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든 이들을 위한 정서적 응원가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83』(조선일보 연재, 2008)
상처가 무너지게 하는 게 아니라 튀어 오르게 한다면
이 시는 고통과 상처를 단순한 아픔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것을 삶의 도약대를 만드는 동력으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화자는 ‘상처’라는 부정적 상태 속에 내재된 ‘용수철’ 같은 반동의 힘에 주목하며, 생명력이 어떻게 고난을 뚫고 발현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상처 속에 감춰진 비상의 동력
화자는 시작부터 ‘상처의 용수철’을 반복하며 핵심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 반복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작품 전체를 지탱하는 단호한 선언에 가깝습니다. 즉 상처가 우리를 날게 하고 솟구치게 하는 반동의 힘으로 바뀌지 못한다면, 그 상처는 우리를 일으키지 못한 채 고통으로만 남고 만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상처가 삶을 밀어 올리는 탄성으로 전환되는 순간, 상처는 짐이 아니라 비상의 기제가 됩니다.
결국 상처의 가치는 ‘아픔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아픔이 삶을 어떻게 밀어 올리는가 하는 방향성에 달려 있습니다.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자연의 생명력이 보여주는 역동적 분출
여기서는 구체적인 자연 현상을 통해 ‘솟구쳐 오름’의 이미지를 형상화합니다. 검은 땅을 뚫고 나오는 파란 싹, 붉은 황토를 이겨낸 보리, 바위 밑에서 튀어나가는 개구리, 그리고 가시라는 고통을 딛고 담을 넘는 장미의 모습이 제시됩니다. 이들은 모두 억눌림과 통증을 에너지로 바꾸어, 생명의 경이로움을 증명하는 존재들입니다.
화자는 자연의 성장과 돌파를 통해, 상처가 생명을 꺾는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위로 튀겨 올리는 압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의지적 생명
민들레가 시멘트라는 문명의 벽을 밀어내는 행위를 ‘엉엉 울며’ 한다고 표현한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 결코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처절한 감정의 소모와 함께 진행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또한 마른 나뭇가지가 봄을 맞아 녹색의 바다를 이루는 과정을 ‘눈물 같다’고 묘사함으로써, 아름다운 결실 뒤에는 인고의 시간이 선행됨을 암시합니다. 즉 이 시는 고통을 지워 버리기보다, 그 고통을 품은 채로 끝내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생을 보여줍니다.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상처 없는 삶의 허무와 정체
화자는 다시 ‘상처의 용수철’이 없는 상황을 가정합니다. 상처라는 반동의 힘이 없다면 인간은 삶의 무게에 짓눌린 무력한 존재(나비알)에 불과하며, 스스로를 가두는 원죄와 화농(고름) 속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경고합니다.
'사과 한 알의 원죄'는 성경의 에덴동산에 비롯된 말이지만, 여기서는 존재가 자기 힘으로 바깥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죄책과 처벌의 감각 속에 갇히는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화농’은 상처를 외면하고 덮어 둘 때 안에서 곪아 버리는 결과를 가리키는 이미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상처를 회피하면 그것은 도약의 힘이 되지 못하고 내부에서 썩어 자기 감금으로 굳어지지만, 상처를 직면하고 전환할 때에만 비로소 존재는 해방의 방향으로 솟구쳐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고통에서 존재의 추진력으로
이 시는 고통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상처를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킨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특히 ‘용수철’이라는 비유를 통해 고난이 깊을수록 반작용의 힘 또한 커진다는 역동적인 생명 철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냈습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상처가 곧 자신을 밀어 올릴 힘이 될 수 있다는 통찰을 얻게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위로를 넘어 용기의 울림을 줍니다.
[비평 노트]
자연물을 소재로 삼은 시 중에서 김남조의 '겨울바다', 정호승의 '별들은 따뜻하다', 천양희의 '마음의 수수밭' 들은, 화자가 자연물을 보는 순간 문득 마음을 바꾸게 되는 작품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작품군을 '전환(각성)형 치유 서정'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조정권의 '산정 묘지1',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김승희 '솟구쳐 오르기 2'와 같은 작품들은 시인이 생각하는 삶의 원리를 자연물에 비유하여 표현합니다. 이런 작품들에서는 자연물이 늘 훈계자나 스승의 역할을 합니다. 나는 이런 작품군을 '교시(교훈)형 서정'이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