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 '마음의 수수밭' 해설과 감상

- 세상에 없는 길은 만들 수가 없다

by 한현수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을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2』(조선일보 연재, 2008)



막막한 현실에서 시작된 성찰

이 시의 화자는 고통스러운 기억과 현재의 피로감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습니다. '수수밭'은 서걱거리는 질감만큼이나 거칠고 황량한 화자의 심리 상태를 대변하고, 그 속에서 화자는 삶의 무게를 지탱하며 뒤안길로 향합니다. 저무는 저녁의 풍경과 땅을 살피는 별의 시선은 화자가 처한 가라앉은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우리들로 하여금 한 존재가 겪어온 세월의 부침을 짐작하게 합니다.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상처의 반복과 생활의 무게

첫행의 '또'는 마음이 한 번 지나간 자리를 다시 지나간다는 말입니다. 수수밭은 단순한 농작물이 아니라, 키가 크고 빽빽해 시야를 가리는 공간입니다. 마음이 수수밭을 지난다는 말은, 시야가 막히고 방향 감각이 흐려지는 곳을 통과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어지는 '머위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에서는 마음의 이동을 생활의 동작(뒤란, 얹다)과 겹쳐 표현하고 있습니다. 추상적 고뇌가 아니라, 살림의 일처럼 몸에 붙어 있는 고단함입니다. ‘몇 장 더’는 사소한 반복을 통해, 화자의 삶이 자꾸 더 얹히는 방향으로 무거워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내려앉는 시선의 세계

저녁은 시간이고, ‘저문’은 상태입니다. 화자는 시간의 저녁을 말하면서 동시에 자기 내부의 저뭄(기력, 희망, 시야의 어두움)을 말합니다. 바깥의 저녁과 안의 저뭄이 동일한 질감으로 겹칩니다.

별은 보통 하늘의 표식인데, 여기서 '개밥바라기별(금성)'은 오히려 땅을 들여다보는 존재로 바뀝니다. 별조차 이미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화자의 내면이 온통 현실의 고통(땅)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는 구절도 역설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내려놓으면 편해진다’고 말하지만, 화자에게 ‘내려놓기’는 해방이 아니라 방향 상실입니다. 화자가 이미 세상과 풀 수 없을 만큼 얽혀 있는 채로 굴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을 끊어내면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길의 좌표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견딤의 역사

보리밭은 생존의 상징이고, 보릿고개는 결핍을 통과하는 시간입니다. 화자에게 이것은 단순히 추억의 장식이 아닙니다. 지금 '보리밭, 보릿고개'가 ‘길 끝’에 있다는 말은, 그 견딤의 시간이 과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삶의 끝자락에서 계속 나를 부른다는 구조입니다.

화자는 이 막막함을 '넘은 세월'이라는 공동의 체험(또는 화자가 긴 세월 동안 버티고 넘어온 과정)으로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이 대목은 화자를 더 어둡게 만드는 동시에, 나중의 ‘각성’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됩니다. '나(또는 우리)는 원래 이런 길 위에 있던 사람'이라는 자각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등짝을 때리는 바람, 암처럼 깊은 그림자

세계는 화자를 힘으로 몰아붙입니다. 특히 ‘등짝’은 뒤쪽, 즉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곳에서 오는 타격입니다. 삶의 압박은 정면보다도 등 뒤에서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림자는 자연스러운 어둠이 아니라, '암처럼' 몸을 파고드는 병적·잠식적 어둠으로 형상화됩니다.

여기서 화자는 단순한 우울이 아니라, 길 자체가 병처럼 깊게 막아서는 위기의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을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시선의 방향 전환

머리를 흔든다는 것은 감정의 찌꺼기, 눈앞의 착시를 털어내는 동작입니다. 화자는 단번에 털어내지 못하고 ‘몇 번’ 흔듭니다. 각성은 번쩍 오지만, 번쩍 오기까지는 몸의 반복 동작이 필요합니다.

화자는 산을 올려다 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작품의 전환점입니다. 문제의 해결책이 새로운 정보나 기술이 아니라 시선의 방향 바꾸기로 제시됩니다. 아래만 보던 마음이 위를 보기 시작할 때, 세계는 바뀌지 않지만 내가 세계를 읽는 방식이 바뀝니다.

‘푸름’은 관념적 희망을 살아 있는 촉감(싱싱함)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어깨를 툭’ 치는 것도 현실적인 동작으로 건네는 작지만 단호한 권유를 느끼게 합니다. 희망이 '말'이 아니라 움직이게 하는 촉발로 나타납니다.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막막함의 상승, 내부의 경책

'올라가라고 / 그래야 한다고'라는 명령은 외부에서 오지만, 동시에 내부에서도 울립니다. 화자는 이미 자신이 내려앉아 있었음을 인정하고, 올라가는 쪽이 살 길임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막막함이 ‘사라진다’가 아니라 ‘올라간다’가 됩니다. 절망은 제거가 아니라 고도(높이)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나를 짓밟는 바닥 같은 막막함이라도 그것이 위로 올라가면, 내가 들고 가야 할 짐으로 바뀌게 됩니다.

‘목탁’은 수행의 리듬, 깨어 있음, 경책의 신호입니다. ‘새’는 자연의 소리지만, ‘목탁새’는 경책이 되는 자연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속’에서 우짖습니다. 결국 화자를 깨우는 것은 외부의 훈계가 아니라, 화자 내부에 남아 있던 각성의 본능(혹은 양심, 자기 경계)인 것입니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 오르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 만들 수가 없다'는, 달콤한 도피를 차단하는 구절입니다. 마음이 막막할수록 ‘어딘가에 더 쉬운 출구가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만, 화자는 그 상상을 끊어 버립니다. 화자는 위로를 주면서도 동시에 냉정한 현실 감각을 세웁니다.

그래서 화자는 실제로 '산 옆구리를 끼고 / 절벽을' 오릅니다. 쉬운 길이 아니라, 현실의 경사와 위험을 인정한 뒤에 오르는 길입니다. 즉, 이 작품의 구원은 '현실을 없애는 구원'이 아니라 현실을 통과하는 구원입니다.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외부 풍경이 내부의 빛으로

산이 나를 둘러싼 배경이 아니라,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때 천불산은 단지 지명이 아니라 수행·다중의 부처·오랜 침묵의 축적 같은 상징을 품은 존재일 것입니다.
‘들어와 앉는다’는 표현은 '스쳐 지나간다'가 아니라, 내 몸속에 정착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돌아갈 수 있는 중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가 됩니다. 처음의 수수밭은 시야를 막는 어둑한 통로였는데, 마지막의 수수밭은 환한 내부 풍경이 됩니다. 수수밭이 사라진 게 아니라, 같은 수수밭에 빛이 생깁니다.

이것이 화자의 성취입니다.



현실의 어둠 속에서 세우는 시선의 길

이 작품의 가치는 '절망에서 희망으로'라는 도식적인 위로를 넘어, 시선의 방향을 수정함으로써 삶의 풍경을 재배치하는 인식의 힘에 있습니다. 화자는 지상의 결핍과 고통에 갇혀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려 산과 하늘의 생명력을 수용하고, 이를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자기 구원을 완성합니다.

특히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가파른 절벽을 직접 오르는 실천을 강조한 점은 이 시가 지닌 묵직한 윤리성을 보여줍니다. '세상에 없는 길'을 꿈꾸기보다 '세상 안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끝에 얻은 내면의 빛은, 우리에게 삶의 거친 수수밭을 어떻게 환하게 밝힐 수 있는지에 대한 가장 정직하고도 아름다운 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

네이버블로그 현대시 전문 해설과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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