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터 현재까지...
9월 들어 여러가지 일이 많아서 글을 못 쓰고 있다가, 오래간만에 인사 드릴 겸하여, 신경과에서 제가 주로 보는 질환인 파킨슨병의 역사에 대해 정리해 본 글을 가져와 보았습니다.
파킨슨병은 그 이름 때문에 많은 분들이 낯설어 하시기도 하고, "파키스탄 병, 파키스병…" 등으로 부르시기도 합니다.
파킨슨병 자체가 한국에 알려진 지가 아주 오래된 질환은 아니라서([대한 파킨슨병 및 이상운동질환 학회]만 해도 2006년에 창립되었으니까요), 어느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새로운 병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파킨슨병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면, 생각보다 아주 먼 예전부터 파킨슨병 환자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는 내용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인류 역사 속에서 관찰되어 왔던 파킨슨병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고, 파킨슨병에 대한 연구가 어떠한 식으로 진행되어 왔는지에 대해, 조금은 쉽고 재밌게알려드려보고자 합니다.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편안하게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파킨슨병”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나이가 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손떨림, 움직임이 느려지는 것, 몸이 뻣뻣해지는 것, 표정이 줄어들고, 상체가 숙여지며, 걸음걸이가 변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이런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 대한 기록은 인류의 기나 긴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기원 전 12세기, 지금으로부터 대략 3000년 이전의 이집트 문헌(파피루스!)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19왕조를 다스리던 나이가 많이 든 왕이 느리게 움직이고, 손을 떨고 침을 흘린다는 식의 묘사가 기록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현대 의사의 시각으로 보기에는 노화와 함께 발생한 신경퇴행성 질환이, 특히 파킨슨병이 의심되는 대목이죠.
이집트에 이어 또 다른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 인도의 기록에서도 파킨슨병 증상이 의심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도에는 수천년에 걸쳐 모은 여러가지 의학 상식/지식들을 기원 전 600년경에 집대성해서 일종의 책으로 만든 것이 있는데요, 그 책의 이름은 ‘삶의 지식’이란 뜻을 지닌 ‘아유르베다(Ayurveda)’입니다.
이 책에 ‘Kampavata’라는 질병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떨림이 있고, 몸이 뻣뻣하고, 우울하며, 움직임이 없어진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파킨슨병 증상과 아주 비슷하죠.
그리고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Mucuna Pruriens’라는 식물 뿌리를 먹으면 된다는 정보도 같이 적어 놓았는데, 실제 이 식물의 성분을 분석해보니 우리가 현대에 사용하는 레보도파 성분이 들어있다고 합니다(씨앗 안에 5%정도의 레보도파를 포함하고 있는…).
물론 현대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정확히 왜 저 병에 걸리고, 왜 저 식물을 먹으면 증상이 좀 나아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입니다.
이제 현대 서양 문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로마 쪽으로 가보면, 기원전 3세기에 살았던 그리스 출신 의사이자 해부학자인 에라시스트라투스(Erasistratus)는 파킨슨병 환자가 보일 수 있는 보행 동결(Freezing of gait) 증상을 ‘paradoxos(역설)’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걷다가 갑자기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멈추게 되는 환자들을 보고 붙인 것이었죠.
그리고 고대 로마 제국이 의사 갈렌(혹은 갈레노스, Galen or Galenus)은 서기 175년에 ‘가만히 있을 때 떨리고, 몸이 앞으로 숙여지고, 마비 증상이 나타나는 환자’에 대해 묘사하였고, 이 증상들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파킨슨병에 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후로 17세기에 들어오면 (Franciscus Sylvius)라는 네덜란드 의사가 본태성 떨림과는 다른 가만히 있을 때 나타나는 떨림(Tremor at rest)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두 종류의 떨림을 구분하는 법에 대해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의사인 프랑수아 보이지(François Boissie)는 걸을 때 점점 빨라지며 앞으로 몸이 쏠리는 가속 보행(Festination)과 자세균형 유지(postural instability)에 장애가 발생하는 증상에 대해 묘사하였습니다.
페렌츠 파파이 패리즈(Ferenc Pápai Páriz)라는 헝가리 의사는 현대 기준의 파킨슨병 전통적인 주요 증상 네 가지(떨림, 근육 경직, 느린 움직임, 자세 불안정)를 모두 기술하기도 하였습니다.
동양 쪽의 기록을 살펴보면, 2400년 전에 쓰여진 [황제내경]에서 ‘떨리고 뻣뻣하고 증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바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금나라(우리나라로 치면 고려시대) 시기에 쓰여진 의서 ‘유문사친’에도 전형적인 파킨슨병이 의심되는 환자 케이스에 대해 기술되어 있으며(59세 남자가 3년 전부터 턱/손/발이 떨리고, 기운이 없고, 우울해하며, 발걸음이 무겁고, 입을 벌리고 있으며, 멍하니 응시한다), 증상을 호전시키기 위한 약물 치료를 시행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때 진단 자체는 “바람에 의한 떨림”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으나 현대의 기준으로는 파킨슨병이 의심되는 환자입니다.
