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 마음의 미학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58』(조선일보 연재, 2008)
'번짐', 경계를 지우는 일
수묵(水墨)은 물과 먹이 만나 종이 위에서 어울리는 그림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아름다움은 단연 ‘번짐’입니다. 붓끝으로 선을 날카롭게 세워 대상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먹이 종이의 결을 타고 스며들며 경계가 기분 좋게 허물어지는 과정입니다. 그 흐릿함 속에서 오히려 사물은 더 깊은 입체감을 얻게 됩니다.
화자는 이 회화적 현상을 세상 모든 존재가 맺는 관계의 원리로 확장합니다. 너와 나,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사이의 딱딱한 벽을 허물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과정을 화자는 '번짐'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합니다. '번짐'은 단순한 시각적 묘사를 넘어, 서로 섞여야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상생(相生)의 철학입니다.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목련, 그리고 너와 나의 번짐
여기서 '번짐'은 소멸이나 흐릿해짐이 아닙니다. 목련꽃이 사라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 ‘여름’이라는 다음 계절로 건너가는 이행(移行)의 과정입니다.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 또한 '네게로 번집니다.' 사랑이나 친밀함은 상대를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견고한 자아의 벽을 허물어 서로가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일입니다. 너와 나의 구분이 모호해질 정도로 깊이 섞이는 이 ‘융합’이야말로 관계의 본질임을 화자는 꿰뚫어 봅니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생명의 법칙인 번짐
이 연은 생명의 법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정’이 아니라 끊임없는 ‘번짐’입니다. 고인 물이 썩듯, 흐르지 않고 번지지 않는 생명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꽃이 꽃인 채로만 남으려 한다면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 꽃이 제 모양을 풀고 번져야 비로소 열매라는 새로운 결실로 나아갑니다. 여름이 경계를 풀고 번져야 가을이 됩니다. 화자는 변화하고 변형되는 것을 상실로 보지 않고, 생명이 지속되고 확장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역동적인 과정으로 재해석합니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죽음, 삶을 완성하는 배경색
예술도 서로 분리된 섬이 아니라, 스며들고 번져서 서로를 만들며 커진다고 합니다. 청각(음악)을 시각(그림)으로 전이시키는 이 공감각적 도약을 지나, 시상은 삶과 죽음의 문제로 깊어집니다.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는 말에서 죽음은 삶을 단절시키는 검은 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이 넓게 퍼져 도달하는 완성의 단계입니다. 특히 '죽음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는 역설이 이 시의 백미입니다. 수묵화에서 여백이나 짙은 먹색이 피사체를 도드라지게 하듯, 죽음이라는 배경이 있기에 삶이라는 경치가 더 환하고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통찰입니다. 죽음을 삶 속으로 받아들여 번지게 할 때, 우리의 삶은 유한성을 넘어 더 깊은 의미를 획득한다는 말입니다.
저녁이 지나 밤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죽음도 우리에게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번짐', 나의 울타리를 여는 일
마지막 연은 따뜻하고 평화로운 귀결입니다. 산기슭 오두막 한 채가 '번져서'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는 묘사는 사실적 인과를 넘어선 시적 허용입니다. 오두막(나의 세계)이 딱딱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면 나비는 날아올 수 없습니다. 오두막이 풍경 속으로 번지듯 자신의 경계를 풀고 공간을 내어줄 때, 그 틈으로 생명의 상징인 나비가 깃들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란 상대를 내 욕망의 울타리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세계를 넓혀 타자가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 주는 넉넉한 ‘품’임을 보여줍니다.
열린 마음의 미학
이 작품은 동양화의 기법을 삶을 대하는 태도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독보적입니다. '번짐'은 미학이면서 동시에 존재론입니다. 반복되는 '번져야…'라는 리듬은 주문처럼 우리의 굳은 마음을 두드립니다. 꽃과 계절에서 시작해 삶과 죽음으로 나아가는 시선은, 결국 모난 경계를 풀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이자 생명력임을 역설합니다. 죽음조차 삶을 밝히는 등불로 삼는 이 시를 읽고 나면, 날 섰던 마음의 모서리가 둥글게 다듬어지는 위로를 받게 됩니다.
****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