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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Sep 02. 2022

의학 용어의 기원이 된 그리스 신들의 이름 (4)

시간의 신과의 싸움이기도 한 만성 질환

의사들이 자주 쓰는 용어 중에 ‘만성(Chronic)’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의학 용어이긴 해도, 병원에 방문하는 환자나 보호자, 그리고 의학 드라마나 의학 관련 뉴스를 보는 분들도 종종 들어본 적이 있는, 의학 용어 치고는 상당히 잘 알려진 편인 단어입니다.

보통 급성(Acute)과 만성이 짝을 이루는 단어들처럼 여겨지고, ‘급’이라는 말에서 ‘갑자기 빠르게 발생’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으며 만성은 이와 반대로 ‘서서히 느리게 진행하는’라는 느낌을 줍니다.


급성과 만성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



단순한 이분법 같지만, 급성과 만성의 대체적인 의미는 위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중에서 ‘만성’에 대해 조금 더 의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여러가지 개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만성 혹은 만성 상태(chronic condition)와 만성 질환(Chronic disease)을 구분 지어 생각해볼 수 있죠. 만성이란 표현 자체가 굉장히 다양한 지속적인 상태, 질병, 기능적 장애 등을 포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코로나 판데믹으로 더욱 유명해진)의 산하기구인 ‘U.S. National Center for Health Statistics(건강통계센터)’가 내린 정의에 따르면, 만성이란 ‘3개월 이상’ 지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만성 질환에는 백신을 통한 예방이나, 완치가 불가능하며,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 질병들이 속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2).


CDC에서 정의하는 만성 질환에 속하는 질병들. 심장질환, 암, 만성호흡기질환, 알츠하이머병, 당뇨, 만성콩팥질환, 뇌졸중 등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검색해보는 위키피디아에서는 3개월 이상 지속되는 관절염, 천식, 바이러스 간염, 에이즈, 암, 당뇨 등이 모두 일반적인 만성 질환에 포함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3).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사람 사이에서 전염되지 않으며, 천천히 진행하는 양상의 질환’을 만성 질환으로 정의하며, 크게 심혈관질환/만성호흡기질환/암/당뇨의 4가지 종류의 질환을 만성질환으로 보고 있습니다(4).

종합하여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3개월 이상 지속되며, 완치되기 어려운 양상’을 지닌다는 점이 만성 질환으로 정의하는데 가장 중요한 특징일 것입니다.



만성(Chronic)의 의미에 ‘시간의 흐름’이란 개념이 중요해서인지, ‘chronic’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시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로 시간을 의인화한 신인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큐피드의 날개를 자르는 크로노스. 17세기 작품.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서는 카오스가 태초에 나타나고 이후에 다양한 존재들이 탄생한 것으로 기술하지만, 고대 그리스 신앙에서는 크로노스가 먼저 나타난 이후에 그로부터 아이테르(빛나는 천공), 카오스, 그리고 ‘알(Egg)’이 탄생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알에서 ‘파네스(Phanes)’라고 하는 양성(냠녀한몸)을 지닌 신이 나타나 첫 세대의 신과 우주를 창조했다고 전해집니다.


태초의 알(좌)과 생명창조의 신 파네스(우).



젊고 아름다운 모습의 신들이 주류는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 답지 않게, 크로노스는 거의 항상 ‘무심한 표정과 긴 회색 수염을 지닌 노인’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사그라들고 파괴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을 은유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크로노스를 묘사한 그림에는 ‘낫’, ‘모래시계’, 혹은 황도 십이궁도(zodiac wheel)’가 같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이러한 소품들의 존재로 그를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크로노스의 배우자로 여겨지는 ‘불가피함과 필연의 여신 아난케(Ananke)’가 뱀의 형상으로 함께 묘사되기도 합니다(앞서 언급했던 파네스가 크로노스와 비슷한 형태로 표현되기도...).


크로노스를 묘사한 그림 속에 등장하는 낫과 모래시계(좌측 그림의 황색 원), 뱀에 둘러싸인 모습의 크로노스(가운데), 황도십이궁도와 함께 묘사되는 크로노스(우). 



‘크로노스’라는 이름 때문에(영어로도 은근 비슷한 이름이죠: Chronos VS. Cronus), 티탄 신족들의 우두머리이자 제우스의 아버지였던 존재(Cronus)와 많이 혼동되곤 하였으며, 플루타르크의 이야기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서도 ‘둘은 이름만 다른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5).


자신의 아이들을 잡아먹은 티탄신족 크로노스와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개념이 뒤섞여 묘사된 것으로 보이는 그림.



이후로도 둘의 이미지는 꾸준히 혼동되거나 섞이게 되었습니다. 티탄신족 크로노스가 로마에서는 농경의 신인 ‘사투르누스(Saturnus)’와 거의 같은 존재로 여겨지며 ‘낫을 든 남성’의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는데, 이러한 인식이 르네상스 시대에는 ‘추수하는 낫을 든 시간의 아버지(Farther Time)’의 이미지로 전해지며,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와 티탄신족의 우두머리이자 농경의 신 이미지를 지닌 크로노스 간의 혼동을 가속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투르누스를 묘사한 로마 시대 폼페이의 벽화(좌), 아버지 시간 혹은 시간의 아버지(Father time)을 묘사한 청동상(우).



그리고 이러한 혼합된 이미지는 현대 서양에서 일종의 저승사자로 묘사되는 ‘그림 리퍼(Grim reaper)’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시간의 절대성과 무정함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의 이름에서 ‘만성’을 의미하는 단어 ‘chronic’이 파생되었으며, 그 의미대로 만성 질환들은 속절없이 지속되며 무정하게 환자들을 힘겹게 만듭니다.

그러나 의학의 발달을 통해, 과거에는 만성으로 생각되는 질환들이 완치되기도 하고(결핵), 급격하게 진행되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던 질환들(일부 암이나 에이즈 등)이 다양한 치료와 관리를 통해 비교적 안정된 만성 상태를 이루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시간의 흐름과 함께하는 만성 질환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의학의 발전과 함께 치료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각주>
1.     Front Public Health. 2016; 4: 159. Use Your Words Carefully: What Is a Chronic Disease? Stephanie Bernell and Steven W. Howard.
2.     MedicineNet. Definition of Chronic Disease. (2016).
3.     Wikipedia. Chronic Condition. (2016).
4.     WHO. Noncommunicable Diseases. (2016).
5.     Plutarch, On Isis and Osiris,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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