!’하는 식의 한탄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헤시오도스는 신화의 내용과 자신이 실제 살아가던 시대를 잘 연결하여 설명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간의 시대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



판도라는 이러한 인간의 시대 중, ‘황금시대’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존재입니다.

황금시대의 말기에는 티타노마키아를 통해 신들의 제왕이 크로노스에서 제우스로 변하게 되었으며, 이 시점에 티탄 신족이었던(그러나 제우스 편을 들어 타르타로스에 갇히지 않았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먼저 생각하는 자)는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아마 신들 사이의 권력 변화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들끼리도 독립적으로 발전할 힘을 주고자 해서 벌인 일이 아닐까 싶지만, 제우스의 입장에서는 매우 괘씸한 일이었기에 프로메테우스는 절벽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우스의 분노는 프로메테우스를 벌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불을 받은 인간들(게다가 자신이 쫓아낸 아버기 크로노스가 다스리던 인간들!)의 황금시대를 끝장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프로메테우스의 형벌



지혜로운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무언가 꾸밀 것이라 생각했기에, 동생인 에피메테우스(Epimetheus, 나중에 생각하는 자)에게 제우스가 보내는 무엇도 받으면 안 된다는 경고를 미리 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형보다는 확실히 경솔했고, 또한 제우스가 보낸 선물이 너무 매혹적이었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선물이 ‘판도라’인 것이죠.

신들에 의해 창조되는 판도라.



판도라는 올림포스 최고의 기술자인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아름다운 외형에, 아테나가 전수한 바느질과 베를 짜는 기술, 아프로디테가 준 매혹적인 태도(갈망과 지친 팔다리…라고 하는데 나른하게 늘어진 모습을 묘사하는 듯도 합니다), 헤르메스가 준 ‘거짓과 교묘한 속임수’ 등등…을 지닌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절대 열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커다란 상자(항아리)를 받아서 헤르메스에 의해 인간 세상으로 옮겨집니다.


신들의 전령이자, 거짓과 속임수, 도둑질의 신이기도 한 헤르메스에 의해 옮겨지는 판도라. 헤르메스가 그녀를 인도했다는 것부터 매우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황금시대는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시대였기 때문에 ‘최초의 여성’이 주는 충격이 더 컸던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녀는 에피메테우스의 부인이 되었고, 인간 세상에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퍼뜨리게 됩니다(이로 인해 남자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진다는 해석이 있기도 합니다).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와 살다가 불현듯 자신이 받은 상자에 대해 떠올렸고, 결국 호기심에 못 이겨 그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온갖 재앙과 역병(드디어 등장하는 노소이!)들이 세상에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뚜껑을 다시 닫았는데, 이미 모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뛰쳐나간 뒤였으나 오직 희망(그리스어로 Elpis)만이 나가지 않고 그 안에 남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항아리를 여는 판도라. Nicolas Régnier, 1626년 작품.



우리는 여기서 희망이 인간들 곁에 남아있기에 모든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헤시오도스는 왜 희망이 남아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의 마지막을 ‘제우스의 의지에서 도망칠 길은 없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 지었을 뿐이었죠.



어찌 보면 헤시오도스는 여기서 등장하는 희망을,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존재가 아닌 ‘헛된 기대나 미련’으로 해석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퍼진 온갖 재앙과 역병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그 기대와 미련으로 기나긴 고통을 계속 감내하게 만드는 ‘제우스의 뜻’이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아있던 ‘희망’의 역할이란 것이죠.


물론 이러한 이야기와 해석은 어차피 신화 속 황금시대에 대한 것이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판도라의 상자 속 희망을 우리의 방식대로 해석해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삶의 어려움을 이겨낼 ‘인간의 자유의지와 끈기’와 같은 식으로 말이죠.




어쨌든 판도라에 의해 세상에 풀려나온 ‘노소이’는 여러가지 역병을 일으키게 됩니다. 아마 이러한 식으로 건강하게 장수하던 황금시대 인간들은 그 힘을 잃고 사라지며, 은의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황금시대를 끝내려던 제우스의 의도가 아주 잘 반영된 셈이죠.



이렇게 한 시대를 저물게 한 노소이는 로마 시대에는 Morbus (Morbi), Pestis, Tabes 등으로 불리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 역시 의학 용어 속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Morbus에서 파생된 ‘Morbid’라는 단어는 ‘병적인’을 의미하며, Morbidity rate (이환률: 집단 중에서 어떤 병에 걸린 환자의 빈도를 백분율로 표시하는 것)이라는 용어로도 활용됩니다.

영화 ‘모비우스(Morbius)’ 포스터. 마블 캐릭터 중의 하나인(일종의 흡혈귀) 모비우스의 이름도 Morbus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Pestis는 페스트 혹은 흑사병을 나타내는 단어인 ‘Pest’의 어원이고, 흑사병의 원인균으로 알려진 Yersinia pestis라는 그람음성세균의 이름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Tabes는 ‘만성 소모성 질환’이란 의미로 사용이 되는데, 매독의 감염 형태 중 하나인 척수 매독의 경우에는 ‘Tabes dorsalis’라는 명칭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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