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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Sep 17. 2023

의사들이 더 이상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지않는 이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3] 속 생체 실험에서 떠올리는 비극

정말 오래간만에 인사 드립니다.


그 동안은 일이 너무 바빠서 글을 전혀 쓸 수가 없었는데, 조금이라도 글을 쓰려고 노력해야할 것 같아서 다시 시작해보았습니다.


다들 항상 건강하시고 다가오는 한가위 연휴도 즐겁게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글을 다시 시작해보겠습니다^^.





마블 영화의 인기가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최근에 개봉했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는 꽤나 흥미로웠습니다.

약칭인 ‘가오갤’로도 불리우는 이 영화는 마블 영화 세계관(Marvel Cinematic Universe, MCU)에 속하는 작품이지만, 지구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다루는 다른 마블 영화와 달리 ‘우주’가 주요 배경이며, 등장인물들도 영웅적이기보다는 ‘악동’스러워서 톡톡 튀는 매력이 넘치는 악동(과 악당의 경계쯤 있어 보이는)들이어서 이야기 자체가 좀 더 역동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또한 추억의 올드팝들이 배경음악으로 자주 등장하여 그 음악들을 듣는 재미로도 꽤나 즐겁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의 한국 개봉 포스터



코로나 판데믹 이전인 2018년에 개봉한 [어벤져스-인피니티 워] 이후로, 마블 영화 속의 주요 영웅이었던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은퇴하고, 여러 낯선 인물들이 추가되어 마블 영화에 대한 진입 장벽이 올라가고 있는 와중에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나름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벤져스-인피니티 워]의 포스터. 재밌는 작품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를 기점으로 익숙했던 캐릭터들이 대거 은퇴하며 기존 팬들이 흥미가 하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가오갤 시리즈의 감독인 제임스 건의 능력과 뚝심(?), 그리고 초기 멤버들이 시리즈 내내 개근하고 있는 상황 덕분에 가오갤 특유의 우주 모험물의 색채를 잘 유지한 채로 시리즈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3편까지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3편은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영화이기도 해서 어떤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보여줄지 상당히 궁금했는데, 여러 주연들 중에서도 과거가 제대로 조명된 적 없는 ‘로켓(너구리)’의 서사를 다루면서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잡는, 성공적인 결과물을 선보였습니다.

로켓의 개인 포스터. 귀여운(?) 너구리의 모습이지만, 지능은 등장인물들 중에서 최고 수준이며 입담 역시 걸쭉한 캐릭터입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과거가 있음이 밝혀집니다.


가오갤 시리즈 초반부터 ‘로켓’이 생체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암시는 종종 등장합니다. 드넓은 우주에 우연히 ‘지구에 사는 너구리를 닮은 형태의 외계 생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가오갤 1편 속에 등장하는 로켓의 대사를 살펴보면, 누군가가 그를 개조해서 ‘지성이 있고 이족 보행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으며, 로켓 스스로는 자신의 그런 상태를 괴물(monster)로 여기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음도 드러납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로켓을 개조했던 존재가 드디어 등장하게 되는데, 그는 바로 ‘하이 에볼루셔너리(High Evolutionary)’라는 인물입니다.

가오갤3에 등장하는 빌런인 하이에볼루셔너리(가운데).



그는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진화(evolution)에 집착하는 인물로, 여러 생물들을 가지고 생체 실험을 시행하고, 그를 통해 모든 방면에서 우수한 생명체를 탄생시키고 그들이 살아가는 ‘악이 없는 완벽한 사회(Perfect Society)’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얼핏 들으면 과학의 힘을 통해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하는 이상주의자 같지만, 실제로는 아주 잔혹한 생체 실험을 서슴없이 시행하고, 실패작이라고 판단된 실험체들은 가차없이 처분하는(자기 기준에 부족한 실험체는 바로 소각해버리는 잔인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악한 인물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피조물인 로켓이 자신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자, 로켓을 질투하며 그의 뇌를 적출하려는 비열한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이제까지 등장한 마블의 수많은 빌런들 중에서, 가장 악하고 저열하며, 그 와중에 자기합리화까지 하는 최악의 악당이란 생각이 드는 존재였습니다.

생체실험을 당하고 있는 로켓의 모습, 실험 내용이 자세히 묘사되진 않지만 아주 고통스럽고 끔찍한 과정이었다고 언급됩니다.



