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 '보리피리' 해설과 감상

- 낙인이 지워 버린 고향

by 한현수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 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ㄹ 닐니리.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81』(조선일보 연재, 2008)



낙인과 격리가 만든 길 위의 화자

이 작품의 화자가 길 위에 서게 된 배경에는 한센병(당시 ‘나병’) 환자들에게 씌워졌던 격리와 낙인의 역사가 놓여 있습니다. 특히 이 배제의 틀은 일제강점기부터 제도와 관행으로 굳어지기 시작했고, 해방 이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격리는 치료의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자유와 가족, 삶의 연속을 끊어 버리는 통제로 체감되기 쉬웠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언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고, 들어가는 순간 사회적 ‘주소’가 지워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병을 둘러싼 사회의 시선과 소문도 억울했습니다. 당시에는 '아이의 간을 먹어야 낫는다' 같은 잔혹한 괴담이 떠돌기도 했는데, 이것은 치료와 무관한 미신임에도 환자를 잠재적 괴물로 만들어 추방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자의 유랑은 선택한 방랑이 아니라, 붙잡히지 않기 위해, 돌을 피하기 위해, 머물 곳을 찾기 위해 계속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던 생존 방식입니다.

이때 보리피리 소리는 단순한 봄놀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너희가 상상한 괴물이 아니라, 고향을 그리워하고 노래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처절한 생존 신고입니다. 고향의 기억과 인간사에 대한 그리움은, 바로 그 유랑의 현실 때문에 더 날카롭고 절실하게 울립니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 ㄹ 닐리리.


상실된 낙원, 되돌릴 수 없는 순수

이 두 연에 등장하는 봄의 언덕과 푸른 산, 어렸을 때의 시간은 ‘아름다운 자연’이기 전에 사회적 배제를 당하기 이전의 세계입니다. 그곳은 지금 갈 수 없습니다. 피리를 부는 것은 과거를 되살리는 기쁨이 아니라, 되돌아갈 수 없음을 확인하면서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드는 얇은 끈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그리움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사회적 추방의 증거가 됩니다.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ㄹ 닐리리.


금지된 세계, 인간사에 대한 갈망

이제 화자의 그리움은 자연을 떠나 사람 사는 거리(인환의 거리)로 향합니다. 이 지점이 화자와 독자를 더욱 아프게 만듭니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소문이 있고, 돌팔매가 있고, 눈초리가 있습니다. 그래도 화자는 그 세계를 완전히 저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틈에 섞이고 싶어 합니다.
화자가 ‘착한 마음’을 가져서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밖으로 밀려난 화자가 느끼는 절대적 고립감의 실체인 것입니다.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ㄹ 닐니리.


유랑의 지속, 눈물의 언덕

화자에게 산과 강은 풍경이 아니라 피난의 경로입니다. 넘어야 했고, 숨었어야 했고, 버텨야 했던 산과 강이 그 얼마인지(기산하) 모릅니다. 떨어져 나가는 살점과 터지는 피를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여정입니다.

'피― ㄹ 닐리리'라는 가냘픈 소리는 그 모든 모멸감과 슬픔을 집어삼키며, 죽음보다 깊은 절망 속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끝없이 이어집니다.



비극을 예술로 승화시킨 위대한 인간 정신

이 작품의 진정한 문학적 가치는 극한의 비극을 지극히 절제된 가락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자신을 짐승으로 취급하는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보리피리라는 서정적인 매개체를 통해 자신의 인간성을 고요하게 보여줍니다.

이 시에는 한 개인의 병상 기록을 넘어, 어떤 가혹한 상황에서도 파괴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이 담겨 있습니다. '닐리리'라는 경쾌한 의성어 뒤에 숨겨진 피맺힌 슬픔은 우리들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 가장 고결한 노래로 한국 시문학사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

네이버블로그 현대시 전문 해설과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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