명나라 시기의 의사인 왕긍당은 그의 저서인 육과증치준승(六科證治準繩)에서, “수년 간 지속되는, 떨리고 뻣뻣하며 잘 못 움직이는 증상을 지닌 노인 환자”의 떨림 증상을 조절하는 약제에 대해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도 이 증상의 원인 자체는 “바람”이나 “혈액의 문제” 등으로 생각하긴 했으나 정확한 진단과 증상 조절을 위한 노력은 계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파킨슨병으로 의심되는 환자들에 대한 여러가지 기록 및 치료를 위한 노력이 지속되던 중, 19세기에 들어와서 드디어 ‘파킨슨병’이라는 이름이 붙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바로 영국 런던에 살던 의사 “제임스 파킨슨(James Parkinson)”이 1817년에 “An Essay on the Shaking palsy”라는 글을 발표한 것이죠. 이 문헌에서 제임스 파킨슨은 자신이 진찰한 4명의 환자에 대한 굉장히 자세한 임상 정보를 기술하고, 2명의 길에서 만난 사람의 상태에 대한 설명도 추가하였습니다.
물론 이제까지의 역사 속 파킨슨병에 대한 이야기를 뒤돌아보면, 왜 하필 제임스 파킨슨이 쓴 글이 가장 주목을 받고, 질병 이름이 붙여지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파킨슨병 역사에 대해 다시 훑어보면서 제임스 파킨슨 이전에도 참 괜찮은 환자 정보를 묘사한 글이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임스 파킨슨의 글을 읽어보면, 정말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파킨슨병 증상에 대해 기술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임스 파킨슨은 “Shaking palsy(떨림 마비)”에 대해 설명하며 “저절로 떨리는 증상이 나타나고, 근육의 힘이 줄어들고, 몸이 앞으로 굽어지고, 걷다가 점점 걸음이 빨라지고, 감각이나 인지기능의 손상은 관찰되지 않는다.”라고 정의합니다.
이와 더불어 자신이 과거의 의사들(갈레노스나 프란시스퀴스와 같은)이 남긴 정보를 토대로 어떠한 식으로 진단을 내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들어있습니다.
환자들의 증례를 모아 놓은 부분에서는, ‘떨림, 느린 움직임, 근력 저하, 걸음걸이의 이상, 자세의 변화, 일상 생활 수행의 어려움, 변비나 침흘림, 섬망 발생’과 같은 환자들의 증상에 대해 자세히 기술함과 동시에 이 질환이 서서히 진행하는 것이며, 뇌졸중이나 경련과 같은 질환에 의한 것이 아님을 감별하는 내용도 들어가 있습니다.
제임스 파킨슨이 남긴 자세한 기술에 의해, 이제까지는 단발적으로 기록되기만 하고, 원인과 치료도 증상에 따라 제각각으로 판단되었던 환자들을 하나의 질환으로 묶어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제시가 되었고, 결국 그가 처음 글을 발표한지 60년이 지나서 이 질환에 파킨슨병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현대 의학과 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더불어 파킨슨병의 병리 소견, 도파민과의 관련성 규명, 증상 치료 방법의 개발 등이 지속되어, 21세기에는 매우 체계적인 파킨슨병의 진단과 치료 체계가 정립되는데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현재는 환자와 보호자분들 입장으로 보아도, 이전 세대에 비해 파킨슨병 자체에 대한 정보도 많이, 그리고 쉽게 구할 수 있고, 관련 의료진을 만나거나 진단 및 치료를 받는 것이 상당히 수월한 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파킨슨병의 역사 이야기는 당장 지금의 진단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심심풀이 교양 같기도 하고, 이미 지나간 과거의 흔적에 불과한 것이란 생각이 드는 내용이죠.
하지만 파킨슨병이, 인류 역사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해온 질환이며, 많은 사람들의 끊임 없는 노력에 의해 하나의 질환으로 규정되고 계속 진단과 치료법이 개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또한, 이제까지의 역사처럼 파킨슨병과 관련된 모두가 노력을 계속한다면, 예방이나 완치 방법을 찾아낼 날이 올지 모른다는 희망을 주기도 합니다.
“마비된 채로 떨리는 기이한 증상”이 어느 순간 “파킨슨병”이란 이름이 붙고, 치료제가 개발되고 이를 전문적으로 보는 의사들이 늘어나고 국가 및 사회 단위의 관심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파킨슨병을 이겨낼 미래도 그려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참고문헌>
1. [Prehistory of Parkinson's disease]. García Ruiz PJ. Neurologia. 2004 Dec;19(10):735-7.
2. Unresolved issues relating to the shaking palsy on the celebration of James Parkinson's 250th birthday. Andrew J Lees. Mov Disord. 2007 Sep;22 Suppl 17:S327-34.
3. https://graecomuse.wordpress.com/2012/02/09/a-shaky-beginning-parkinsons-disease-in-ancient-history/
4. Tremor in Latin texts of Dutch physicians: 16th-18th centuries. Koehler PJ, Keyser A. Mov Disord 1997;12:798-806.
5. The description of all four cardinal signs of Parkinson’s disease in a Hungarian medical text published in 1690. Bereczki D. Parkinsonism Relat Disord 2010;16:290-3.
6. Early Descriptions of Parkinson Disease in Ancient China. Zhen-Xin Zhang, MD; Zhen-Hua Dong, MD; Gustavo C. Román, MD. Arch Neurol. 2006;63(5):782-784.
7. An Essay on the Shaking Palsy 1817. Parkinson J. Chichester: Wiley-Blackwell,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