하이 에볼루셔너리는 아직 순진한 상태였던 여러 실험체들에게 그들을 ‘이상향’에 보내줄 것이라고 속이며 로켓의 뇌를 적출하고 나머지는 없애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자신들이 처분당할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 로켓은 친구들과 함께 탈출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이 에볼루셔너리에게 발각되어 로켓을 제외한 모두는 죽게 되고, 로켓을 하이 에볼루셔너리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고 홀로 탈출하게 됩니다. 이후에는 가오갤의 멤버를 만나 모험을 하게 되지만, 생체 실험과 친구들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는 계속 로켓을 괴롭힙니다.

로켓과 함께 잔혹한 생체실험을 당했던 친구들. 왼쪽부터 라이라, 티프스, 그리고 플로어. 슬픈 처지임에도 희망을 잃지 않던 순수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역사 속에 있던 사건들의 오마쥬 같다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잔인한 생체 실험과 열악한 철장 안에서 살아가는 실험체들의 모습이, 나치 독일 시절의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이 에볼루셔너리의 기준에 부적합한 실험체들을 처분하는 모습은 홀로코스트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끔찍한 사건도 생각 나게 하였습니다.


바로 나치가 저질렀던 장애인 대량학살 사건인 ‘T4 작전(T4 Action, T4 Program)’입니다


"병자나 기형아를 절멸시키는 것이야말로, 병적인 인간을 살려두어 꾸역꾸역 보호하려는 미친 짓에 비하면 몇 배나 자비로운 일이다."
     -  아돌프 히틀러



위와 같은 히틀러의 정신 나간 우생학 사상에 입각하여 1932년부터는 장애인에 대한 불임시술이 시행되었으며(유전적 질환의 자손 예방법),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이후에는 장애인들에 대한 강제 안락사 정책이 실행되었습니다.
국가가 장애인과 정신질환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한 것이죠.

베를린 티어가르텐 4번지(Tiergartenstraße 4 – 작전명이 T4가 된 이유)에 위치한 병원에 강제 수용되었던 장애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약물 주입, 가스실, 아사 등)되었으며, 그들의 가족에게는 폐렴이나 뇌질환으로 사망했다는 가짜 진단서가 전달됩니다.

이 비인도적인 학살은 결국 독일 국민들의 반발로 인해 1941년에는 폐지되었으나, 비공식적으로는 은밀히 계속 자행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작전에 참여했던 의료진과 기타 인력들은 절멸 프로그램인 ‘홀로코스트’에 투입되어 또 다른 잔혹한 학살극(수용소에서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분류하여 죽이는 것)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T 작전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카를 브란트. 그는 결국 종전 후에 반인륜적 범죄를 일으킨전범으로서 교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정말 끔찍하게도, 여러 의사들이 T4 작전에 참여했고, 그들 중 23명은 카를 브란트와 함께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오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후인 1948년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제22차 세계의사협회(WMA World Medical Association )에서 ‘제네바 선언(Declaration of Geneva, Physician's Oath)’이라는 것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 선언은 이후 5차례 정도의 개정을 통해 현대 실정에 맞게 변화되었으며, ‘히포크라테스 선언’을 대신하여 현대 의사들이 낭송하는 선서로 자리 잡게 됩니다.

<제네바 선언>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품위를 가지고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환자가 나에게 알려준 모든 것에 대하여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자매처럼 여기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관계,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 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위 제네바 선언에서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라는 문장에 ‘홀로코스트’에 부역했던 의사들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으며, 앞으로 그와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현대의 의료 윤리 형성에도 영향을 주어 비윤리적인 생체실험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며, 임상시험 수행에도 엄격한 윤리 기준을 적용하도록 하는 환경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의사들의 ‘의사윤리강령’ 선서 장면. 의사 면허를 취득한 의대 졸업생들은 이와 같은 선서식을 하게 됩니다(사진 출처 – 의협신문).




제네바 선언 탄생의 기원이라고 볼 수도 있는 비극, T4 작전에서 직접적으로 학살에 가담하진 않았으나 희생자들의 뇌를 적출하여 연구에 이용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뇌를 부검한 자료를 이용하여 ‘신경과(Neurology)’ 질환을 발견하여 학계에 보고하고, 그들의 이름이 병명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희생자들의 뇌를 연구하여 밝혀진 질환의 이름은 ‘할러포르덴-스파츠 병(Hallervorden–Spatz disease, HSD)’으로, 여기에는 ‘할러보르덴(Julius Hallervorden, 1882 – 1965)’과 ‘스파츠(Hugo Spatz, 1888 – 1969)’라는 독일의 의사이자 신경병리학자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1).

줄리어스 할러보르덴(좌)와 휴고 스파츠(우)의 사진. 좌측의 사진에는 ‘T4 작전’을 의미하는 독일어인 ‘AKTION T4’라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이 두 명은 T4 작전으로 학살된 수많은 사람들의 뇌를 부검하였고, 그 중 특정한 환자들의 뇌에서 특이한 소견을 발견하여 새로운 질환으로 학계에 발표하게 됩니다(2). 그리고 그들의 공로가 인정되어 병명에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전후에도 두 명은 각자 학계에서 꾸준히 활동하였고, 할러보르덴은 독일 신경병리학회의 학회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할러보르덴의 경우에는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의사인 ‘레오 알렉산더(Leo Alexander)’와의 나누었던 대화가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섬뜩합니다(할러보르덴이 T4 작전 관계자와 나눴던 이야기를 레오 알렉산더에게 이야기해준 것).

"Look here now, boys. If you are going to kill all those people, at least take the brains out so that the material can be utilized.” They asked me, “How many can you examine?” and so I told them ... the more the better"(3)

한글 번역:  “이봐, 그 사람들을 다 죽일 것이라면, 그들의 뇌를 꺼내 사용할 수 있게 해줘.”
                  “얼마나 검사할 수 있는데?”
                   “많을수록 좋아.”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할러포르덴-스파츠 병’이라는 이름은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되었고(아시아 지역에서는 비교적 최근까지 사용이 되었습니다), ‘신경변성과 연관된 판토테네이트 카이네이즈(Pantothenate Kinase Associated Neurodegeneration; PKAN)’ 혹은 ‘Neurodegeneration with brain iron accumulation (NBIA – 뇌의 철분 침착에 의한 신경퇴행성 변성)’라는 병명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뇌자기공명영상(Brain MRI)에서 관찰되는 기저핵의 철분 침착(좌측 사진 속 화살표). 통칭 ‘eye-of-the-tiger sign(호랑이의 눈 징후)’라고 부르는 소견.



이 질환은 20변 염색체에 위치한 PANK2 유전자의 이상에 의해 발생하는 상염색체 열성 유전 질환으로, 대부분 10세 이하의 어린이에게서 발병하며 근긴장이상증, 삼킴 장애, 강직, 떨림, 인지기능 저하 등의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아마 이 질환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나치 독일 하에서는, 이 환자들은 그저 장애인으로 분류되어 강제 수용되었을 것이고, 결국에는 안락사(를 빙자한 학살)를 당한 후에 뇌가 적출되어 할러보르덴과 스파츠 같은 학자들에 의해 부검을 당했을 것입니다.

PKAN은 현재에도 아직까지는 원인만 알 뿐 완치 방법은 없는 질환입니다. 하지만, 원인 유전자가 밝혀지고 철분 침착이 주요한 병리기전임이 알려져 있기에, 다양한 증상 치료 및 판토테틴(Pantethine)과 같은 치료제로서의 가능성이 있는 물질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의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의 발전도 매우 중요하지만, 의학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기에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치 시대 의사들이 저질렀던 과오는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료인들의 자성 의지와 노력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제네바 선언으로 변모시켰습니다. 먼 훗날에는 그 시대에 맞춰 제네바 선언의 내용이 또 다르게 변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변화의 원인이 또 다른 ‘의학 사고’는 아니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1.     Luca Voges and Andreas Kupsch. Renaming of Hallervorden–Spatz disease: the second man behind the name of the disease. J Neural Transm (Vienna). 2021; 128(11): 1635–1640.
2.     Shevell, Michael; Jüergen Peiffer (August 2001). "Julius Hallervorden's wartime activities: implications for science under dictatorship". Pediatr Neurol. 25 (2): 162–165. doi:10.1016/s0887-8994(00)00243-5
3.     Kondziella, D (2009). "Thirty neurological eponyms associated with the nazi era". European Neurology (Review). 62 (1): 5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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